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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이준 할복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가짜뉴스였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8. 10. 16:59

‘헤이그 밀사 이준 할복자살’은 대한매일신보의 가짜뉴스였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311. 모두가 쉬쉬했던 ‘미화된 역사’

입력 2022.08.10 03:00
 
 
 
 
 
1962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됐다가 현지에서 죽은 이준의 사인 논란에 대해 자살설과 분사설에 대한 각종 기록과 증언을 취합한 문건이다. 위 81~83페이지에 “신채호와 양기탁, 베델이 민족 긍지를 위해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조작했다”는 증언이 수록돼 있다. ‘할복자살’과 ‘분사(憤死)’로 대립하던 이준의 죽음에 대해 국사편찬위는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로 타협을 봤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유튜브 https://youtu.be/y4vZresOHjc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

 

‘해방 후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식민주의사관도 바로잡아야 하지만 동시에 민족주의 내지는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고 미화되어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검증도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이준의 사인(死因)에 관한 문제도 이와 같은 추세에서 제기되었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더 이상 자살설로 국민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이준 열사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 ‘2009년 상반기시민강좌자료집’, 서울YMCA시민논단위원회, 2009)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헤이그 밀사 가운데 이준에게는 ‘열사(烈士)’ 칭호가 붙어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 자결해 민족 자긍심을 높인 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미 식민 시대에 이준 열사의 사인 논란이 있었고, 6·25전쟁이 끝난 1950년대에는 본격적인 논쟁이 불붙었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자살이 아닌 분사(憤死·울분을 못 이기고 죽음)라고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 사실이 조작 내지는 미화, 왜곡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신문 ‘대한매일신보’가 있다. 불편한, 하지만 알아야 할 진실 이야기.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밀사 파견과 퇴위당한 황제

 

1907년, 엄혹한 때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는 실질적인 식민지로 변했다. 주권을 지킬 군사력은 없었다. 유력 정치인 중에는 “일본 밑으로 들어가자”며 노골적으로 병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 나온 계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이었다. 서울에 있던 전직 검사 이준, 간도에 있던 전직 의정부 참찬 이상설 그리고 주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비밀리에 선정돼 헤이그로 떠났다.

 

하지만 회의 참석은 불가능했다. 러일전쟁(1904~1905) 승리로 조선에 대한 ‘권리’를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은 일본은 대한제국이 회의 참석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열강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상설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한 달에 걸친 여행 끝에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위종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합류했다. 비넨호프궁 회의장 입장이 불허된 이들은 7월 9일 출입기자들 초청으로 인근 국제협회 건물 회의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한국을 위한 호소(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많은 기자가 호응했지만, 활동은 거기서 끝났다. 7월 19일 일본은 밀사를 빌미로 대한제국 내각을 통해 고종을 퇴위시키고 융희제 순종을 등극시켰다. 다음 날 꼭두각시 황제 순종은 세 밀사를 ‘거짓으로 밀사라고 칭한 죄’로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상설은 교수형,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907년 7월 20일, 8월 8일 ‘순종실록’)

1907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 호외. ‘義士 自裁(자재=자살)’라는 제목으로 ‘이준이 자결해 뜨거운 피를 뿌렸다(灑·쇄)’고 보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두 매체의 첫 보도 - 자결 순국

 

그런데 고종 강제 퇴위 사흘 전인 7월 16일 헤이그에서는 이준 장례식이 열렸다. 현지 신문 ‘하흐스허 쿠란트(Haagsche Courant)’에 따르면 이준은 7월 14일 ‘호텔방에서 갑자기 죽었다. 뺨에 난 종양을 제거했지만 살리지 못했다.’(윤병석, ‘증보 이상설전’, 1998, 일조각, p92, 93) 공동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이상설만 자리를 지켰다. 이상설은 “슬프다”라고 두 번 탄식했다.(1907년 7월 17일 ‘만국평화회의보’) 이미 기자회견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이준은 앓고 있었다. 훗날 이상설은 “약 세 첩이면 간단히 고칠 병이었는데 애석하다”고 항일 동료 이동녕에게 말했다.(이완희, ‘보재이상설선생전기초’. 윤병석, 앞 책, p96, 재인용)

 

이 소식을 조선에서 처음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7월 18일 이 신문은 호외(號外)를 발행해 이렇게 전했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씨가 현금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어제 동경 전보를 받은 즉 이씨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 다음날인 1907년 7월 19일 ‘대한매일신보’는 이 호외 내용을 본지에 다시 게재했다. 그리고 ‘격검이가(擊劔而歌: 칼을 부딪치며 노래함)’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끝내 몸안 가득한 붉은 피를 만국회의장에 한번에 흩뿌렸으니 그 충절은 만고에 필적할 이 없으리’

 

첫 보도를 경쟁지 ‘대한매일신보’에 빼앗겼던 ‘황성신문’은 이날 ‘이씨 자살설’ 제목으로 ‘자기 복부를 칼로 잘라 자살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라고 기사를 보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황성신문’은 ‘又一志士(우일지사·또 한 지사가)’라는 제목으로 특종 기사를 보도했다. ‘이준씨가 자살했다 함은 이미 보도했거니와, 또 들은 즉 이위종씨도 자살했다는 전보가 어딘가에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1907년 7월 20일 ‘황성신문’)

1907년 7월 20일 ‘황성신문’. ‘이준씨가 자살했다’는 기사와 함께 ‘또 다른 지사 이위종씨도 자처(自處=자살)했다는 전보가 어딘가 도착했다’라고 보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자결했다는 이위종은 그때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2년 전 을사조약 직후 자결 순국한 수많은 지사(志士)들을 목격한 국민들이었다. 구체적인 출처도 없는 기사들이었지만, 이역만리에서 또 누군가가 자결했다는 보도에 대한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준의 죽음과 항일 연대

 

7월 17일 일본 외무차관 진타 스미미(珍田捨巳)는 이준 사인이 상처가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단독(丹毒)이라고 통감부에 보고했다. ‘자살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으나 사실은 알려질 것’이라고 토를 달았다.(’통감부문서’5, 1. 헤이그밀사사건 및 한일협약체결 (29)한국 황제 밀사 이준 병사) 일본에서는 나가사키 ‘진세이신분(鎭西新聞)’이 ‘밀사 병사’를 처음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가 받았다는 ‘자결 사망 소식을 전한 동경 전보’는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찌 됐건 이준의 할복 소식은 순식간에 국내의 여론 동향을 바꿔버렸다. 일본을 한국의 문명 개화에 도움 주는 지원국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해주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처했다는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이준 열사의 죽음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잊힐 수 없는 애통하고 억울한 민족 정서를 대변해 주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 진영에서 즐겨 불렀던 ‘용진가(勇進歌)’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린 이준공과 육혈포로 원수 쏴 죽인 안중근처럼 원수 쳐보세’라는 가사가 삽입되기도 했다.(이명화, ‘헤이그특사가 국외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9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 ‘의사 이준씨를 조상함’이라는 재미교포 신태규 기고문을 게재했다. ‘할복 자결했다’는 기존 보도와 달리 ‘회의장에서 이준이 방성대곡을 하다가 혼절한 뒤 별세했다’라고 사실관계가 달라져 있다./국립중앙도서관

 

밝혀지는 진실

 

대한매일신보는 이후 잇달아 이준의 장거를 미화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7월 31일에는 참석 기자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이에 기자단은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하기로 결의했다고 보도했다.(1907년 7월 31일 ‘대한매일신보’, ‘평화구락부의 동정’) 또 다른 밀사 이위종이 한 연설을 이준 연설로 보도한 것이다. 8월 31일에는 ‘헤이그의 외로운 혼, 대한열사 이준을 조상함’이라는 제목으로 만가를 게재했다.

그런데 병을 앓다 죽었다는 사실이 여러 경로로 보도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일전에 헤이그에서 온 전보를 받아보니 음력 6월 6일에 회의장에서 통곡하며 자살한(痛哭自裁·통곡자재) 사실이 명확하다’고 재확인했다.(1907년 9월 5일 ‘대한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가 주도한 ‘이준 자결 순국’ 보도는 ‘매천야록’(황현)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인용돼 사실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는 슬그머니 ‘사실관계’를 180도로 바꿔버린다. 이날 자 1면에 이 신문은 ‘의사 이준씨를 조상하고 전국 동포에게 광고함’이라는 제목의 조사를 게재했다. 조사를 쓴 사람은 1월 8일 자에 이준을 위한 의연금 5달러를 송금한 미국 교포 신태규였고 기사 형식은 ‘기고문[寄書·기서]’였다. 요즘으로 치면 외부 칼럼이라는 뜻이다. 장문의 조사 가운데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준은 독립을 회복케 하소서 하며 방성대곡하다가 혼절하여 땅에 넘어져 피를 토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다. 잠시 후 깨어나 고함지르기를 (중략) 내가 혈기 남아로 한국에 다시 태어나 한국 독립을 하늘에 고할 것이다 하더니 마침내 별세한지라.’(1908년 1월 21일 ‘대한매일신보’:국한문 혼용인 원 문장을 현대어로 고쳤다)

할복했다는 사실은 간 곳이 없고 피를 뿌렸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 1면 절반을 채운 외부 칼럼을 통해 그때까지 주장했던 ‘할복자살’을 철회하고 ‘분사(憤死)’로 팩트(fact)를 고쳐버린 것이다. 순한글과 국한문혼용 두가지로 발행하던 이 신문은 이 기고문은 순한글판에는 싣지 않았다. 신문은 바뀌었지만 신화는 철회되지 않았다.

서울 수유리 애국선열묘역에 있는 이준 열사 묘./박종인 기자

 

해방, 그리고 바로잡은 역사

 

해방이 되었다. 항일운동가와 학계에서 침묵을 깨고 진실 규명을 요구했다. 1956년 사학자 이병도가 쓴 ‘국사대관’에서 병사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온 사회가 들끓었다. 그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6년 만인 1962년 10월 27일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 제목은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다. 보고서는 식민시대 문헌과 헤이그 현지 신문과 공문서, 해방 후 각종 매체 보도와 증언을 수집해 ‘자살설’과 ‘분사설’을 비교했다.

‘자살설’에 대한 1차적 근거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이었다. 다른 문헌들은 대부분 이들 신문이 직간접적 근거였다. ‘분사설’ 근거들은 당대 독립운동가의 직접 증언과 네덜란드 언론과 공문서였다. 그리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김수산(김광희)의 증언이 보고서에 실렸다.

 

‘한 고향 사람이던 이규풍, 안병무, 김석토 등 제씨와 함께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가게 되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이상설 씨와 만나게 되어 이준 선생의 사인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에 의하면 선생은 일본의 방해와 열국의 냉정으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매 심화(心禍)가 터져 잔등에 종기가 생기어 드디어는 이 등창으로 말미암아 운명하였다는 것이다. 해삼위를 떠나 만주에서 만난 양기탁씨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단재 신채호씨가 양기탁씨 본인 및 배설씨와 협의하여 이준 선생의 분사(憤死)를 민족적 긍지로서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끔 하였다고 말했다.’(독립운동가 김수산(김광희), 국사편찬위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1962, pp81, 82)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공동운영인이었고 신채호는 이 신문 주필이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 밀사로부터 사실을 들었고, 민족을 위해 가짜뉴스를 썼노라는 고백을 그 뉴스를 쓴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증언이었다. 1956년 이준 열사 추모 단체인 ‘일성회’는 “국민 사기 앙양을 참작해 분사라 해도 자살로 해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요구했다. 6년 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성회 요구를 수용해 ‘분사’도 ‘할복자살’도 아닌 ‘순국(殉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국편위 앞 보고서, p33) ‘할복자살설은 모든 사실로 보아 근거 없는 것이지만 나라를 위해 일을 하다 타국에서 별세한 만큼 이를 순국으로 적기로 했다’는 것이다(1962년 10월 28일 ‘조선일보’ 등) 여기까지 진실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벌어진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