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이 땅의 평안을 기원하며 노랗게 노랗게 피어난 봄꽃의 새 노래
노랗게 봄이 말 걸어옵니다. 한꺼번에 불러 젖히는 봄 노래에 걸음이 하냥 느려집니다.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온 이 즈음, 노란 봄 꽃들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꽃들이 노랗게 일으킨 봄바람 앞에 걸음을 멈추고 꽃잎들 사이로 멀리 내다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가만히 오래 바라봅니다. 우리의 봄 하늘이 이토록 새파란 빛으로 찬란할 수 있는 건 필경 팬데믹이 가져온 예기치 않은 결과겠지요. 언제나 서쪽 하늘에서 몰려오는 뿌연 황사와 미세먼지로 희부연하기만 했던 봄 하늘이 유난히 파랗습니다. 그 하늘 아래 노랗게 피어난 산수유 꽃이 눈부시게 찬란합니다.
딱 두 그루입니다. 어른 가슴 높이 쯤 높은 길가 화단 위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산수유가 피운 노란 꽃이 지금 한창입니다. 무더기로 줄 지어 서 있는 산수유 마을 아닌 어디에서라도 산수유 꽃이 펼치는 봄 노래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나뭇가지가 조금만 낮게 우리 눈 높이까지 내려왔더라면 아마 하나의 작은 구슬 모양의 꽃주머니에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노란 꽃송이를 헤아리느라 흐르는 시간을 잊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멀리 바라만 보아도 그 작디작은 꽃송이 하나하나가 이뤄낸 생명의 신비는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꽃 송이 하나하나를 짚어본다면 나무와 더불어, 꽃과 더불어 지나온 세월의 마디마디를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산수유 꽃 아래의 철제 울타리는 온통 노란 개나리로 뒤덮였습니다. 이 즈음 이 땅의 산과 들,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라도 만날 수 있는 개나리 꽃이 마치 채 잎을 돋우지 못해 헐벗은 듯 보이는 산수유 나무줄기를 보호하듯 에워쌌습니다. 해마다 같은 곳, 같은 울타리 곁에서 피어나지만, 그가 어느 순간 화들짝 불러오는 봄바람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개나리 노란 꽃은 짙어가는 이 봄의 다사한 봄바람과 지난 세월 동안 이 울타리를 스쳐간 모든 봄바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넉 장의 노란 꽃잎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작은 꽃 안에는 이 길을 스쳐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겠지요.
산수유 개나리는 우리 땅에서 여느 봄꽃보다 친숙한 꽃이어서, 오히려 봄마다 다시 또 놀랍게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습니다. 개나리와 산수유의 노란 꽃 무더기에 휩싸이는 바람에 도시의 잿빛 겨울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마치 회색빛 겨울이 노란 빛깔로 도시 전체를 봄맞이 천갈이 하는 것처럼 밝고 싱그러워졌습니다. 사실 대개의 봄꽃이 그렇지만 아직 초록의 잎도 내지 않은 채 꽃부터 피운 개나리와 산수유는 있는 힘을 다해 생존 투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꽃을 찾아올 벌나비도 아직은 넉넉지 않은데다 꽃 피우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잎도 아직 나오지 않은 위태로운 상태이니까요.
산수유 개나리 노란 꽃 앞에 머무르다 보니, 다시 노란 수선화 꽃이 더불어 떠오릅니다. 지난 주에 찾아보았던 천리포 숲의 수선화입니다. 개나리 산수유처럼 노랗게 피어난 봄꽃입니다. 너른 정원 한가운데에서 소리없이 ‘봄’이라는 주제의 협주곡을 울리는 꽃, 봄의 작은 나팔입니다. 이제 따뜻하고 밝은 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또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신발 끈 조여매고 처진 어깨 툭툭 털고 일어나, 새 잎 틔우느라 안간힘하는 이 땅의 큰 나무들을 찾아 길 위에 올라야 할 시간입니다.
고맙습니다.
- 4월 4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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