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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올 가을 풍년을 약속하며 봄마중에 나선 곱디고운 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3. 29. 14:38

[나무편지] 올 가을 풍년을 약속하며 봄마중에 나선 곱디고운 꽃

  물이 모자랐던 겁니다. 주말에 비 내리더니 도시의 개나리 꽃봉오리가 한꺼번에 벌어졌습니다. 개나리보다 먼저 오가는 길을 노랗게 밝힌 건 산수유였는데, 비 내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산수유 노란 꽃 아래 울타리의 개나리가 한꺼번에 꽃잎을 열었습니다. 매일 지나는 길가……, 그 동안 그 많은 개나리들이 꽃봉오리만 맺은 채 옴쭉달싹하지 않더니, 하룻만에…… 하룻밤 사이에 일제히 노란 꽃잎을 내밀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이 길은 나무들의 노란 웃음이 왁자지껄해지겠지요. 반갑게 맞이하는 봄입니다.

  가느다란 꽃잎 넉 장이 꼬불꼬불 맺혔다가 솜씨좋은 마술사의 요술 리본처럼 스르륵 풀리는 풍년화의 봄 노래는 언제라도 신비롭습니다. 천리포 숲에는 풍년화가 지금 한창입니다. 리본처럼 가느다란 풍년화 꽃잎은 이미 활짝 펼쳐졌습니다. 풍년화 꽃이 처음 리본 모양의 꽃잎을 풀어헤친 건 꽤 지난 일입니다. 아직 차고 건조한 겨울을 품은 바람에 신음하며 꽃잎은 가만가만 가늘고 긴 꽃잎을 풀어헤쳤습니다. 겨울 차가운 바람을 스쳐보낸 풍년화 꽃차례가 드디어 따스한 바람을 일으켜 정원에 퍼뜨립니다. 풍년화 꽃잎이 스쳐보낸 바람들의 자취를 오래 바라봅니다.

  겨울 바람을 물리친 풍년화 꽃잎이 노랗게 일으킨 봄 바람에는 그의 이름처럼 풍요의 기미가 들어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풍년화 꽃이 풍성하게 피어난다는 건 다가오는 우리 가을의 풍년에 대한 예고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올에도 천리포 숲 겨울 정원 안에 서 있는 몇 그루의 풍년화가 모두 풍성하고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차갑고 건조한 숨을 품었던 겨울, 잿빛 냄새를 모두 소멸시민 노란 풍년화 꽃차례가 겨울의 자취를 거둬냅니다. 봄의 향기가 마침내 거대한 오페라의 서곡처럼 장엄하게 울립니다.

  꽃차례 모양은 똑같습니다만, 풍년화 종류가 여럿이어서 제가끔 미묘한 차이를 가집니다. 가느다란 꽃잎의 길이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고, 돌돌 말리는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다른 건 빛깔입니다. 대개의 풍년화 꽃은 노란 색이지만, 품종마다 꽃잎의 빛깔은 서로 다릅니다. 초록 빛을 머금은 노란 빛이어서 연두 색으로 피어난 꽃이 있는가 하면 생뚱맞게 붉은 빛으로 피어나는 풍년화 꽃도 몇 종류 더 있습니다. 제가끔 서로 다른 모양과 빛깔이지만, 모두가 우리 사는 이 땅에 풍요의 기미를 알려온다는 건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른 봄의 풍년화는 반갑습니다.

  혹독했던 겨울 가뭄 탓에 봄의 걸음걸이가 더딘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 시작한 봄은 아마도 여느 해 봄 못잖은 빠른 걸음으로 풍요의 계절을 향해 치달릴 겁니다. 빠르게 흐르는 계절의 아름다운 향기와 소리를 마음 깊이 담기 위해서, 지금 더 깊은 숨을 들이쉬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의 꽃 이름을 알려드립니다. 맨 위의 사진은 ‘사순절의 장미’로 불리는 헬레보러스이고, 그 다음 석 장은 풍년화 품종들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 사진은 ‘봄맞이꽃’이라고도 부르는 ‘영춘화’ 꽃입니다. 모두 봄볕 찬란했던 지난 주 천리포수목원의 풍경입니다.

  고맙습니다.

- 3월 28일 아침에 …… 솔숲에서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