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 듯한 아름답고 아늑한 솔숲에서
[나무편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 듯한 아름답고 아늑한 솔숲에서
편안하게 들어서 쉴 수 있는 솔숲이 그리운 날들입니다. 거슬리는 모든 소음이 잦아드는 고요의 숲 말입니다. 지난 해 가을에 답사한 충북 제천 포전리 마을 어귀에서 만난 소나무숲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습니다. 이 숲에는 산림청이 2007년에 보호수 지정번호 ‘제천 86호’로 지정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그루만 보호수로 지정한 건 아무래도 잘못입니다. 보호수로 지정한 소나무가 서 있는 이 숲에는 모두 서른 네 그루의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서 있고, 심지어 제천시에서도 ‘포전리 우량소나무림’이라는 이름으로 이 숲 전체를 보호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 가운데 한 그루만 보호수로 지정한 게 석연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보호수로 지정한 한 그루의 소나무가 이 숲에서 가장 큰 나무도 가장 오래된 나무도 아니거든요. 책임 있는 관리자가 현장에 나와 조금만 더 조사했어도 이런 지정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천 포전리 소나무숲〉에 모여 서 있는 서른 네 그루의 소나무는 시청에서 나무마다 제가끔 지정번호를 매기고,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들 소나무는 제가끔 나무나이와 규모에서 차이가 있는데, 그 가운데, 16호의 번호를 가진 소나무가 산림청이 보호수로 지정한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그러나 곁에 있는 14호, 15호, 17호의 소나무는 16호의 소나무와 나무나이와 규모가 비슷합니다. 한 그루만 보호수로 지정해야 할 이유가 따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호수 지정 당시의 측정 값도 틀렸습니다. 보호수인 16호 소나무는 나무나이 400년으로 기록돼 있고, 나무높이 13m, 가슴높이 줄기둘레 7m로 돼 있는데, 이 가운데 가슴높이 줄기둘레와 나무나이는 분명히 잘못된 측정값입니다.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7m라면 우리나라의 소나무 가운데에는 매우 큰 나무에 속합니다. 정밀측정기가 없다 해도 그저 간단히 나무 줄기를 안아보기만 해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고작해야 어른의 한 아름을 살짝 넘는 정도밖에 안 됩니다. 대략 1.8m입니다. 400년이라고 기록한 나무나이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측정이 이루어진 게 2007년, 즉 최신 장비를 충분히 동원할 수 있는 고작 16년 전의 일이라는 걸 보면 참 무성의한 측정이고 지정 결과라 하겠습니다. 산림청의 보호수 관련 행정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힐 만합니다.
대략 백 년에서 이백 년 정도 된 소나무 서른 네 그루가 모여 있는 이 소나무숲은 산림청의 부실한 관리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다운 숲입니다. 소나무숲이 있는 포전리라는 마을은 아주 아늑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입니다. 예전에는 개울가에 밭이 있었던 곳이어서 개밭, 개앗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포전(浦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대부분 지역이 산지이고,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이 마을을 지나는 아늑한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소나무숲까지 이어지는 마을 길은 정갈한 포장도로로 이어지지만 폭이 좁고, 자동차의 통행량도 적은 조용한 마을입니다.
이 도로 변에서 만날 수 있는 〈제천 포전리 소나무 숲〉은 오래 전부터 마을의 당숲이었다고 전합니다. 삼천 제곱미터 가까이 되는 이 숲 안에는 큼지막한 당집이 잘 보존돼 있습니다. 숲을 찾았던 그 날, 당집의 전기배선을 수리하기 위해 나온 전기기사님을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제천시청에서 파견한 분이라고 하더군요. 평소에 잘 관리한 덕에 특별히 손을 봐야 할 게 없다는 게 기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이 당집을 중심으로 당제를 지내왔다고 전하는데, 소나무숲 가장자리의 살림집에 사는 마을 사람 이야기에 따르면 최근에는 당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당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성의가 저절로 시들해진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했습니다.
이백 년이면 그리 오래 된 숲이라 할 수 없지만, 이 숲에서 당제를 지낸 배경과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구전이나 기록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답사 뒤에 향토지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검색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자연 상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숲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제천 포전리 소나무 숲〉에는 울타리도 석축도 하지 않고 현재로서는 자연 상태 그대로입니다. 숲 초입의 진입로에는 나무 데크로 쉼터를 설치해서 마을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으며 숲 안에도 긴의자 몇 개를 듬성듬성 놓은 정도입니다. 숲을 이룬 서른 네 그루의 나무 모두에서 외과수술 흔적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제천 포전리 소나무 숲〉에 있는 소나무는 사실 우리나라의 여느 큰 소나무에 비해 그리 크고 오래 된 나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나무나이와 규모가 문화재로 지정한 다른 소나무에 비해 현저하게 모자란 편입니다. 그러나 우량한 형질의 소나무가 모여 있는 숲은 전국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오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마을 숲인 건 분명합니다. 더구나 마을의 상징으로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숲인데다, 농촌 마을의 분위기에 맞춤한 경관적 가치도 높은 숲입니다. 오래도록 잘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소나무숲이 되기를 기대해볼 만합니다.
이번 한 주는 여러 소음들로 매사가 어지럽겠지요. 제발 이번 주 지나고만큼은 이 어지러운 소음들이 잦아들기만을 기대해봅니다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날들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곁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을 다독여야 하지 싶습니다.
한 주일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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