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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3. 22. 22:46

사랑을 위하여

나호열

 

1.

 

사랑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부터 비로소 완성된다.

 

2.

 

나는 수없이, 계속해서 가혹하게 죽어가고 있다.

으슥한 골목에서, 익명으로, 공중전화 박스에서 몰매를 맞고, 갑자기 의문의 칼에 찔리면서, 뺑소니차에 버려지면서, 불심검문을 받고 절해고도에 유폐되면서, 멍텅구리 배에 선원이 되기도 하고 아, 나는 선택이 없는 계급투쟁의 제물이 되면서 나는 수없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것만큼 나는 수없이 헛발질을 하면서 더 참혹한 모습으로 외계인처럼 점점 더 흉측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나는 왜 이렇게 사육되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하루만큼 죽어가고 그만큼 새로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면의 시대

 

대면하고 있는 서로에 대하여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야수처럼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이빨도 없으면서, 초식동물처럼 되새김위도 없으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며 무엇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는가, 서로가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하면서 그 가면을 벗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똑같은 하나의 얼굴을 나르시스처럼 바라보고 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신앙에 정죄하는 대신에 우리는 ‘너’라는 이인칭대명사를 버리고 ‘그’라는 삼인칭 대명사로 서로를 격절시키고 있다. 태양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권총을 발사하는 뫼르쏘!

그것이 우리가 부르고 있는 우리의, 오늘의 이름이다.

가슴팍에 들어와 박히는 탄환처럼 우리는 그 이름을 치명적으로 받아들인다.

배추흰나비가 징그러운 애벌레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과거를 출산하지 못한다.

과거형의, 그 아름답고 깊은 문법을 잃어버리고, 되돌아가야 할 길도 시간도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없는 총성, 자신이 또 다른 자신에게 쏴부치는 결별의 외침은 창이 없는 단자가 되어 어지럽게 부딪치고 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석가가 지나가고 공자의 행렬이 지나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를 닫고 눈을 감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낙엽으로 어지럽게 흩날리고 아무도 그들의 뒤를 좇으려 하지 않았다.

궁핍한 시대일수록, 고독한 격절의 시대일수록 불온한 교서처럼 횡행하는 것을 주문으로 외면서, 마음에 닿으면서도 행동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라! 누가 소리쳤다. 모독하지 마시오! 또 다른 사람이 맞받아쳤다.

더러운 것을 훔쳐내고 닦아내었던 사랑은 걸레가 되어 사납게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3.

 

수석이 취미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쉬는 날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배낭을 매고 돌을 주으러 강가나, 좋은 돌이 있다는 곳이면 어느 곳이건 마다하지 않고 먼 길을 가곤 했다.

처음엔 배낭 가득히, 이상하고 신기하기 조차한 돌들을 가져와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하게 집안에 진열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배낭은 비어 있기 일쑤였고 마침내 궁금하게 여긴 그의 아내가 물었다.

“ 그 아까운 시간을 소비해 가면서 소득도 없는 일을 왜 계속하는 것인가요?”

그는 싱긋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돌밭에 가면 그곳에 널려 있는 돌들이 모두 내 것으로 보였소, 욕심껏 배낭에 담다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즐거워지기조차 했소.”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 하는 아내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 먼 길을 걷다보면 배낭 속에 있는 돌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법이오. 집에 돌아오기에 먼 길, 하나 둘 배낭에서 돌을 버리며 배낭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어지 집으로 수월히 돌아올 수 있겠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오 힘들여 낚시를 해서 고기를 놓아주는 마음이나 죽음으로 가는 길에 얼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갈 것인지를 헤아리는 마음이나 무엇이 크게 다르단 말이오.”

 

그는 행위의 덧없음, 비어 있음의 의미를 아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천 만근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터득했던 것이다.

 

4.

 

도대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은 어떤 것일까?

나는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깊은 산 속의 옹달샘은 무엇을 꿈꿀까?

강이나 큰 바다를 꿈꿀 수도 있겠지만 그 옹달샘은 지치고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을 기다린다.

번잡한 시정 市井이 아니고 눈에 띄게 화려한 곳도 아니고 후미진 곳에, 깊은 산 속에 옹달샘은 있다.

진실로 물 한 모금이 필요한 사람에게만이 소중한 옹달샘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들이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래 오래 먼 길을 가는 나그네들을 기다리다가 전신을 그들에게 준다, 보상도 없이 맑은 영혼을 뿜어 올리면서 모든 이 세상의 이해와 조건을 떠나서 단지 목마르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 사람들이 다시 먼 길을 가서 오래 오래 그 말고 달디 단 물맛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메마르지 않는 옹달샘의 외로움이 사랑이라고 나는 말한다.

 

5.

 

한 여름 숲길에서 매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수 천, 수 만 마리가 일시에 쏟아내는 그 소리는 폭포의 굉음과도 같고 한 여름 예고도 없이 서늘히 내리는 소리와도 같다.

그러고 보니 저것은 울음인가, 웃음인가,

한 여름이 지나면 사라질 목숨에 대한 통곡인가 아니면 수 년 동안 땅 밑에 살면서 인내하고 기다려왔던 지상에의 환호인가.

나는 그저 생각에 머물 뿐이다.

저 매미들의 집, 땅 밑의 굼벵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문득 잃어버린 사랑을 찾는다.

가을이 오면 한결 투명해질 나의 목숨

머뭇거리며 한 글자도 적지 못한 백지 같은 세월의 꼭대기에 숨어서 매미가 운다. 바보처럼.

 

6.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길이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창작지원금을 받아 간행한 시집 『망각은 하얗다』(예진 1990) 말미에 수록한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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