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잊혀져 가는 시의 길을 더듬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24. 11:26

내 서가의 귀중본

이동주 시선집 散調(산조)

 

잊혀져 가는 시의 길을 더듬다

 

나호열

 

비좁은 집을 차지하는 서가를 조금씩 비우고 있다. 젊은 날 등대가 되고 나침반이 되었던 책들이 이제는 눈이 어두워져서 내 남은 생에 벗이 될 몇 권을 남겨두고자하니 아쉽기는 하여도 시류가 변해도 맛과 멋이 변하지 않는 시집 한 권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1979년 2월 간행 우일문화사

이동주 시인의 시선집『散調』는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1979년 2월에 우일문화사에서 발간되었다. 시인이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났으니 야릇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병상에서 시인이 외운 시 30편만을 수록하였기에 그 뜻이 더욱 애틋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 이후 산재해 있던 시들을 포함하여 총 165편의 시전집이 2010년 현대문학사에서 간행되어 시인의 작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음이 다행한 일이다.

 

시선집『散調』의 짧은 서문을 읽어보면 고독한 방랑자의 포즈가 은연중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 박복한 존재라고 술회하면서 자신의 일에 성공한 바가 없다고 되뇌인다. 남도의 유장하고 낭창한 한의 정서를 우리의 가락에 실은 시편들은 깊은 차맛이 난다. 그의 시편 중에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은「강강술래」이다. 1950년대말 선친의 직장이 빛고을 광주에 있었는데, 장소는 기억나지 않으나 대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보름달밤에 강강술래 공연을 보았던 기억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오래 전 그 풍경과 어우러진 이 시는 숨 막히는 역동을 느끼게 한다. 군무의 내면에 꿈틀대는 민중의 애환과 울분을 간결한 시각적 이미지를 포착해낸 솜씨는 두고두고 음미하여도 아름다운 슬픔을 느끼게 한다.

 

여울에 몰린 銀魚떼

 

가응 가응 수워얼래이

 

목을 빼면 서름이 솟고

 

白薔微밭에

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갈대가 스러진다

旗幅이 찢어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강강술래」 전문

 

 

시인 이동주는 이순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보다 십 년을 더 살아 종심을 넘어가면서 그가 걸어갔던 외로운 길을 시선집을 읽고 또 읽으며 더듬어 본다. 오늘날의 현대시가 잊거나 잃어가고 있는 시의 운율이 결코 지난 시절의 고답한 시류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공고하게 지켜나가야 할 우리 말에 대한 사랑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가끔씩 곁눈질하게 되는 산문화되고 문법을 해체한 현대시의 조류에 흔들리지 않고 서정의 원류가 소리글자인 한글에 어우러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음은 텅 비어가는 서가에 꼿꼿이 자리하고 있는 옛 선비의 풍모가 죽비처럼 서늘하기 때문이다.

 

산조 뒷 날개부분

'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등 無等의 세상을 꿈꾸며  (0) 2023.12.05
문득, 가을이다!  (0) 2023.09.07
문득, 가을이다!  (0) 2023.07.28
사랑을 위하여  (1) 2022.03.22
폐사지를 읽다  (0) 2022.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