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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시창작론

인물시의 몇 가지 유형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3. 22. 18:30

인물시의 몇 가지 유형

 

 

◆ 인물에 대한 시 쓰기의 요점

 

1. 한 인물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찾아내라.

2. 상투적인 찬양이나 미담은 가급적 피하라.

3. 시적 대상으로 택한 인물이 주는 의미나 가치를 표현하라.

4. 시를 쓰는 주체의 명징한 해석을 가미하라.

 

<예문 1>

매헌을 만나/ 정한용

 

봄비, 뜰이 적막하다

아무도 없는 충의사* 마당으로 슬며서 들어선다

한참 그렇게 서 있는데

빈 터 가득 작은 떨림 소리가 인다

무명의 언어

측백나무다. 조팝나무와 패랭이가 나누는 대화다

해독하기 어렵고 번역하기 불가능하지만

분명 이국어는 아니다

젓국내 나는 사투리 닮았다

손 젓거나 눈썹 치켜뜰 때 그 말과

찬찬히 빗줄기 흝어낼 때 그 말이 다르다

때론 약강조, 때로는 강약약조로, 스미는 소리

뜰에 넘친다

아마 내가 거기 숨어 엿보는 걸 잊은 모양이다

아니 처음부터 난 없었던 것

사당문을 열고 스물 다섯 새파란 청년이 댓돌을 내려

내 옆에 선다 사월 오후

말씀 깊어지고, 가는 빗줄기 사이사이

시간이 느릿 기어가다 굽는다

향촉에 불을 붙이고 마당을 돌아나올 때도

내가 있던 빈 자리에는

여전히 한 사내가 서 있다

 

* 충의사: 충남 예산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사당

 

<예문 2>

매천 사당에서/ 복효근

 

절명하듯 동백꽃 지는

화엄사 곁에 두고

 

전남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

매천 사당*

뜰 앞 매화향기 높은데

 

병든 사직의 야록은 끝나지 않있다는 듯

초상화 둥근 안경 너머

눈빛이 시리다

 

눈 쌓인 노고단 바라보며

잠시 내 죽음의 자세를 생각하다

 

매천 황헌 (1855- 1910)의 사당. 구한말 시인이자 우국지사. 한일합방이 되자 이 땅의 지식인 중의 하나로 책임을 통감한다며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함.

 

<예문 3>

어둠, 길 화석/ 이경교

 

땅거미 지는 이 시각, 밀려오던 어둠이 일순 정지하였다

까마귀 한 마리 잿빛 마을을 가로 질러 날아간다

무슨 빛깔의 소리에 이끌려 지구가 기우는 순간

나는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선 어둠을 예감할 때가

진정한 어둠이다

어둠이란 언어까지 지워버린 뒤 찾아올 밤은

어둠이라 말할 수 없다

까마귀의 날개짓마저 켜버릴 것이므로

하지만, 아직 입술의 윤곽 희미하게 남아있는

저물녘 안개 다리 끌며 내 앞을 스쳐갈 때

죽음이 들불처럼 번지는 저 소리

어둠을 한 발 앞서 맞이하는 이 순간

이제 나는 다리 위에서 곱게 지워져야 한다

아니, 까마귀와 함께 잊혀져야 한다

등 굽어 발 밑 푹푹 꺼지는 아버지*

나는 지금 그 분께 가고 있다

아버지는 아니 계시다!

봉분의 흙도 마르지 않은 저 어둠 속 어디

검은 꽃잎만 화석이 된 이 길

 

* 이우목 (李愚穆 1925- 1998) 역사에 등재될 수 없는, 이름 없는 농부로 평생 살았다. 일제의 징용에서 탈출하였으며, 1950년 인공군에 편입되었으나 다시 탈출하였다. 그래서 그는 질곡의 우리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를 증거한다.

 

 

<예문 4>

 

김신묵/ 고은

 

아흔여섯 살 김신묵은

내가 죽으면 박수치며 보내달라 하고 죽었다

장례식날

그의 관이 나갈 때

박수를 쳤다

그 누구도 박수치지 않는 자 없다

산에다 묻어버리고 내려올 때

그의 말이 들렸다

박수치며 내려가라고

그래서 하나둘 박수를 쳤다

 

동두천 의정부 사이의 길이 양키 없이 빛났다.

 

* 김신묵여사는 고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예문 5>

사모곡 / 감태준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길 밖에도 가지 않고,

어머니는 달이 되어

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 

 

<예문 6>

 

어느 여배우의 죽음/나호열

 

그녀는 이혼녀였다/그녀는 파출부였다/그녀는 바람난 여자였다./그녀는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하우스에서 잠을 잤다/그녀는 버림받았고/그녀는 배반했다/그녀는 재즈를 불렀다//

 

그녀 안에 있는 모든 그녀들이/그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우울증에 걸린 이혼녀가/우울증에 걸린 파출부를 죽이려고 하고/우울증에 걸린 바람난 여자가/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는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다/우울증에 걸린 배반이/우울증에 걸린 복수를 죽이려 하고/우울증에 걸린 재즈가/우울증에 걸린 그녀의 잠을/그녀의 집을 죽이려고 찾아들었다/그녀는 죽지 않기 위해 모든 그녀들을/우울증을 죽여 버렸다//

 

스물 다섯의 젊은 여배우는/우울증에 걸린 이 세상을/몸에 매달았다/우울증이 소문처럼 이 세상을 맴돌았다

참고자료

 

테드 휴즈 Ted Hughes 『시작법 Poettry in the making』, 한기찬 역, 제 8장

주변 인물들에 관한 글쓰기

 

모든 작가들은 여러분이 아무 감정도 갖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만일 어떤 것이 여러분의 흥미를 끌거나 여러분을 흥분시키거나 여러분의 생활에 깊이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그것에 관해 말할 만한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가 없다.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자신의 친척에 대해 아는 것만큼이나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이렇게 잘 알 수 없을 것이며, 여러분의 감정 또한 그들에게 만큼 다른 어느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그토록 깊게 결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들이 친척에 대해 유독 많은 말을 하게 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친척에 대해 가지는 이러한 감정들은 그 특정의 사람들에게만 흔들리지 않고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감정의 이상한 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형과 사이가 좋다면 우리는 형을 연상시키는 소년이나 사람들과 친분을 맺기 쉬우며 이 새로운 친분이 우리가 본래 우리의 형한테만 가지고 있었던 감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같은 방식으로 만일 여러분이 작가라면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면에서 여러분의 형을 연상시키는 인물을 창조하게 된다면, 여러분이 형에 대해 가졌던 모든 친숙한 감정을 이 창조된 인물에 쏟게 되어 그 인물을 생생하게 형상하도록 도와주게 된다. 몇몇 위대한 작가들은 상상 속에서 자신들의 친척을 - 다른 모습임을 물론 다른 이름을 써서 - 재구성하는 이런 방식으로 걸작을 남겨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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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제시된 여러 시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인물에 대해 독자 여러분이 분석해 보시고 테드 휴즈의 주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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