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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우리 그림속 나무 이야기

[13] 우물가의 은밀한 이야기, 엿듣는 양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8. 30. 17:24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13] 우물가의 은밀한 이야기, 엿듣는 양반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5.07 03:00

 

 

 

 

 

신윤복, '정변야화'(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28.2x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어느 대갓집 뒷문 밖 절벽 아래에 아담한 우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쓰는 우물이 아니라 대갓집 전용 우물이다. 젊은 여인 둘과 담장 밖의 나이든 양반이 그림 속의 등장인물이다. 혜원 신윤복의 정변야화(井邊夜話), ‘우물가의 밤 이야기’다.

우선 절벽에 붙어 자라는 꽃나무부터 알아보자. 바위에는 보랏빛 꽃이 핀 철쭉 고목 세 그루가 옅은 황갈색의 새 잎과 함께 곱게 피어있다. 잎이 돋으면서 함께 꽃 피는 모습은 꽃이 먼저 피는 복사나무와 달리 바로 철쭉의 생태 특성이다. 흙이 한 줌도 없을 것 같은 척박한 바위에 기대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우리나라 나무는 진달래나 철쭉 종류가 대표적이다. 가운데 바위 틈에 핀 꽃과 오른쪽 바위 위의 꽃은 지금 활짝 핀 상태이나 왼쪽 위의 철쭉은 꽃이 거의 져가고 있다. 새로 나온 잎이 대부분이고 지고 있는 꽃은 희미하게 몇 송이가 겨우 붙어 있을 뿐이다. 두루뭉술하게 철쭉이라 했지만 잎 생김새나 바위 틈에 자라는 생태로 봐서는 식물학적인 정확한 이름은 산철쭉에 더 가깝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최고 미인 수로부인 이야기에도 철쭉은 등장한다. 이렇게 옛날부터 미인과 함께한 철쭉꽃이다. 이 그림 속 여인들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오른쪽 바위 능선을 따라서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일대의 바닥은 바위가 아니라 비옥한 흙이 있는 육산(肉山)으로 짐작되며 산 넘어 대갓집 후원으로 이어진다. 대나무는 철쭉의 터전과 같은 척박한 바위산에서는 자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추위에 약하여 서울 지방에서는 버티기 어렵다. 그러나 그림처럼 주위가 바위산으로 둘러쳐져 바람막이가 되어 준 덕분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철쭉의 꽃 피는 시기는 양력 5월 중순쯤이다. 이때의 보름달이 뜨는 시간은 밤 8시쯤이다. 달이 조금 솟아올랐으니 그림에서의 시각은 밤 9시 전후가 된다. 약간 싸늘한 맛이 나는 시간대지만 우물가 여인들은 쓰개치마를 벗어버렸고 담 밖의 양반만 두루마기를 입었다. 여인의 젊음을 간접 비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턱을 괸 여인이 두레박 끈을 잡고 있는 다른 여인에게 무언가 하소연하는 자세다. 사방관을 쓴 나이가 좀 든 양반이 귀를 쫑긋하여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 젊은 여인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점잖은 양반이 왜 엿들어야 하는지 그 사연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