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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말로 읽는 이탈리아 산골 이야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23. 13:49

“눈 오잖소야”…

강릉말로 읽는 이탈리아 산골 이야기

[조선일보 100년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44]

이탈리아 동화 ‘눈 오는 날’ 강릉말로 옮긴 소설가 이순원

입력 2020.09.23 03:00

“뭐이 눈이 오잖소야!(눈이 오네요)!”

“징말루 다형이지 뭐래요! 우덜한테는 쉴 의개두 있고 먹을 것두 개락이구 페난히 둔노 잘 데두 있잖소.(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우리한테는 쉴 곳도 있고 먹을 것도 넉넉하고 아늑한 잠자리도 있잖아요.)”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만난 소설가 이순원은“대관령에 눈이 많이 오면 사람이 밟고 간 곳만 다음 사람도 밟고 지나가서 구멍이 뽕뽕 난 길이 생겼다”면서“방아 찧을 때 쓰는‘확(곡물을 빻을 수 있도록 둥근 홈을 낸 돌)’처럼 생겨‘확길’이라 불렀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소설가 이순원(63)은 이탈리아의 동화 ‘눈 오는 날’을 강원도 사투리로 옮겼다. 동화 속 눈 내리는 이탈리아 산골마을 프리울리는 이순원의 고향인 강릉 위촌리와 닮았다. 이순원은 “대관령 자락에 있는 위촌리는 400년 넘게 조선시대 향약이 유지되고 촌장님이 계신 마을이었다”면서 “외지와 소통이 어렵다 보니 오랜 전통 속에서 말들이 고스란히 지켜져 왔다”고 소개했다.

소설 속에서도 가능한 강릉말을 살리려고 애쓴다. 소설 ‘첫사랑’에선 사투리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썼다. "'굴암 한 남박 삶아서'와 ‘도토리를 한 그릇 삶아서’가 어떻게 같은 뜻인가? 같은 물건이더라도 ‘굴암’은 굴암이고 ‘도토리’는 도토리인 것이다. ‘굴암’은 우리 어린 날 가난한 집의 한 끼 점심 양식이고, 도토리는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 그대로 다람쥐가 소풍을 갈 때 싸가지고 가는 점심이거나 때로는 도토리묵을 해 먹는 별식의 원료인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땐 마냥 고향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어른이 돼도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작가 생활을 10년쯤 하고 서른, 마흔이 되니까 이 경험이 나만 가진 보고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가학(家學)만한 게 없잖아요. 말이나 글이 민족한테뿐만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죠.”

강릉말을 연구하며 이순원의 어머니를 만난 이익섭 서울대 명예교수는 “얼마나 단어가 풍부한지, 이런 분 밑에서 어떻게 소설가가 안 나오겠나 싶을 정도”라고 했다. 이순원은 어머니가 쓰던 말로 ‘쥐가 며느내다(면내다)' ’매련이 없다(형편없다)' 같은 말들을 알려줬다. “쥐가 구멍을 뚫느라고 흙을 파냈다는 뜻인가 봐요. 집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을 때, ‘그 집은 오래돼서 쥐가 며느냈다’ 하시더라고요. 비슷하게 ‘거기 태풍이 쓸고 간 자리가 어떻더냐’ 하면 형편없다는 뜻으로 ‘아이고, 매련이 없지 뭐’ 하기도 하고요.”

매년 열리는 강릉 사투리대회의 심사를 맡기도 했다. 이순원은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TV나 유튜브로 말을 배우다 보니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강원도 사투리보다 못하다”며 웃었다. 심사는 ‘옛말을 얼마나 잘 쓰는가’가 기준이란다. “사실 강릉 사투리는 발음을 적어놓으면 다른 지역 말이랑 구분이 어려워요. 어휘보다는 억양이 독특하고 ‘뭐뭐 핸?' ’언제 완?'처럼 어미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죠. 제 추측으론 바람이 굉장히 세서 바람 사이에 말을 전하는 방식으로 어미를 축약한 게 아닐까 싶어요.”

 

춘천 김유정문학촌의 촌장이기도 한 그는 “사실 표준말에 대한 의아함을 갖고 있다”며 김유정 전집을 펼쳤다. 사전에 없는 어휘들만 모아놓은 분량이 50쪽이 넘었다. “이렇게 많은 말들을 다 방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사전을 짧은 시간 안에 급히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러다 보니 가는 체가 아니라 굵은 체로 쳐서 자갈이 다 빠져나오듯, 우리가 많은 말들을 놓친 게 아닐까 싶어요.” 이순원은 “새로 쓰는 말모이 사전도 표준말과 방언의 경계를 허무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면서 “촘촘한 체로 치지 못해서 ‘사투리’로 몰렸지만 다른 말로는 대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