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이름 가장 긴 이곳, 바위? “No”
[중앙일보] 입력 2020.08.20 05:00
우리말 찾기 여행⑤ 정선의 이색 지명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명이 있다. 이름하여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사진에서 계곡 건너편 바위 절벽이 그 지명이다. 물길이 바뀌기 전 정선 사람들이 저 바위 절벽에 매달려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계곡 이쪽으로 임도가 나 있다.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하나의 낱말이다. 보시다시피 13개 음절로 이루어졌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명이다.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깊은 계곡 안에 숨어 있다. 이름을 읽으면 바위 같지만 길이다. 길 이름이다.
진용선(57)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자타공인 ‘아리랑 선생’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돌며 아리랑을 연구하고 있다. 진 소장이 2007년 『정선 북평면 지명유래』란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긴 지명의 정체가 처음 공개됐다. 정선에는 이 열세 글자 길 말고도 별난 이름의 장소가 수두룩하다. 진 소장과 함께 정선의 이색 지명을 찾아다녔다.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아무리 봐도 바위 절벽인데 옛날엔 사람들이 저 절벽을 다녔다고 한다. 마침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 계곡을 건넜다. 이 계곡에서 유일하게 만난 사람이다.
이 긴 이름을 부를 땐 요령이 있다. 의미에 따라 몇 차례 끊어 불러야 한다. 모두 5개 의미가 이름 하나에 들어 있다. ‘안돌이/ 지돌이/ 다래미/ 한숨/ 바우.’ ‘안돌이’는 ‘바위가 많아 두 팔을 벌려 바위를 안고서야 가까스로 지나다’는 뜻이고 ‘지돌이’는 ‘바위를 등지고 돌아가다’는 뜻이다. ‘다래미’는 다람쥐의 정선 사투리다. 각 단어의 뜻을 이어붙이면 다음의 의미를 이룬다. ‘바위를 안거나 등지고 지나가야 하는, 다람쥐도 한숨을 쉬는 험한 바위길.’ 한 편의 서사가 읽히는 작명이다.
길이 얼마나 험하면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먼저 길이 들어선 지형을 보자. 숙암리는 정선군 서북쪽 맨 끝에 있는 마을이다. 평창군과 마주한다. 크고 높은 산이 첩첩이 에워싼, 문자 그대로의 두메산골이다. 숙암리 남쪽에 정선 최고봉 가리왕산(1561m)이, 북쪽에 평창 발왕산(1459m)이 서 있다. 이 두 산자락에서 평창올림픽 스키 경기가 열렸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라고 했다. 숙암리는 예부터 계곡으로 유명했다. 평창 황병산(1407m)에서 발원한 오대천을 따라 띄엄띄엄 마을이 놓였고, 마을이 자리한 굽이마다 그림 같은 풍경의 계곡이 펼쳐진다. 오대천을 품은 숙암계곡과, 발왕산과 상원산(1421m) 사이 갈미봉(1273m)에서 내려오는 단임계곡이 물 좋기로 이름이 높다. 특히 단임계곡은 오지 중의 오지다. 단임계곡 맨 끝의 계룡잠이 『정감록』에서 꼽은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다. 전란도 피한다는 이상향 말이다. 계룡잠을 넘어가면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로 이어진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이 손수 그림 정선 북평면 지명 지도.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가 지도 복판에 그려져 있다. 내비게이션에는 안 나온다.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 초입에 서 있는 안내판. '안돌이' 표기가 '안도리'로 돼 있다. 국내 최장 지명이니 이색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선군은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단임계곡 안에 안돌이지돌이다래비한숨바우가 있다. 계곡 어귀에서 7㎞ 정도 들어간 지점의 계곡 길이다. 1986년 오대천 옆으로 신작로가 나기 전 숙암리 사람들은 이 가파른 계곡 길에 매달려 평창을 드나들었다.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 옛길이 지워졌다. 직접 보니 맑은 계곡 건너편에 주름치마처럼 생긴 바위 절벽만 서 있다. 도무지 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절벽이었다. 이 주름진 바위를 ‘치마들이’라고 한단다.
정선 하늘은 세 뼘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 앞 붉은 뼝대. 동강이 크게 에두르는 제장마을은 강을 따라 뼝대가 벽처럼 늘어서 있다.
정선 사투리에 ‘뼝대’라는 게 있다. 여행 좋아하는 황동규 시인도 종종 ‘뻥대’라는 시어를 구사했는데, 표준어로는 절벽을 말한다. 하나 온전한 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궁벽한 땅까지 떠밀려온 밑바닥 삶의 시선이 빠져 있어서다.
정선의 산은, 산이라기보다 벽이다. 능선이 완만한 경사를 그리지 못하고 직각으로 꺾여 절벽을 이룬다. 어쩌다 정선까지 들어오게 된 사람들은, 눈앞에 벽처럼 서 있는 산을 올려다보며 살았다. 정선에선 집을 지을 때 뼝대를 마주 보지 않는다. 삐딱하게 집을 들인다. 뼝대는 대체로 빨간색인데, 붉은 뼝대의 기운이 화를 입히기 때문이란다. 정선 하늘은 세 뼘이라느니, 정선에선 앞산과 뒷산에 줄을 이어 빨래를 넌다느니 같은 허풍도 산에 파묻혀 사는 정선 사람의 애환이 서린 농(弄)이다.
꽃베루재에서 내려다본 나전 들판. 가을에 찍은 사진이어서 들판이 누렇게 익었다. 조양강 너머로 42번 국도가 보인다. 이 신작로가 나기 전 꽃베루는 정선과 강릉을 잇는 가장 곧고 넓은 길이었다.
정선에는 ‘베루(또는 벼루)’로 끝나는 지명도 많다. 벼랑의 사투리다. 뼝대와 의미가 통하는데, 시선이 다르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앙감(仰瞰)의 시선이 뼝대에 반영돼 있다면, 베루에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부감(俯瞰)의 시선이 포개져 있다.
북평면 나전리에 ‘꽃베루’라는 고갯길이 있다. 1960년대까지 강릉행 버스가 다녔던 큰길이다. 조양강을 따라 42번 국도가 들어선 뒤론 잊힌 옛길이 되었다. 평창올림픽 공식 트레일인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꽃베루를 지난다. 꽃베루 정상에 서면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나전 들판이 드러난다. 꽃베루는 꽃이 많이 피는 벼랑이 아니다. ‘꽃’은 ‘곧’에서 왔다. 곧은 벼랑길이란 뜻이다. 벼랑 위 길이어도 곧고 널찍해 옛날 버스가 달렸던 게다.
자연을 닮은 사람들
졸드루. 정선군 북평면 나전리에 있다. '좁은 들'이란 뜻이다. 크고 높은 산과 오대천 사이 얼마 안 되는 평지에 옥수수와 콩을 심어 밭을 일궜다. 들이 길면 진드루, 가늘면 가느드루다. 다들 고마운 이름이다.
‘졸드루’ ‘진드루’ ‘가드루’ ‘가느드루’ ‘뒤뚜르’ 같은 지명에도 정선의 고된 일상이 묻어 있다. ‘졸드루’는 ‘좁은 들’이고 ‘진드루’는 ‘긴 들’이며 ‘가드루’는 ‘(강가에 퇴적물이 쌓여) 넓어진 들’이고 ‘가느드루’는 ‘가는 들’이고 ‘뒤뚜르’는 ‘뒤뜰’이다. 평지가 드문 정선에서 밭 일구는 일은 고역이었다. 몇 뙈기 안 되는 땅이라도 옥수수·콩 따위를 심을 수 있으면 고마웠다. 하여 꼬박꼬박 이름을 지어 불러줬다.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에는 ‘뙡’이라는 1음절 지명이 남아있다.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명이면, ‘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은 지명이다. 하나 뙡과 뜻이 같은 장소는 정선에 널려 있다. 얼마 안 되는 밭을 말하기 때문이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 진 소장은 아리랑 연구뿐 아니라 정선 지명 유래에도 권위자다. 정선군에 9개 읍ㆍ면이 있는데 이 중에서 8개 읍ㆍ면의 지명 유래를 조사했다. 진 소장은 ’동갑내기 아내(배경숙씨)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정선의 지명은 왜 별날까. 우선 유난히 많은 우리말 지명이 눈에 띈다. 이름에 밴 사연을 알고 나면 애틋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진용선 소장의 설명을 옮긴다.
“정선이 바깥세상과 격리돼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이 깊은 산 속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마다 말 못할 사연이 있었겠지요. 정선은 지리적으로도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도 멀리 있었습니다. 긴 세월을 외부 세계와 차단된 채 살다 보니 독자적인 생활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정선 지명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을 닮았다는 데 있습니다. 정선 사람은 일부러 말을 늘입니다. 천천히 대신 온전히 뜻을 전달합니다. 자연이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자연에 얹혀 사는 사람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일한 만큼만 거둘 수 있으니 이름도 정직해진 것이지요. 정선아리랑에 그 딱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 사람은 저 사는 곳을 닮는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우리네가 살아온 흔적이다. 남몰래 흘린 눈물이고, 꾹꾹 참다 토해낸 한숨이다. ‘아질아질 꽃베루/ 지루하다 성마령/ 지옥 같은 이 정선을/ 누굴 따라 여기 왔나.’ 정선아리랑의 한 대목이다.
정선=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이름 가장 긴 이곳, 바위? “No”
[출처: 중앙일보]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이름 가장 긴 이곳, 바위?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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