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붓다를 만나다

붓다를 만나다 12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0. 21. 12:32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수행하는 사람들, 왜?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vangogh@joongang.co.kr
  
 

갠지스강을 건넌 싯다르타는 바이샬리로 갔다. 그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이제 고독과 외로움이란 외줄을 타고 나홀로 ‘고해(苦海)’를 건너야 했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요즘이야 붓다의 어록을 담은 책도 있고, 깨달았다는 선지식들의 메시지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싯다르타에게는 아무런 나침반도 없었다. 세 명의 스승을 거치며 체험한 시행착오가 그나마 그에게는 단초가 됐을까.    

노을로 물든 갠지스 강. 싯다르타는 이 강을 건너 다시 바이샬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홀로 수행을 시작했다

 
당시 바이샬리는 북인도 최초의 공화제 도시국가였다. 사상의 자유가 넘실대는 도시였다. 자유롭고 진보적인 분위기가 도시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싯다르타에게는 ‘침묵’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시장통에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사상에 대해 떠들며 토론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침묵의 잠수’가 필요했다.  
 
싯다르타는 한적한 곳을 찾았다. 사실 수행자가 마을에서 너무 동떨어진 곳에 사는 건 현실적으로 힘들다. 탁발을 통해 끼니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바이샬리의 서편에 있는 커다란 숲으로 갔다. 도심에서는 꽤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싯다르타는 그곳에서 내 안의 침묵과 마주했다.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의 존재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도는 곳곳에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래도 시골 오지에는 아직도 비포장 도로가 많이 있다.

인도는 곳곳에 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다. 그래도 시골 오지에는 아직도 비포장 도로가 많이 있다.

 
요즘도 인도에는 수행자들이 많다. 바이샬리로 가는 길에서도 나는 여러 수행자를 보았다. 도로 한쪽으로 흰 옷을 입고 길게 늘어선 순례 행렬이었다. 그들은 자이나교 수행자들이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순례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아예 맨발이었다.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몸으로 다니는 자이나교 수행자들도 보았다. 인도 사람들은 그들을 옷 대신 ‘하늘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처음 본 외국인 관광객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자신의 성기를 드러낸 남성 수행자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나체 수행자의 발에다 자신의 입을 맞추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을 표시한다. 왜 그럴까. 그들이 하늘을 입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델리박물관에서 만난 자이나교의 성자 마하비라 조각상.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전라의 몸으로 무소유를 지향한다. 백성호 기자

델리박물관에서 만난 자이나교의 성자 마하비라 조각상.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전라의 몸으로 무소유를 지향한다. 백성호 기자

 
하늘이 뭘까. 우리를 둘러싼 자연이자, 세상이자, 우주다. 사실은 당신도 거기에, 나도 거기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인류가 거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자연을 입은 사람’ ‘하늘을 입은 사람’‘우주를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자연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 우주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내가 집착하는 대상을 본다. 그게 자식이든, 돈이든, 사랑이든, 명예든 말이다.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없이 움켜쥐려 한다. 그래서 볼 수가 없다. 내 곁에 서있는 코스모스의 하늘거림과 머릿결을 스치는 가을바람의 온도를 읽지 못한다. 내가 그런 가을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런 가을의 한 조각임을 깨닫지 못한다.  
 
인도의 시골을 가다보면 집의 지붕이 두 종류다.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다. 나는 경주 한옥마을의 기와도 인도의 기와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시골을 가다보면 집의 지붕이 두 종류다. 초가지붕과 기와지붕이다. 나는 경주 한옥마을의 기와도 인도의 기와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자이나교의 나체 수행자는 집착과 욕망을 놓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옷을 벗었다. ‘집착의 옷’을 입고 있는 한, ‘하늘의 옷’을 입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이나교 수행자들은 완전한 무소유를 지향한다. 한마디로 자이나교는 고행을 통해서 육신에 깃든 욕망을 잠재우고 해탈을 향해서 나아가려는 종교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수행 방식은 어느날 불쑥 생겨난 게 아니다. 고대 인도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수행 전통이다. 2600년 전 싯다르타 당시에도 욕망을 누르며 해탈을 지향하는 강한 수행 풍토가 있었다. 바이샬리의 서쪽숲에 머물던 싯다르타도 그랬다. 그 역시 처음에는 고행을 통해 욕망을 누르고자 했다. 팔리어 경전에는 당시 싯다르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방식으로 수행을 했는지가 적나라하게 기록돼 있다.  
 

싯다르타는 바이샬리 외곽의 숲에서 가부좌를 튼 요가 자세로 수행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보시하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대신 숲에서 나오는 나무열매 등으로 생식을 했다.

 
싯다르타는 결단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삶의 고통’을 해결하고 ‘본질적 평화’를 찾는 일이었다. 그걸 위해 싯다르타는 육신의 목숨이라도 내던질 참이었다.  
 
싯다르타는 극단적 수행을 택했다. 요즘도 사람들은 스님이나 목회자, 가톨릭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곤 한다. 좋은 법문을 청하기도 하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2600년 전 인도에서도 그랬다. 수행자를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 모든 초대를 거절했다. 그러자 숲속에서 가부좌를 튼 채 수행만 하는 그에게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음식도 거절했다.  
인도의 음식. 여러 종류의 카레에 인도식 빵을 찍어 먹는다. 인도는 육식보다 채식이 훨씬 더 발달돼 있다.

인도의 음식. 여러 종류의 카레에 인도식 빵을 찍어 먹는다. 인도는 육식보다 채식이 훨씬 더 발달돼 있다.

 
농사도 짓지 않고, 아무런 생산활동도 하지 않던 싯다르타는 그럼 무엇을 먹었을까. 그는 최소한의 음식만 먹었다. 처음에는 하루 한 끼, 그 다음에는 이틀에 한 끼, 나중에는 며칠에 한 끼씩 먹었다. 누가 찾아와서 주는 음식도 아니었다. 숲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열매나 나무뿌리, 심지어 풀잎까지 먹었다. 그렇게 최소량의 생식(生食)만 하며 육신의 생명을 유지했다.  
 
간혹 숲에서 사람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목동이나 양치기, 나무꾼 등이었다. 그럴 때마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머무는 장소를 옮겨버렸다. 오히려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설만큼 울창하고 무서운 숲’이라고 일컫는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인도의 밀림에는 호랑이도 많았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밀림에는 호랑이가 꽤 많이 서식했다. 
인도에서는 한가로이 거니는 소가 많이 보인다. 힌두교에서 소를 신성시 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한가로이 거니는 소가 많이 보인다. 힌두교에서 소를 신성시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밀림에는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들이 꽤 많이 서식했다. 그러니 싯다르타 당시에는 밀림 속 수행이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도의 밀림에는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들이 꽤 많이 서식했다. 그러니 싯다르타 당시에는 밀림 속 수행이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숲의 묘지에서도 종종 잠을 잤다. 당시 인도는 고대 힌두교인 브라만교를 믿었다. 시신을 태우는 화장(火葬) 풍습이 있었다. 타다 남은 시신은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팔리어 경전에는 “죽은 사람의 뼈를 베게 삼아 묘지옆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는 싯다르타의 말이 기록돼 있다. 그는 차가운 서리가 내리는 겨울에는 낮에 숲 속에서 지내고, 밤에는 길에서 지냈다. 폭염이 작열하는 여름에는 낮에 길가에서 지내고, 밤에는 숲에서 지냈다. 일부러 더 춥고, 더 뜨거운 곳을 택했다.  
 
왜 그랬을까. ‘욕망’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생존의 욕구를 품고 산다. 배 고프면 먹고 싶고, 먹다 보면 더 맛있는 걸 탐한다. 그렇게 욕망은 자란다. 싯다르타는 그걸 끊고자 했다. 욕망과 해탈, 이 둘을 양자택일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죽여야 한다. 해탈에 대한 간절함이 큰 만큼, 욕망을 죽이려는 그의 의지도 강했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수행은 극단을 달렸다.  
 
바이샬리의 불교 유적지. 둥그렇게 벽돌로 쌓아올린 탑 앞에서 순례객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바이샬리의 불교 유적지. 둥그렇게 벽돌로 쌓아올린 탑 앞에서 순례객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바이샬리의 불교 유적지에 앉아서 ‘숲 속의 싯다르타’를 생각했다. 그는 아직 젊었다. 아무도 없는 밀림, 그 어두운 숲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했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두려움과 공포, 그런 감정들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래서 더 큰 두려움, 더 큰 공포와 마주하려 했다. 묘지에 굴러다니는 해골과 뼈를 보며 ‘죽음’을 사색하고, 뙤약볕에 타들어가는 자신의 피부를 보며 고통의 바닥을 읽으려 했다. 이 모든 수행을 통해 욕망의 허리를 꺾고자 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조준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수행하는 이들이 많다. 욕망과 해탈, 둘 중 하나를 취하고,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식의 사유는 결국 이분법적 세계관을 낳고 만다. 욕망과 해탈,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이 대립하는 세계다. 거기에는 끝없는 투쟁과 끝없는 갈구가 있을 뿐이다. 그런 세계에는 궁극적 평화가 없다. 당시에는 싯다르타 역시 그런 식으로 수행을 했다.  
붓다의 사리가 묻혀 있었던 바이샬리의 유적지. 이곳에 높다란 사리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이 이곳으로 와서 두 손을 모은다. 백성호 기자

붓다의 사리가 묻혀 있었던 바이샬리의 유적지. 이곳에 높다란 사리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순례객들이 이곳으로 와서 두 손을 모은다. 백성호 기자

 
먹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면 굶고, 더 먹고 싶으면 더 굶는다. 그럼 어떻게 될까. 더욱더 먹고 싶어진다. 그럼 싯다르타는 더욱더 굶는다. 그는 나중에 하루 한 톨의 곡식만 먹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래도 끝이 없다. 왜 그럴까.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지치기를 통해서는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풀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인간의 욕망도 그렇다. ‘금욕’이나 ‘고행’을 통한 수행은 가지만 칠 뿐이다. 제아무리 빠른 속도로 가지를 치더라도 욕망은 끝없이 자라난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올라온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가지치기가 아니라 ‘욕망의 정체’를 뚫어야 한다. 아무리 크고 강해 보이는 욕망도 그 속성은 비어있다(空). 그걸 깨달을 때 욕망의 뿌리가 뽑힌다. 그럼 달라진다. 욕망과 해탈을 나누는 이원론적 세계가 온세상에 해탈밖에 없는 일원론적 세계로 돌아선다. 훗날 붓다는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고 말한다. 욕망이란 감정도 하나의 상(相)이다. 바이샬리에 머물던 싯다르타는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나교 수행자들처럼 ‘극한의 고행’을 통해 욕망과 싸우려 했다. 길이 없는 땅, 싯다르타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스스로 길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