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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만나다

붓다를 만나다 13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 29. 23:07

2600년 전, 인도에도 ‘계룡산’이 있었다. 일종의 수행 타운이다. 붓다 당시 숱한 수행자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ㆍ둘 모여들며 자연스레 꾸려진 수행처. 인도 북부에 있는 보드가야의 네란자라 강이었다. 강 바로 옆에 엄청나게 큰 수행의 숲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고행림(苦行林)’이라 불렀다.  

   

인도 보드가야의 네란자라 강. 건너편에 싯다르타가 수행했다는 동굴이 있는 바위산이 보인다. 백성호 기자

 
바이샬리의 서쪽 숲에서 얼마나 머물렀을까. 싯다르타는 그 숲을 떠났다. 그리고 행각(行脚)하며 마가다국을 돌아다녔다. 싯다르타도 ‘고행림(苦行林)’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까. 아니면 정처 없이 걷다 보니 그곳에 닿았을까. 싯다르타는 자신을 따르는 다섯 수행자와 함께 ‘고행림’에 도착했다. 싯다르타는 알고 있었을까. 그곳이 자신의 생애에서 ‘마지막 승부’를 거는 수행의 공간이 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버스를 타고 네란자라 강으로 갔다. 바이샬리에서는 꽤 먼 길이었다. 강은 무척 컸다. 겨울철 건기라 강바닥은 바짝 말라 있었다. 자갈과 모래밭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강바닥을 걸었다. ‘2600년 전, 싯다르타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어떤 풍경이었을까.’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강 옆의 숲은 온통 푸르렀을 터이다. 나무마다, 그늘마다, 오솔길마다 수행자들이 빼곡했을 것이다. 당시 이곳에는 무려 2만 명의 수행자가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공동체 생활을 한 건 아니다. 각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 천차만별의 광경이 얼마나 볼 만했을까.    
 
고행림에는 ‘니간타’라고 불리던 자이나교 수행자들도 있었다. ‘니간타’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이란 뜻이다. 그들은 ‘불살생(不殺生)’을 가장 중요한 계율로 여겼다. 육식을 금하고 채식만 하는 건 물론이다. 걸어갈 때도 작은 빗자루로 자신을 앞길을 계속 쓸면서 다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개미나 작은 벌레를 밟아 죽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만큼 계율에 철저한 이들이 자이나교도다.

숲에는 다른 방식의 고행을 좇는 수행자들도 많았다. 누구는 가시 방석 위에 자신의 알몸을 누이기도 하고, 또 누구는 반쯤 땅에 파묻힌 채 수행하기도 했다. 한쪽 발로 선 채 종일 버티는 이들도 있고, 주위에 불을 피우고 그 속에 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아예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도 있고, 곡기를 끊다시피 하며 고행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었다.  

싯다르타는 묘지에서 또렷하게 목격했다. ‘나의 몸’은 순식간에 썩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존재였다. 그건 지속되지도 않았고, 영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육신의 정체는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육신으로 뭉쳐져 있다가, 육신으로 작용하다가, 흩어지는 존재였다. 싯다르타는 그걸 생각으로만, 머리로만, 관념으로만 보지 않았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썩어 들어가는 시신을 통해 ‘육신의 정체’를 보았다. 지금껏 ‘있다’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육신이 ‘빈 채로 작용할 뿐’임을 이해하면서 말이다.  
 
훗날 붓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이 수행법을 권했다. 제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묘지에 머물며 버려진 시신을 바라보았다. 붓다는 인간의 육신은 결국 물질이며, 세상의 모든 물질은 결국 소멸한다는 걸 일깨우고자 했다. 제자들 중에는 이 방법을 통해 깨침을 얻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 제자들은 묘지의 광경을 견디지 못한 채 뛰쳐나오거나,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고 심한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붓다는 나중에 이 수행법을 아예 금지시켰다.  
 
나는 네란자라 강가에 앉아서 생각했다. ‘만약 우리에게 보라면 어땠을까. 숨이 끊어진 인간의 육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똑바로 지켜보라면 어땠을까. 우리는 충격적인 광경에 치를 떨게 될까. 아니면 육신의 속성을 깨닫고 더 자유롭고 여여(如如)한 시각을 갖게 될까.’   
  

네란자라 강에서 머지 않은 곳에 바위산이 있었다. 인도인들은 ‘둔게스와리(Dungeshwari)’라고 불렀다. 코끼리 형상이라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부르고,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행한 곳이라고 ‘전정각산(前正覺山)’이라고도 불렀다. 붓다 당시에는 바위산 아래 공동묘지와 불가촉천민들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싯다르타는 저 바위산과 네란자라 강가의 숲을 오가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나는 미니버스를 타고 바위산으로 갔다. 버스는 좁은 농가도로와 시골마을을 가로질렀다. 길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바위산은 순례객들이 그리 많이 찾지는 않는 듯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마을 아이들이 몰려왔다. 몇몇 어른은 가마를 들고 와 타라고 했다. 오토바이를 가져와 태워주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돈을 내야 했다. 나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느긋이 보고 싶었다. 두 발로 직접 걷고 싶기도 했다. 2600년 전 싯다르타도 이 길을 직접 밟아서 올랐을 테니 말이다.  
 
인도에는 산이 드물고, 바위산은 더 드물다. 둔게스와리는 꽤 특이한 산이었다. 길은 다소 가팔랐다. 정상에는 높다란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정상 바로 아래 자연적으로 생겨난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싯다르타가 수행했다는 유영굴(留影窟)이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했다. 생로병사로 인해 빚어지는 삶의 그늘. 싯다르타는 그 어둠을 품고서 가부좌를 틀었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네란자라 강이 보였다. 강 옆의 고행림도 보였다. 그 위로 붉고 둥그런 해가 떨어졌다. 아름다웠다. 장관이었다. 이 바위산과 고행림을 오가며 싯다르타는 목숨을 건 수행에 돌입했다. 팔리어 경전에는 당시 싯다르타의 수행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기록돼 있다.  꼼짝도 않은 채 가부좌를 튼 그의 곁으로 가끔 목동이 다가왔다. 소와 염소를 치던 아이들은 목석처럼 앉아 있던 싯다르타가 신기했을까. 그들은 싯다르타에게 침을 뱉고, 오줌을 싸기도 했다. 또 어떤 아이는 나무 꼬챙이로 싯다르타의 귓구멍을 쑤시기도 했다. 그래도 싯다르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도 흔들림이 없었다고한다.  
 
싯다르타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네란자라 강가에서 수행을 한다는 소문은 결국 카필라 왕국까지 들어갔다. 숫도다나 왕은 마부 찬나를 보냈다. 옷과 음식을 함께 보냈다. 싯다르타는 거절했다. 자신의 단식은 수행을 위함인데, 음식을 먹는 건 결국 수행의 포기를 뜻했다. 싯다르타의 두 눈은 우물처럼 움푹 패였다. 거의 해골이 드러난 몰골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그의 두 눈은 맑디맑았다.    
 
무려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싯다르타는 나란자라 강가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수행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욕망이 올라올 때면, 그보다 몇갑절 더 큰 고통을 자처하며 잠재웠다. 그렇게 고행의 극한까지 갔다. 그 극한의 꼭지점까지 갔다. 그러나 꼭지점의 꼭대기에도 해탈은 없었다. 싯다르타는 의심했다. 왜 그럴까. 고행림을 통틀어도 싯다르타만큼 치열하게 수행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깨달음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영굴에서 바라본 네란자라 강. 저 멀리 태양 아래 강이 흐르고, 그 너머 고행림이 펼쳐져 있다. 백성호 
 
‘하루에 곡식 한 톨, 물 한 그릇만 먹었다. 나의 엉덩이는 낙타의 발처럼 말랐다. 손으로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잡혔고, 손으로 등을 만지면 뱃가죽이 잡혔다.’ 싯다르타는 대소변을 보려고 일어서다가도 넘어지기 일쑤였다. 비쩍 마른 온몸은 쭈글쭈글했다. 살가죽과 뼈만 남은 상태였다. 언뜻 보면 90세는 족히 넘어 보였다고 한다. 
 

싯다르타는 다시 복기(復棋)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아무리 달려도 고행의 끝에는 해탈이 없다. 왜 그럴까.’ 지난 6년의 세월을 돌아보면 싯다르타는 편치 않았다. 고행을 하는 내내, 그는 긴장되고 경직되고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그래야만 수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에는 답이 없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생애를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훑어봤다. 그러다가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만한 ‘순간’을 포착했다. 그건 출가하기 전,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싯다르타가 품고 있던 수행의 주제는 ‘생로병사’였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였다. 그걸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싯다르타는 공동묘지로 갔다. 그곳에서 화장을 하고 남은 시신들, 미처 화장하지 못한 채 버려진 시신들을 관찰했다. 그들이 어떻게 썩고,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지켜보았다.    
 
싯다르타에게는 그게 명상이자 수행이었다. 숨이 끊어진다는 것. 그게 인간에게는 과연 뭘까. 그렇게 끊어졌을 때 육신은 무엇이 되는 걸까. 숨이 빠져나간 육신은 또 어떻게 썩어갈까. 사람들은 다들 “내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를 위해 산다. ‘나’를 위해 먹고, ‘나’를 위해 생각하고, ‘나’를 위해 움직인다. 그럼 ‘나’는 도대체 뭘까. 사람들은 이렇게 답한다. “나의 몸과 나의 마음. 그게 바로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