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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내려와 동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방향 트는 곳 바라나시
여기서 몸 씻고, 유해 뿌려야 천국행
오늘도 죄 씻어내려는 믿음의 행렬
싯다르타는 북쪽 바이샬리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으로 가려면 다시 갠지스강을 건너야 했다. 나는 갠지스강의 강둑에 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어디쯤에서 갠지스강을 건넜을까. 상류였을까, 아니면 하류였을까. 그는 어떻게 강을 건넜을까. 나룻배라도 얻어 탔을까. 그래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왔을까.’
갠지스강만이 시바신 사는 천국으로 흘러
갠지스는 ‘성스러운 강’이다. 자이나교나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힌두교 신자에게만 그렇다. 13억 인도 인구의 80%가 힌두교를 믿는다. 힌두교에는 창조와 유지와 파괴의 신이 있다.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그게 일정 기간 유지되고, 때가 되면 파괴된다. 우리의 몸도 그렇고, 이 세상도 그렇다.
힌두교의 세 신은 그런 이치를 상징한다. 그들이 바로 브라마(창조)와 비슈누(유지), 그리고 시바(파괴)다. 인도의 서민과 하층민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은 다름 아닌 ‘파괴의 신, 시바’다. 반면 지배 계급은 주로 유지의 신 ‘비슈누’를 선호한다. 하층민은 혁명을, 지배층은 체제 유지를 원하기 때문일까.
브라만이 다시 기도를 했다. 하늘의 물을 내려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 하늘의 물을 한꺼번에 내렸다가는 다시 대홍수가 날 처지였다. 그래서 수미산에 사는 시바신이 나섰다. 하늘의 물이 시바의 머리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리게끔 했다. 그게 갠지스강이 됐다.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갠지스강의 연원’이다.
브라만이 다시 기도를 했다. 하늘의 물을 내려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물의 양이 너무 많았다. 하늘의 물을 한꺼번에 내렸다가는 다시 대홍수가 날 처지였다. 그래서 수미산에 사는 시바신이 나섰다. 하늘의 물이 시바의 머리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리게끔 했다. 그게 갠지스강이 됐다.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갠지스강의 연원’이다.
실제 갠지스강은 히말라야 설원에서 내려와 인도 동편의 벵골만을 통해 바다로 흘러간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의 방향이 굽어져 잠시 수미산이 있는 북쪽으로 흐르는 지점이 바라나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변의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에 와서 몸을 씻는다. 한국으로 따지면 경주쯤 되는 도시다. 몸을 씻는 이들은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는 신기했을 터이다. 다른 모든 강들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유독 갠지스강만 북쪽으로 흘렀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도인들은 세상의 강들 중에서 갠지스강만 시바신이 사는 천국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다. 죽은 후에 시신을 화장해 갠지스강에 뿌리는 이유도 그랬다. 죽은 이의 유해와 영혼이 강물을 따라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살아서 갠지스에 몸을 씻고, 죽어서 갠지스에 뿌려지는 건 힌두교도들의 간절한 소원이다. 힌두교 신자였던 마하트마 간디의 화장한 유해도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나는 궁금했다. 막상 갠지스강에 도착한 싯다르타는 어땠을까. 카필라 왕국의 왕자였을 때, 싯다르타는 이미 힌두교의 베다 철학에 정통한 상태였다. 베다 경전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싯다르타는 갠지스에 몸을 담그지 않았을까. 죄를 씻어준다는 갠지스강에서 그의 몸을 씻지 않았을까.
2000년 전 유대 지역에서도 그랬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온몸을 물에 잠기게 했다. 그런 의식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켰다. 당시 유대인들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런데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올 것이다”고 예언했다.
인도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초기불교 시절의 일이다. 브라만교(고대 힌두교)의 성직자인 브라만이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물론 강물이 그의 죄를 씻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불교 수행자인 한 비구니 스님이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목욕하는 브라만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갠지스강에서 몸을 씻고 있소?”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요.”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정말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오?”
“물론이오. 주위를 보시오. 다들 이 신성한 강에서 몸을 씻고 있지 않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강의 물고기들이 가장 먼저 해탈에 들겠소.”
나는 궁금했다. 그 말을 들은 브라만의 표정이 어땠을까.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도마복음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도마복음』 은 4복음서(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만큼 오래전에 기록됐다. 그러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할 때 ‘정경(正經)’에서 빠져버린 복음서다. 지금은 외경(外經)이나 위경(僞經)으로 취급된다.
제자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님,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 깊은 바다에 있습니까, 아니면 저 높은 하늘에 있습니까?”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말하면, 하늘을 나는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그곳에 닿으리라. 만약 ‘하느님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말하면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먼저 그곳에 닿으리라.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바깥에 있다. 너희가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이란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읽을 때마다 놀랍다. 어쩌면 이토록 흡사할까. 갠지스강에서 브라만과 비구니가 주고 받은 문답과 예수와 제자가 주고 받은 문답이 닮았다. 물음의 형식만 비슷한 게 아니다. 그 물음을 관통하는 답, 그 답에 담긴 ‘안목’이 서로 통한다.
세례 요한은 “지금은 물로 몸을 씻지만, 앞으로는 성령이 당신을 씻어내릴 것”이라고 했다. 물로는 몸을 씻지만, 성령은 마음을 씻는다. 그러니 세례 요한도 알고 있었다. 핵심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갠지스강의 비구니 스님도 “물로 목욕을 한다고 죄가 씻기지 않는다. 내 마음을 씻어내릴 때 비로소 죄가 씻긴다”며 브라만을 지적했다.
강에 띄운 촛불은 인간의 오래된 목마름
해가 저물었다. 어둠이 내렸다. 나는 나룻배를 탔다. 갠지스 강물 위에는 조그만 불빛들이 떠다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야트막한 초를 담은 작은 접시들이었다. 그 위에 촛불이 커져 있었다. 물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촛불들. 그들은 하나씩의 별이었다. 그 별무리가 갠지스의 물결을 타고 저 아래 하류로 흘러갔다. 인도의 힌두교인들은 지금도 믿는다. 그 별들이 시바신이 사는 하늘나라로 간다고 말이다.
‘영혼이 새벽처럼 깨어있는 자,
참을성이 강하고 고개 숙일 줄 아는 자,
이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의 뒤를 따르라.
저 별들의 뒤를 따르는 달처럼.’
바라나시(인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