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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붓다를 만나다 ⑥

인도의 불교 유적지에 있는 탑 위에 한 동자승이 서 있었다. 그는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생로병사 네 가지 고통 벗어나려
‘길 없는 길’ 찾아나선 왕자
부인 아소다라는 고모의 딸
곡절 끝 훗날 출가해 아라한 돼

인도 산치의 박물관 뜰에 있던 조각상.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허리에 찬 인도의 여인상이다.

아들을 안고서 우물을 찾은 인도의 여인. 라훌라를 안은 아소다라의 모습도 저랬지 않았을까.
그녀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아소다라는 아름답고, 연민의 정이 있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아소다라가 아들을 낳자마자 싯다르타는 출가를 했다.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가장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여인이라해도 고개가 끄덕여졌을까. 핏덩이 같은 자식을 낳자마자 남편이 집을 나가버렸으니 말이다. 더구나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돼버렸다. 아소다라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지 않았을까.
훗날 자식 라훌라마저 붓다를 따라 출가한다. 나중에는 카필라 왕국마저 이웃 나라의 침략에 멸망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아소다라는 머리를 깎고 붓다의 승가로 출가를 한다. 팔리어 경전에는 그녀가 결국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됐다고 기록돼 있다. 아소다라의 생애도 파란만장했다.
나는 궁금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부인과 갓 태어난 자식을 뒤로 한 채 싯다르타는 왜 출가를 했을까. 그는 무엇에 목이 말랐을까. 무엇이기에 그토록 절박했을까. 아소다라의 가슴에 남는 피멍과 라훌라가 성장하며 감당할 ‘거대한 원망’을 싯다르타는 내다보지 못했을까.

인도의 델리 박물관에서 본 조각상이다. 한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다. 수천 년이 흘러도 인간의 삶은 슬픔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아들 라훌라는 출가의 ‘장애물’
그러니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출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갓난 아들이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집을 떠났다. 수행자가 됐다. 왜 그랬을까. 왕위도, 처자식도, 아버지의 기대도 떨쳐버리고 그는 대체 어떠한 길을 가고자 한 걸까.

네팔 땅에 있는 카필라바스투 성의 성벽터. 아직도 흙과 수풀에 성벽의 상당 부분이 묻혀 있다.
싯다르타 왕자는 주로 성 안에서 생활했다. 바깥 출입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카필라 성의 동문 바깥으로 나갔다. 거기서 싯다르타는 한 노인을 목격했다. 하얗게 쉰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이빨은 왕창 빠져 있고 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워했다. 싯다르타가 시종에게 물었다.

붓다는 인간은 왜 늙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늙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저런 늙음을 겪게 되나? 나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거기에는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제야 싯다르타는 깨달았다. 팽팽한 피부, 풋풋한 젊음, 솟구치는 혈기가 얼만 안 가 무너지는 것임을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푸름은 영원한 푸름이 아니다. 봄이 영원한 봄이 아니고, 여름이 영원한 여름이 아니듯이 말이다. 청춘도 그렇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삶의 시듦’을 봤다.
또 하루는 성의 남문으로 나갔다. 거기서 병든 사람을 보았다. 시종은 말했다.
“누구나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또 충격을 받았다. 늙는 것도 서글픈데, 병에 걸려 육신의 고통까지 감당해야 한다. 인간의 숙명이란 이 얼마나 힘겨운가.
성의 서문으로 나갔을 때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시신을 들 것에 싣고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이른바 ‘죽음’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밟아야 하는 삶의 마침표다. 그게 죽음이다. 사라짐이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평생 살아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나의 없어짐’이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겁이 난다. 그런데도 피할 수가 없다.

델리 박물관에서 약 2000년 전에 살았던 인도 사람의 유해를 봤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 그 이름은 '죽음'이다.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에서 싯다르타는 ‘절망’과 만났다. 그에게 삶이란 그저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폭주기관차에 불과했으리라. 분명히 끝이 있고, 거기서 추락해야 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달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기관차 말이다.
싯다르타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런 게 삶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라면, 왜 굳이 피어나야 할까. 저물 수밖에 없는 태양이라면, 왜 떠올라야 할까. 무엇을 위해 꽃이 피고, 무엇을 위해 해가 뜨고, 무엇을 위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는 이런 물음을 수도 없이 던지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인도에는 길 위에서 살아가는 수행자들이 많다. 순례길에도 종종 마주친다.
“당신은 집을 떠나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려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합니다. 출가는 그걸 위함입니다.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직 이치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 싯다르타는 가슴이 뻥 뚫렸다. 아무런 출구도 없는 삶, 사방이 꽉 막힌 벽. 거기에 느닷없이 창(窓)이 생겼다. 그리고 바람이 들어왔다. 싯다르타의 심정도 그랬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게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수행자는 연어처럼 숙명의 강물을 거스르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삶의 유속(流速)에 맞서고 있었다. ‘이 모든 고통과 이 모든 허무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소리치며 말이다.
싯다르타에게는 분명한 과녁이 있었다. 그것은 생로병사라는 삶의 궤도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다. 출가의 뜻을 밝히자 아버지 숫도다나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항변했다.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삶과 불 붙은 초의 운명이 닮았다. 붓다는 그 초의 불을 끄고자 했다.
왕은 “그런 길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출가를 하겠습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 세상에 그런 길이 있을까. 그러니 싯다르타가 가고자 하는 길은 ‘길 없는 길’이었다. 그의 앞에는 아무런 발자국도 나있지 않았다. 어떠한 이정표도 없었다. 바닥 없는 바닥을 밟고, 방향 없는 방향을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싯다르타는 그 길을 택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이 거대한 삶의 허무를 향해 그는 도전장을 던졌다. 그가 출가하던 날은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지 겨우 7일째 되던 밤이었다.

인도의 평원에 떨어지는 해는 무척 아름답다. 아소다라도 저런 노을 아래서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DA 300
“당신의 삶에서는 무엇을 내려놓는 게 ‘위대한 포기’인가, 그를 통해 무엇을 찾는 게 ‘위대한 포기’인가.”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