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다가 살던 시절에는 옷을 어떻게 입었을까. 약 2300년 전에 만든 아소카 왕과 두 부인의 조각상. 우리는 산치 대탑에 있는 이 조각을 통해 붓다 시대의 복장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인도 룸비니에서 멀지 않은 피프라하와의 카필라바스투 성터. 붓다는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여읜 어머니
삶과 죽음은 그에게 평생 화두로
진흙이 있어 물음도 연꽃도 있는 법
우리가 서 있는 일상은 어떤 곳인가

카필라바스투 성터에서 인도 여인들이 청소를 하고 있다. 유적지를 청소하는 이들은 카스트제도에서 하층계급에 속한다.
멀리서 인도인 관리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가서 봤더니 땅바닥을 가리켰다. 그들은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조금씩 파헤쳤다. 그러자 숯이 된 볍씨들이 나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서 찍었다.

카필라 성터의 땅에서 출토된 숯이 된 볍씨를 인도인 관리인이 줍고 있다.
놀라웠다. ‘아니, 이건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앉아서 손으로 옆쪽의 흙을 싹싹 흩었다 그랬더니 까맣게 숯이 된 볍씨가 나왔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고 물었더니 관리인이 답했다. “부처님 당시에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당시에 쌀밥을 먹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신기했다. 나는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이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카필라 성터에서 나온 숯이 된 볍씨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찍었다. 얼마나 오래된 볍씨일까.
한국이라면 그곳이 ‘고고학 발굴 현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은 인도였다. 인도에는 1000년, 2000년, 3000년 된 유적이 곳곳에 널렸다. 유적에 대한 관리도 아직은 허술하다. 수천 년 전의 불상이 땅 속에 그대로 파묻혀 있는 지역도 있다. 머리만 땅 위에 내놓은 채 말이다. 그러니 카필라 성터에서 찾아낸 숯이 된 볍씨는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인도에서는 그랬다.
부친 이름 숫도다나 뜻은 ‘흰쌀밥왕’

붓다가 출가하기 전까지 살았던 카필라 성터. 어린 붓다는 저 벽돌 사이로 뛰어다녔을까.
어쨌든 왕의 이름과 숯이 된 볍씨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2600년 전 카필라 왕국에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3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이다. 그러니 인도인들은 일찌감치 벼농사를 지었으리라.

어찌 보면 공원 같고, 어찌 보면 유적지 같았다. 카필라 성터에는 울창한 나무들도 꽤 보였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붓다는 어릴 적부터 연못 속의 연꽃을 보며 자라지 않았을까. 카필라 성에도 연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그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의 부재’였으리라 본다. 자신을 낳은 지 1주일 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마야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여동생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왕비가 됐다. 싯다르타의 친이모였다. 고타미가 숫도다나 왕의 여인이 된 시점은 다소 애매하다. 마야 부인이 죽은 뒤에 혼례를 치렀을 수도 있고, 마야 부인과 자매들이 한꺼번에 숫도다나 왕의 여인이 됐을 수도 있다. 요즘의 잣대로는 이해가 안 가지만, 2600년 전 고대 인도에서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고타미에게는 자식이 있었다. 고타미는 친자식을 유모에게 맡긴 채, 죽은 언니의 아들인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만큼 사랑을 쏟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언니 대신 조카를 친자식처럼 받아들인 것이다. 고타미는 훗날 불교사에서 처음으로 출가한 비구니가 된다.
그럼에도 어린 싯다르타는 가슴 한 편에 구멍이 뚫렸으리라. 자신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마야 부인의 죽음은 싯다르타에게 진흙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발을 빼려고 발버둥쳐도 좀체 빠져나올 수 없는 진흙 말이다.

싯다르타 왕자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했다. 그런 근원적 상실감 속에서 삶에 대한 물음을 던졌을 터이다. 카필라 성터에서 한 순례객이 향을 피우고 있다.

붓다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불에 타서 재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저 향들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했다.
비단 싯다르타뿐 만은 아니었다. 인류사에서 성인으로 꼽히는 큰 인물들이 종종 그랬다. 가령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 목수였던 요셉은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으로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은 여자는 돌로 때려 죽였다. 그래야 가문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믿었다.

렘브란트 작 '이집트로의 피신'.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고향 나자렛을 떠났다.
혹자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에게 무슨 사춘기가 있느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예수에게는 오로지 신성(神性)만 있었다고.” 그렇게 받아칠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는 ‘100% 신(神)’이자, 동시에 ‘100% 사람(人)’이었다. 그러니 사춘기에 우리가 겪는 온갖 신체적ㆍ정서적 변화를 예수 역시 겪었을 터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가 제자들을,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공자 무하마드
혼란한 춘추전국 시대에 대가 끊길까봐 노심초사하던 공흘은 70세에 젊은 여자를 맞아들였다. 당시 16세였던 공자의 모친 안징재다. 나이 차이가 무려 54세였다. 그리고 공자를 낳았다.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4살 때는 홀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공자 역시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다. 그런 근원적 상실감이 공자에게는 진흙이 아니었을까.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하마드. 그는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8살 때는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결국 무하마드는 숙부의 집으로 가야 했다. 상인이었던 숙부를 따라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며 자랐다. 그러니 무하마드에게 ‘인간의 죽음’은 어릴 적부터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었을까. 그런 진흙이 아니었을까.
불교와 그리스도교, 유교와 이슬람교. 이들 4대 종교 창시자 모두의 성장기에 진흙이 있었다. 나는 연못가에서 눈을 감았다. 붓다와 예수, 공자와 무하마드에게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거대한 상실감, 단지 그뿐이었을까.
나는 그들의 슬픔, 그들의 아픔, 그들의 허무함에서 물음의 싹이 올라왔으리라 본다. ‘죽음이란 뭔가’ ‘태어남이란 뭔가’ ‘삶이란 또 뭔가’ ‘행복이란 과연 뭔가’. 인간의 삶과 존재를 관통하는 직선적 물음들이 거기서 싹을 틔웠을 터이다. 그들은 자연스레 그 물음들을 품지 않았을까. 마치 사자가 소리를 품듯이, 바람이 그물을 품듯이, 연꽃이 진흙을 품듯이 말이다.

연꽃은 진흙에서 올라온다. 깨달음도 그렇다. 일상의 번뇌가 없다면,그런 진흙이 없다면 깨달음의 싹도 틀 수가 없다. 그러니 깨달음의 뿌리는 번뇌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진흙에서 연꽃의 대가 올라온다는 붓다의 말. 거기에 가슴을 끄덕인다. 우리는 늘 투덜댄다. 나의 삶은 지뢰밭이라고, 수시로 문제가 터진다고 속상해 한다. 붓다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그런 진흙이 있기에 우리가 물음을 던지고, 그 물음을 통해서 연꽃이 핀다고 했다. 그러니 일상의 지뢰가 없다면 일상의 물음도 없고, 일상의 물음이 없다면 일상의 연꽃도 없다.

카필라 성터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구역은 푸른 들판처럼 보인다. 나무도 울창하다.
DA 300
‘우리가 서 있는 일상은 지뢰의 밭일까, 아니면 연꽃의 밭일까. 어쩌면 우리는 연꽃을 지뢰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윽한 연꽃 향을 화약 냄새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
붓다는 그게 둘이 아님을 깨치라고 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