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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만리에서 우리말로 창작 활동
문예당국·단체 구경만 했을 뿐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 건네지 않아
다음달 경주서 세계한글작가대회
한글 창제한 세종대왕 마음으로
해외 동포 문학세계 돌아 볼 때
해마다 여름에 열리는 미주한국문인협회 문학캠프에 강사로 다녀오면서의 일이다. 200만 명의 한인이 살고 있는 미국 이민사회를 배경으로 수백 명에 달하는 문인들이 우리말로 창작활동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의 문예당국이나 문학단체들은 우리 문학의 소중한 텃밭과도 같은 이 글쓰기의 터전을 구경만 했을 뿐, 따뜻하고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 비단 미주지역 뿐이겠는가. 일본 조선인 문학, 중국 조선족 문학,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등 해외에서 한글로 문학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 모두에 공히 적용되는 말이다. 이를 두고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 한민족 문화권의 문학 등 학술적인 명호(名號)를 부여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지난 6월 하순에 다녀온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문학모임도 상황이 유사했다. 모국으로부터의 관심과 지원은 희박하지만, 그 한 분 한 분의 문인들은 노경(老境)에 접어드는 자신의 생애를 열정적인 문학적 탐색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필자는 그때마다 턱을 괴고 앉아 곰곰 생각해 보았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이민생활의 분주한 일상사를 제쳐 두고 문학의 이름을 향해 손을 들게 하는가. 그러할 때의 문학은 참으로 효력 있는 역할, 곧 팍팍한 삶의 위무(慰撫)이자 거기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자긍(自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일찍이 공자가 『논어』에서 시 300 수의 의의를 줄여서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思無邪)”이라 정의했는데, 이 경우의 문학이 ‘선한 소망’임에는 틀림이 없겠다.
적지 않은 해외의 문인들이 필자에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정규 학습과정을 통해 문학을 공부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 아니냐고. 필자의 대답은 이랬다. 늦지 않았다고, 작가 이병주도 박완서도 모두 불혹의 나이를 넘긴 후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그러면 반드시 다음의 반문이 있다. 그분들은 한 세기를 대표할 만큼 특별한 문재(文才)를 가진 터이니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즈음이면 필자가 정색을 할 차례다. 만약 일생을 두고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감동시킬 글 한 편을 쓸 수 없겠는가. 잠시 생각해 본 분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음의 권유는 성의를 다한 것이어야 한다. 해 보시라, 가까운 그 한 사람이 감동하면 누구나 감동하는 글이 될 수 있고 그와 같은 글 한 편을 쓸 수 있다면 마침내 같은 수준의 글 여러 편을 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설득의 논리가 때로는 민망하고 구차스럽기도 하다. 말로만 하는 권면이 아니라 제도적이고 지속적인 해외 한글문학 지원 방안이 있으면 얼마나 흔연하겠는가. 십수년 전 해외 몇 문예지에 대한 소액의 지원이 진행되다가 그마저 단절된 지 오래다. 새 정부는 700만 해외 동포사회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 삶의 근본을 형성하는 정신세계, 문학의 세계에 보다 집중적인 시각과 지원을 공여해야 한다.
다만 역대 정부들이 그러했듯이, 눈앞의 화급지사가 즐비한 마당에 여기까지 눈길이 닿겠는가가 걱정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에서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주관으로, 올해 3회째가 되는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대회는 9월 12일부터 나흘간 경주에서 막을 올린다. 세계 각국에서 한글로 글을 쓰는 문인들이 초청되어 한국 문인들과 함께 학술발표회와 문학적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이처럼 값있는 계기들이 여러 유형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엉뚱한 데 돈 쓰지 말고 이런 곳에 힘을 실어 주어야 올바른 문화행정이 될 것이다.
올해 가을의 한글날을 바라보며, 15세기 중엽에 당대 최고의 음운학자로서의 한글 창제를 이끌었던 세종대왕의 심경을 헤아려 본다. 힘없는 백성들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겼던 그 연민의 마음으로 해외 한인문학을 바라볼 때다. 제대로 된 문화공약을 내세울 시간도 없이 출범한 새 정부가 특히 유념해야 할 대목이 여기가 아닌가 한다.
DA 300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