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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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을 생각하며

다산의 신세계 구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6. 13:33

다산의 신세계 구상

-이상적 사회를 향한 개인의 인생관-

다산 정약용의 발자취

◆ 출생-성장 수학기 ◆

․ 1세; 1762년(영조 38)

- 음력 6월 16일 오전 10시(巳時)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馬峴, 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부친 나주 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모친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출생(넷째 아들).

어려서 총명했고, 크면서 학문을 좋아했다.

-「자찬묘지명」중에서

․ 15세; 1776년(영조 52)

- 2월 홍화보(洪和輔)의 딸 풍산 홍씨(豊山洪氏)와 결혼, 부친을 따라 한양에 거주.

․ 16세; 1777년(정조 1)

- 성호 李瀷의 遺稿를 처음으로 보고, 학문의 준칙으로 삼기로 결심.

(젊은 시절 다산은 성호의 옛집을 찾아가고, 묘소를 참배. ‘누가 성호를 일으키겠는가?’ 질문, 자신의 임무로 여김)

- 채제공, 이가환, 권철신 등 성호학파 인사들과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제 시작.

․ 20세; 1781년(정조 5)

- 한양에 있으면서 과거에 응시.

◆ 2기; 정조의 은우를 받으면서 현실정치를 혁신해보려 꿈을 펼치던 관료시기 ◆

․ 22세; 1783년(정조 7)

- 2월 世子 책봉 경축하는 增廣監試의 경의초시에 합격하고 太學生이 됨,

- 4월 會試에 생원으로 합격. 선정전에서 정조와 최초로 만남.

․ 23세; 1784년(정조 8)

- 맏형 약현의 처남 이벽(李壁)에게 천주교에 대해서 처음 듣고 서적을 보았다.

․ 24세; 1785년(정조 9)

- 이벽, 이승훈 등과 천주교 집회를 가지다 발각됨.

․ 25세; 1786년(정조 10)

- 2월 別試 낙방, 苕川으로 돌아옴.

․ 27세; 1788년(정조 12)

- 3월; 泮試(文廟)에서 수석 합격.

․ 28세; 1789년(정조 13)

- 1월; 대과(大科) 급제.

- 3월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어 정조에게 『대학』을 강론.

- 겨울에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하는 공사가 있어, 그 규제를 만들어 바쳤다.

․ 29세; 1790년(정조 14)

- 2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대간이 법식을 어겼다며 탄핵하자 여러 번 패초를 거부하다가 3월 10일 서산군 해미현에 유배, 11일 만에 풀렸다. 돌아오는 길에 온궁에서 사도세자 유적을 복원할 것을 지시해 노론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 30세; 1791년(정조 15)

- 이해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다산의 외사촌 형)․권상연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천주교 배격운동이 일어나자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배교했다.

․ 31세; 1792년(정조 16)

- 겨울에 왕명으로 수원 화성의 성 쌓는 제도를 정리하여 바쳤다. 또 임금이 내린 『圖書集成』과 『奇器圖說』을 참고하여 인중(引重)과 기중(起重)의 기계장치를 마련하여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바쳤다. 성이 준공되자 임금이 “다행이 기중가를 사용하는 바람에 4만 냥의 경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하셨다.

․ 33세; 1794년(정조 18),

- 정월 초하루 딸 효순(孝順) 죽음.

- 10월에 홍문관(弘文館) 수찬되었다가

- 경기도 암행어사 명을 받아 연천, 삭녕 등의 고을을 암행

․ 35세; 1796년(정조 20)

- 수원성 준공

․ 36세; 1797년(정조 21)

- 6월에 좌부승지를 제수받았으나 자신의 천주교 관계 전말을 고백하는 사직상소문을 올리고 물러났다.

- 윤6월에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 겨울에 수십 종의 의서에서 천연두 치료에 관한 내용을 편집․정리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12권을 찬술. 여러 자식을 잇달아 천연두로 잃은 슬픔을 이렇게 넘어섰다.

․ 39세; 1800년(정조 24)

- 박제가와 함께 종두설을 연구 실험. 『종두설(種痘說)』저술

- 6월 28일 정조가 승하.

고향으로 돌아와 저작에 주력하면서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지음.

◆ 3기;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에서 귀양살이 하던 시기 ◆

․ 40세; 1801년(순조 1)

- 2월 9일 셋째형 약종(若鍾; 세례명 아오구스티노) 사형,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유배, 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마산리).-이때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순교

- 10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으로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이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이배.

․ 41세; 1802년(순조 2)

- 유배 초기부터 8년간 떡장수 노파가 제공하는 비좁은 뒷방을 얻어 생활.

四宜齋(-상례연구의 산실)라는 당호를 걸고 스스로를 검속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방례초본(경세유표) 저술

․ 42세; 1803년(순조 3)

- 김대비의 해배명령이 있었으나 서용보의 반대로 풀려나지 못함.

․ 43세; 1804년(순조 4)

- 봄에 처음 배움을 시작하는 학동들을 위해 2천자문인 『아악편훈의(兒學編訓義)』 지음. 유형자(有形字) 1천 자와 무형자(無形字) 1천 자로 구분하여 연쇄적 방식으로 체계적인 학습이 가능하도록 엮은 교과서이다.

天地父母·君臣夫婦·兄弟男女·姊妹娣嫂……祖宗子孫姪姑甥舅

- 겨울에 장남이 찾아왔으며 보은사(寶恩寺)에서 주역예기(周易禮記)를 강론함.

(보은산방-주역연구의 산실)

․ 44세; 1805년(순조 5)

- 4월 28일 만덕산 백련사 유람중 아암 惠藏선사와 교유

- 김이재(안동김씨 시파) 송별

詩 “대나무 몇그루에 어느날 밤 달빛 비치면 고향 향해 고개돌려 눈물만 주룩주룩...”

․ 45세; 1806년(순조 6)- 제자 이학래의 집에 머물며 교육과 저술활동에 주력

․ 47세; 1808년(순조 8)

- 봄에 강진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의 산 밑에 있는 윤단(尹猯)의 산정(山亭)인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옮겨 저술을 시작, 제자들과 협력하여 500권의 저서를 집필

․ 49세; 1810년(순조 10)

- 장남 학연의 상소로 해배명령이 내렸으나 이기경․홍명주의 방해로 인해 풀려나지 못함.

․ 56세; 1817년(순조 17),

- 『경세유표(經世遺表)』 지음.

邦禮草本(周禮의 현실적 재현)→經世遺表(신하가 죽을 때 임금에게 올리는 글)

․ 57세; 1818년(순조 18)

- 봄에 『목민심서(牧民心書)』완성.

- 8월 이태순의 상소로 18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남.

- 9월 강진을 떠나 9월 14일 고향 마현 본가로 돌아옴.

◆ 고향 마현으로 돌아와 1836년 75세까지 은거하던 시기◆

․ 58세; 1819년(순조 19) -봄에 『明淸錄→흠흠신서(欽欽新書)』완성.

․ 61세; 1822년(순조 22)

- 회갑을 맞아 스스로 ‘자찬묘지명’을 짓다.

․ 68세; 1827년(순조 29)

- 해거위 홍현주 마현으로 정약용 방문

홍현주(1793-1865; 정조 부마,숙선옹주의 남편), 홍길주(1786-1841),

홍석주(1774-1842; 노론 좌의정) 등과 학문 논쟁

특히 홍길주는 다산이 사망하자 “열수가 갔구나. 드디어 수만권 書庫가 무너졌구나!”

․ 75세; 1836년(헌종 2)

- 2월 22일 진시(辰時)에 마현 자택 정침(正寢)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남, 이날은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이다.

- 음 4월 1일 여유당 뒷동산,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안장됨.

․ 1838년(헌종 4) - 부인 풍산 홍씨 사망

․ 1882년(고종 19) - 『與猶堂全書』가 전부 필사되어 내각에 수장.

․ 1910년(순종 4) 7월 18일 정이품 正憲大夫 奎章閣 提學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도(文度-博學多識하니 文이요, 心能制意하니 度)’라 함.

사망한지 74년 만에 복권

‘고 승지 정약용은 文章과 經濟로 한 세상에 탁월했던 사람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 망함.

다산 정약용의 學文

다산 당대 동아시아의 주요 학문을 섭렵하였다

朱子學 ; 12세기 주자에 의해 역설된 새로운 유교,

조선의 정치, 사회적 이념으로 군림하였던 학문

西學 ; 서양의 새로운 과학기술과 천주교 신앙

考證學 ; 명말청초의 학풍

경전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실증적 비판을 해나갔다.

일본 古學 ; 나름의 관심과 방법으로

중국 고대 유학의 실제를 탐구해 나간 일본의 유학

주자학은 고증을 무시하여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는다.

고증학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폐단이 있다.

일본 고학의 학문적 성과는 참고할만하다.

서학의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면 조선은 보다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유학의 시작은 孔子이니, 다시 공자에게 돌아가리라”

동아시아의 학문을 소화하고 비평하여 집대성.

문명전환기의 조선을 위한 개혁의 청사진을 구상.

다산 정약용의 敎育

유배지에서 다산이 구상했던 것은 책을 쓰는 일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四宜齋 -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도

(맑은 생각/엄숙한 용모/과묵한 말씨/신중한 행동)

미래를 준비하는 일, 바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황상; 스승님, 저는 머리가 나빠서 외워지지도 않고

이해도, 작문도 안되는 데 배움이 늘 수 있을까요.

다산; 쉽게 기억하는 사람은 공부를 소홀히 하고, 글짓기에 재주 있는 사람의 글은 가볍고, 이해가 빠르면 깊이가 없단다. 너에게는 그런 문제점이 없으니 다행이구나.

부지런히 노력하면 배움이 늘 것이다.

 

*한방울의 물은 바위를 뚫을 수 없지만

같은 자리에 계속 떨어진다면 마침내 구멍이 뚫리게 된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공부하는 방법을 읽힐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자 다산

*다산은 제자들에게 독자적인 집단연구시스템을 제시.

*그리고 고향의 자녀들에게는 편지를 보내 삶과 배움에 대한 지침을 전해주었다.

반드시 經學을 공부하여 바탕을 다진 후에, 역사를 섭렵하여 정치의 득실을 治亂의 근원을 살펴라. 옛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을 즐겨 읽도록 해야 한다. 마음에 항상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기를 뜻을 가진 뒤에라야 진정 독서를 한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런 후하랴, 안개 낀 아침 달뜨는 저녁을 보고 문득 감흥이 일고 운율이 나와 저절로 詩가 되는 것이다.

-강진 귀양지에서 두 아들에게 부치다-

 

*두 아들이 폐족이라는 이유로

또 가난하다는 이유로 공부를 외면하지 않도록

다산은 父情을 담은 가르침을 편지에 실어 보냈다.

*학문과 교육을 병행했던 다산

백년 후를 내다보고 미래를 기약했던 다산의 敎育

다산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개혁을 논한 사람들

-정조(1752-1800) ; 다산의 학문을 누구보다 아끼고 후원한 개혁 군주

-이익(1681-1763) ; 새로운 학풍을 세운 재야 실학자. 성호학파의 종주, 16세 재기발랄한 시절, 성호의 학문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충격이자 큰 자극 다산으로 하여금 ‘혼연히 학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성호의 학문을 준칙으로 삼았다.

-채제공(1720-1799) ;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인물로 근기 남인(청남)의 영수.

특히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신해통공을 주도.

-이가환(1742-1801) ; 정조가 ‘貞學士’로 부를 만큼 대학자였다.

남인(청남)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반대파의 공격으로 천주교 탄압시 옥사.

-권철신(1736-1801) ; ‘仁厚하기는 기린같고 지혜롭기는 새벽같은 분’이라 회고했다.

이익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西學派의 대가.

다산 정약용의 교훈

◆ 마음의 평화가 깃들지 않으면 인생의 성공은 없다 ◆

* 성공의 단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일

 

* 이 단계의 발견이 가장 어렵다.

* 내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지혜가 내가 해야할 일을 지시해 준다: Murphy

반복을 통하여(예감과 느낌) 길을 찾는다.

특정한 일 중에서도 한 분야를 선택하여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일

 

* 폭넓은 식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일이 더 중요하다.

* 이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갖는다.

자신의 성공이 타인의 삶에 유익하여야 한다.

 

* 마음의 평화는 믿음. 소망. 사랑을 버리지 않을 때 가능한 상태

* 자신만의 성공을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은 존경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