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 여행지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떠올려지는 선명한 이미지도 없을뿐더러, 지도에서 위치를 짚기도 쉽지 않습니다. 구분하자면 함안은 들뜬 휴가철 목적지라기보다는 ‘맑고 차분한 여행지’입니다. 화려한 비경이나 수다스러운 과시 따위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저 오래돼서 자연스럽게 낡아진 것들의 시간과 단단하고 곧은 마음을 가졌던 옛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함께 흘러간 자취가 있을 따름입니다. 함안에서는 딱 한 곳의 여행지만 꺼내 들 수 없습니다. 함안의 길 위에서는 두서없이 주워담은 것들로 금세 주머니가 불룩해질 테니 말입니다. 여름날 함안의 길 위에서 만난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낙동강과 남강의 물길을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서 굽어보고 있는 정자. 700년의 캄캄한 어둠의 시간을 건너와 피워낸 연꽃. 뜨거운 여름 볕을 당당하게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해바라기의 도열. 오래된 연못 곁에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수양버들. 절경의 산수를 마당으로 옮겨가서 지어낸 옛집. 권력의 탐욕을 목격한 뒤 세상을 버리고 칩거해버린 강건한 품성의 선비들,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 한복판의 솟은 가야 무덤의 시간들…. 함안 땅에서 만나는 것들은 풍경부터 이야기들까지 어쩐지 모두 다 차분했습니다. 함안은 피서 여행지는 아닙니다. 바다도 없고, 더위를 피할 깊고 어둑한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낙동강과 남강의 물길을 끼고 있긴 하지만, 강의 하류 쪽이라 몸을 담글 만한 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름에 함안으로의 여행을 권하는 건, 그곳이라면 고요하고 또 여유 있게 여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해질 무렵에 걸음의 속도를 한껏 늦추고 긴 강둑을 따라 산보를 하거나, 쥘 부채 하나 들고 남강변의 초록숲 한가운데 세워둔 정자 그늘 아래 앉아서 한낮에 순한 매미 울음소리를 듣거나, 저물녘 강 너머로 장엄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이 여름을 너끈히 보낼 수 있을 듯했습니다. 휴가를 즐기는 방법이 어디 일상보다 더 번잡스러운 피서행렬에 끼어들거나, 볼거리나 먹거리만 탐하는 여행을 감행하는 것뿐이겠습니까.
# 남강의 정자에 올라 천리장제를 내려다보다 낙동강과 남강이 감아 도는 함안 땅에는 강을 굽어보는 소위 ‘명당자리’에 세워진 정자가 여럿이다. 지어진 내력과 깃든 이야기들이 깊거나 풍성하지 않지만, 정자가 차지하고 앉은 자연 속의 자리만큼은 감탄스럽다. 지금 새로 정자를 들인다고 한들 그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함안 대산면을 굽이치는 남강의 물길이 함안천과 만나는 합수머리의 단애에는 정자 악양루가 있다. ‘악양’이란 이름은 같은 지명을 쓰는 중국의 이름난 명승지에서 따온 것. 중국 악양루는 산을 뒤로 두고 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세워져 예로부터 두보를 비롯한 시인과 문장가들이 앞다퉈 찾아들어 감탄사를 쏟아냈던 곳이다. 함안의 악양루가 ‘악양’을 정자의 이름으로 가져다 쓴 것은 풍류와 경치가 마치 중국의 악양루에 비길만 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조선 말엽 철종 때 지어진 것이니 악양루의 나이는 고작 160살이 조금 못된다. 그러나 그 자태가 비범하다. 정자는 밖에서 안을 볼 때와 안에서 밖을 볼 때의 풍경이 모두 다 빼어나다. 짙은 숲의 벼랑에 매달린 악양루의 모습도 근사하지만, 악양루에 들어서면 처마 아래로 펼쳐지는 남강의 물길이며 끝간데 없이 이어진 제방의 풍경도 훌륭하다는 얘기다. 남강과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는 강 건너편 저습지에는 누대에 걸쳐 긴 둑이 지어졌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338㎞에 달한다. 얼추 서울에서 함안까지의 거리만큼이다. ‘중국에는 만리장성이 있고, 함안에는 ‘천리장제(千里長堤)’가 있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하긴 함안의 제방 높이가 낮은 곳이 16m이고 높은 곳은 19m에 달하니 만리장성의 평균 높이인 9m보다 훨씬 더 높다. 악양루의 직벽 아래에는 남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에서 “낙동강 강 바람에 치마폭을 적시며…”로 시작하는 노래 ‘처녀뱃사공’의 가사가 만들어졌다.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 윤부길 씨(윤항기·복희 남매의 부친)가 함안의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 여기 나루터 주막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그때 군에 입대한 오빠를 기다리며 배를 젓던 뱃사공 처녀를 만났다. 그날 쓴 노랫말을 품고 있던 윤 씨가 1959년 작곡가 한복남 씨에 의뢰해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곳 나루터가 ‘처녀뱃사공’의 무대라는 사실은, 그러고 나서 40여 년 뒤에 밝혀졌다.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는 지난 2000년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제막식에 아들 윤항기 씨가 참석했다. 여기서 주민들로부터 전해 들은 처녀뱃사공의 뒷얘기 한 토막. 당시 처녀의 나이는 19살이었고 노래에 등장하는 ‘군인간 오라버니’는 23살이었는데, 뱃사공 처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빠는 한 장의 전사통지서로 돌아오고 말았단다.
# 강변의 정자에서 마음의 칼을 피하다 운치로 보자면 함안에서 악양루보다 한 수 위로 쳐줄 수 있는 정자가 바로 무진정이다. 함안면 한복판에는 왕버드나무와 느티나무 거목이 늘어선 아담한 연못이 있다. 연못은 저마다 채도가 다른 초록으로 가득한 비밀의 정원 같은 모습이다.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날씨와 빛에 따라 연못의 느낌이 전혀 다른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보자면 촉촉하게 비 내리는 날의 풍경이 가장 운치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조삼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다는 무진정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너머 바위 위에 숨듯이 들어서 있다. 담 너머 연못 전체를 정원으로 삼다시피 한 정자는 수생식물들로 가득한 수면 초록빛과 치렁치렁한 왕버드나무와 썩 잘 어우러진다. 정자를 모두 누마루로 설계해 창을 접어 사방으로 활개 치듯 열 수 있도록 한 정자는 소박한 듯하면서도 멋이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정자의 자태도 자태지만, 정자를 지은 함안 조씨 가문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함안 조씨는 조선시대에만 모두 1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대쪽같은 성품도 대를 이었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조열. 그는 정종이 손수 편지를 보내는 정성을 보였으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의 손자가 생육신 중의 한 명인 조려다. 조려는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통곡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백이산에 숨어 살았다. 조려의 손자가 바로 무진정의 임자인 조삼이다. 조려와 절친한 사이였던 고향 친구 김수로는 더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이 있자 조려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함안 땅으로 돌아왔는데, 단종 승하소식을 듣곤 그때까지 쓴 글을 모조리 불태운 뒤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함안 출신 한 명 더. 고려말 성균관 진사였던 이오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함안 산인면에 거처를 정해 ‘고려동’이라 이름 짓고는 평생 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무진정 연못에서는 해마다 4월 초파일 무렵에 ‘낙화놀이’가 열린다. 연못에 철사로 바둑판 모양의 등줄을 걸어놓고 숯을 빻아 한지로 만 것을 촘촘하게 매달아 놓은 뒤에 불을 붙여 불꽃을 즐기는 놀이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화려한 꽃불이 장관을 이룬다. 올해 낙화놀이는 세월호 사고로 연기돼 오는 9월쯤 열릴 예정이라니 겨눴다가 찾아가 보길 권한다. 낙화놀이의 역사는 조선중엽부터 시작하는데, 가을에 낙화놀이를 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함안에는 악양루와 무진정 말고도 빼어난 자리에 들어선 정자가 더 있다. 낙동강의 물굽이를 바라보는 자리에 들어선 대산면의 반구정과 합강정이다. 반구정은 낙동강의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에 들어선 정자인데 본래 칠서면 용성리에 있던 것을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여러번 고쳐 지어 정자는 마치 여느 살림집처럼 볼품이 없어졌지만, 앉은 자리만큼은 훌륭하다. 남명 조식의 제자 이길이 반구정을 들렀다가 남긴 시 한구절. “명리의 마당에서 말(言)의 함정에 빠지느니 / 골짜기에 숲속에서 마음의 칼 피하리라 / 백구에게 짐짓 세상사를 잊은 듯이 / 화단을 바라보며 달을 보고 누웠네.” 함안에서 정자를 따라간다면 ‘골짜기 숲속’을 ‘강변의 정자’로 바꿔 읽는대도 뜻은 능히 통한다. # 700년 전의 어둠 속에서 온 연꽃을 보다 이즈음 함안에서는 연꽃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아라(阿羅)홍련. 경남 함안의 함안박물관에서 한창 피어나고 있는 붉은 연꽃(홍련)의 이름이다. 매화나무 고목 중에는 제각기 이름을 가진 것들이 흔하지만, 연꽃에 이름을 붙여진 건 함안의 아라홍련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왜 이 연꽃에 이름이 붙여졌고, ‘아라(阿羅)’란 이름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아라홍련은 다른 연꽃과는 무엇이 다를까. 그 답이 이렇다. 함안의 성산산성. 삼국시대쯤에 세워진 함안의 산성이다. 몇 차례 발굴이 이뤄지면서 성 안의 연못 자리에서 연 씨앗이 발견됐다. 2009년 4월 함안박물관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부터 보연 씨앗 10개를 넘겨받는다. 싹을 틔워 키워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박물관은 우선 이 중에서 두 알의 씨앗을 골라 국립지질자원연구원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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