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나이
황경순( 1960 ~ )
나이테는
나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모롱이 웅크린
저수지에도 새겨진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나이를 알 수는 없었다
이따금
누군가 그의 가슴팍을
퐁당,하고 건드리면
그제야
살아온 날들을 풀어놓고
징처럼 울었다
모난 돌멩이를 던졌다고
거친 파문으로 응답하지않는 그
산 그림자, 쏟아지는 빗방울
망울망울 삭혀내었을 그에게선
겹겹의 물비린내가 뿜어져 나왔다
쉬임없는 바람에 물주름 찰랑거려도
늘 푸르게 일렁이는
그의 품속
오늘도 크고 작은 물길
묵묵히 받아들이며
헤아릴 수 없는 나이테
새겼다 지워내는 속울음
하늘이 들어와도 넘치지 않을
천 년의그 가슴
자연의 응시와 작은 깨달음
황경순 시인의 「물의 나이」를 읽는다. 시집 『물의 나이』 (시선 시인선. 078,2011.11)에 수록된 이 시는 서두르지 않고 시적 대상(오브제)을 바라보고, 섣불리 삶의 지혜를 예단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낮은 전언이 충만해 있어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절로 풍성해진다. 늙음은 어쩔 수 없는 순리이지만 늙어가면서 증오와 원망이 커진다면 그 인생은 볼품 없고 가여운 것이리라.
아마 「물의 나이」의 배경인 저수지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노자나 장자 일지 모르겠다. 위학일익 위도일손 爲學日益 爲道日損 ( 배움은 덧붙여지는 것, 도를 깨침은 덜어내는것)의 ‘그것’이 삶이든, 사랑이든 ‘텅 빔:태허 太虛’는 저 물로 가득 찬 저수지의 묵언에 있다.
가던 길을 잃어 평상에 걸터앉은 이빨 빠진 노인에게 읍내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천진하게 웃던 그가 노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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