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둥산
김도연
그녀는 불쑥 나타났다.
“약속을 지켜야지요?”
“……무슨 약속?”
“오 년 뒤에 애인이 없으면 나랑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우리가 헤어질 때.”
“대체 무슨 소리야?”
“나중에 발뺌할 거 같아서 녹음해 뒀어요. 들려 드릴게요.”
그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금 졸리고 취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흐느끼다가 사이사이 기침 같은 웃음을 토해 놓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자르며 진짜냐고 거듭 물어 왔다. 오 년 전, 장소는 아마도 그녀의 침대 위나 그 근처인 것 같았다. 계속해서 다짐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이제 그만 자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의 목소리로 보아서. 그러나 그의 기억은 아물아물했다. 사실인지 조작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술을 많이 마신 날 했던 말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게 그의 오래된 습성이었다. 더구나 오 년 전의 일이었다. 녹음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비틀비틀 흘러나온다고는 해도. 그는 그녀의 눈을 슬쩍 훔쳐보았다.
“기억 안 나요?”
“……안 나긴.”
그가 손을 펼치자 그 안에 갇혀 있던 억새꽃이 바람에 훌훌 날아갔다.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아 집 근처 민둥산을 산책하듯 오르던 중이었다. 두통은 떠날 듯 떠날 듯 떠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술을 섞어 마신 탓이었다.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 년 전 침대 옆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니! 그는 건들거리는 억새 숲을 배경으로 나무 등걸을 이용해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 앞에서 서성거렸다. 생각 같아선 손에 들고 있는 녹음기를 홀랑 빼앗아 무성한 억새 숲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억새 숲 사이로 뚫린 길은 좁아서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그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억새 사이로 몸의 한쪽을 디밀어야만 했다.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은 웃음을 지우고 그의 심각한 표정을 훑으며 지나갔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뭉게구름은 풍성했다. 그녀는 오 년 동안 기다려 온 말을 모두 전했으니 오직 그의 대응만을 기다리겠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녹음기는 가방 속으로 들어가더니 지퍼 소리와 함께 모습을 숨겼다.
“여긴 복잡하니 일단 한적한 곳으로 자릴 옮기자.”
“전망 좋은데 왜 옮겨요? 저 아래 보이는 게 기차역이죠? 예쁘다!”
“난 매일 보는 역이야!”
“왜 화를 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집에 찾아가 물어보았어요.”
“우리 집?”
그는 앞장서서 억새가 우거진 길을 걸었다. 두통은 묵직한 쇠구슬로 변해 머릿속에서 굴러다녔다. 그는 가급적 흔들림 없이 걸으려 했으나 무리지어 몰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자주 길 밖 비탈진 곳으로 내몰렸다. 소화되지 못한 간밤의 술이 다시 붉은 꽃을 얼굴에 피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매우 행복한 표정으로 뒤따라왔다. 오 년 전에 헤어진 여자가 오 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 말을 녹음까지 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떼어 놓으려고 얼떨결에 뱉은 말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까맣게 잊어버렸던 말을 들고서 찾아왔다. 약속을 지키라고. 아니 그럼 그동안 연애도 하지 않고 오직 이 날만 기다렸단 말인가. 그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산비탈의 울퉁불퉁한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억새보다 다른 풀들이 많고 경치도 그다지 좋지 않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그녀도 맞은편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는 땀을 닦으며 심호흡을 했다. 산 아래 철길로 화물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 애인 있어.”
“피! 없는 거 알아요.”
“있다니까!”
“그냥 짝사랑하는 거잖아요.”
“……뒷조사도 했어?”
“조사하지 않아도 그 정돈 알 수 있어요.”
그는 주위를 살핀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을바람에 말라 가는 억새가 물결치는 산은 작은 불똥이라도 날아가 불이 붙으면 삽시간에 타버릴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단숨에 담배 한 대의 연기를 들이켜고 바닥에 비벼 꼈다. 몸이 바위 위에서 한 뼘쯤 뜬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잘 마른 억새 다발에 붙는 불처럼 일시에 타올랐으나 꺼져버리는 것 또한 한순간이었다. 바닥에 가라앉은 재를 뒤적이며 아무리 입 바람을 불어 보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발정난 개처럼 분별없이 달려든 게 화근이었지만 그녀에게 그런 거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불가사의한 것은 그의 마음은 금세 식어버렸는데 그녀의 마음은 여전하다는 거였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는 거였다. 그는 산 아래, 기차가 지나가지 않는 철길에 얹어 놓았던 시선을 힘겹게 산 위로 끌어올렸다. 건너편 바위에 앉은 그녀는 뿔뿔이 해체되어 곧 날아갈 것 같은 억새의 꽃이 주는 감촉을 손등으로 느끼고 있을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더 이상 새로운 말은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뭘요?”
“내가 한 약속 말이야.”
“지켜야지요.”
“넌 날 아직도 좋아해?”
“그럼요.”
“왜?”
“그냥 좋아요.”
“난…….”
한때 애인이었던 여자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다. 억울한 것은 그 말을 피해 가다 보니 자주 말문이 막힌다는 것인데 여자 쪽에서는 하필 그걸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거냐며. 어쨌든 그는 오 년 만에 찾아온 그녀를 가급적 완곡한 말로 설득하고 싶었다. 오 년 전의 약속에 대해 사과부터 했다. 당시의 상황 때문에 나온 임기응변이었다고. 설마 당신이 그 말을 철썩같이 믿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해 보라고. 오 년 뒤에 애인이 없으면 결혼하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 비록 애인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고 있는 여자가 있다고. 햇볕 좋은 날, 갈색의 억새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민둥산에서 옛 애인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가고 있어 그는 어조를 조금 더 완곡하게 이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때였다.
“그년이 그렇게 좋아?”
“어?”
“내가 그렇게 싫어?”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던 가방에서 손수건으로 감싼 과도를 꺼낸 건 순식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던 쇠구슬이 볼링공처럼 커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칼끝의 방향을 자신의 배로 잡았다.
“날 밟고 그년한테 가.”
“뭐, 그년?”
“그래, 그년!”
“넌 아무데서나 칼 꺼내드는 게 자랑이냐!”
그와 그녀는 결국 민둥산 귀퉁이에서 평정을 잃고 침이 튀고 비속어가 난무하는 말의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그녀가 꺼내든 과도는 그의 손으로 넘어와 억새 숲으로 날아갔다. 그는 말싸움을 하면서도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지나갈까 봐 두리번거렸는데 그 맘을 눈치 챘는지 그녀는 저편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면 더 목청을 키웠다. 파국으로 접어드는 연애의 필수과목인 ‘치사한 대차대조표’가 그와 그녀의 입에서 지루하게 재생됐다. 다음 과목은 서로의 좋지 못한 성격과 신체적 약점(특히 성적인 것과 연관된)에 대해서였다. 물론 대단히 예민한 과목이었다. 뒤이어 경제가 나왔다.
“그래,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돈도 못 벌잖아!”
돈 얘기에서 그는 마침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흠칫 놀란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팔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이나 멱살을 잡으려는 의도로 다시 한 걸음 다가섰고 거의 동시에 그녀는 두 걸음 물러났다. 화가 난 그는 속도를 빨리해 한달음에 그녀에게로 접근했지만 그녀 역시 민첩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기 직전 그녀는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졌고 그곳엔 그의 손보다 더 크고 우람한 바위가 그녀의 뒤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왜 그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숨도 쉬지 않았다.
손목의 맥박도 뛰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에워싼 억새들만 바람에 술렁거릴 뿐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손만이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그는 오른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와 들여다보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은 결단코 문제될 게 없었다. 넘어지는 그녀의 몸 어디에도 닿지 않았기에. 이것이 살인의 범주에 속하는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긁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의 베어 놓은 억새를 끌어와 그녀의 몸을 덮었다. 덮고 또 덮었다. 그러다 다시 파헤쳐 그녀의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주머니에 감췄다. 연달아 피우다 꺼버린 담배꽁초들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곳은 민둥산의 외진 곳이었다. 억새꽃도 변변찮게 피어 있는 곳이었다. 민둥산 억새 축제도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그는 마른 억새더미에 덮여 있는 그녀에게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몸을 돌려 날다시피 언덕길을 달려 내려갔다. 검은 매연 같은 한숨을 연신 토해 내며.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의 솜털 같은 억새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건들거렸다.
“그러게 왜 찾아와!”
억새 군락지를 벗어난 산중턱 분지의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는 고함을 내질렀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급하게 담배를 빨다가 벌떡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자동차 열쇠를 찾아냈다. 그는 열쇠를 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세차게 후려쳤다. 몇 번이나. 그렇다. 이곳 민둥산은 집 근처에 있는 산이 아니었다.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다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란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
그는 자동차 열쇠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빙글빙글 돌리며 나무들과 억새 숲 사이로 뚫린 길을 걸었다. 꿈이란 걸 알기 전까진 정말이지 인생 최고의 악몽이었다. 오 년 전의 애인이 약속을 지키라고 다시 나타나다니.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살인까지 일어나다니(물론 살인이냐 아니냐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다행이었다. 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끔찍했다. 거기에 뒤따르는 일련의 과정도 아마 지루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조사와 심문, 검증, 부인과 자백, 그리고 구치소와 재판…… 만약 범죄 사실이 확정된다면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는 아까운 시간들. 사회적인 망신에 뒤따르는 몰락까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지금 공을 들이고 있는 그녀도 떠나갈 것이다.
자그마한 분지가 끝나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가 곧 뒤돌아섰다. 길옆에 자리한 천막집에서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풍겨 왔다. 그는 그곳으로 들어가 감자부침개와 막걸리를 주문했다.
“뭐해?”
“……그냥 있어요.”
“민둥산에 왔는데 억새가 예쁘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만 끊어요. 그리고 관심 없으니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여보세요?”
뻗대기는! 노란 막걸리에서 옥수수 냄새가 났다. 부침개에선 감자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잔에 새 술을 따르고 전화기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연락처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훑었다. 어떤 이름 앞에선 꽤 오래 머물렀다. 감자부침개를 우적우적 씹으며. 연락처의 이름들이 영화의 엔딩 자막처럼 줄줄이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에 의해 멈췄다. 그는 그 이름을 보며 막걸리를 마셨다.
“요즘 뭐해?”
“똑같죠, 뭐. 어디예요?”
“응, 민둥산.”
“거기서 뭐해요?”
“억새 구경. 너도 가을 가기 전에 한번 와봐. 좋다.”
“시간이 날까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연애가 잘 안 되는 모양이네요. 나한테 전화까지 하고.”
“뭐, 그렇지. 저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연애 문제죠?”
“헤어지는 남녀가 말이야. 오 년 뒤에도 서로 애인이 없으면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어. 만약 오 년 뒤에 정말 서로 애인이 없다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하나?”
“지켜야죠.”
“사랑하지 않아도?”
막걸리 한 병과 부침개를 모두 비운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이번에는 옛 애인의 녹음기를 꺼냈다. 녹음기를 작동시켜 오 년 전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당시 그녀가 녹음을 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든 빨리 그녀와 헤어지고 싶었다. 문제는 그의 마음은 그녀를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그녀의 마음은 여전하다는 거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그녀에게서 떠나버린 마음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여자까지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안다면 더더욱 큰일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주말은 한 번뿐이어서 시간을 쪼개려야 쪼갤 수가 없었다. 그는 점점 새 여자에게로 가는 주말이 많아졌고 결국 그녀는 폭발하고 말았다. 새 여자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간청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 닿으려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반응은 격렬했다. 그 격렬함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는 한동안 고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모든 걸 감내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그에게는 감내가 없었다. 약속 같지 않은 오 년 뒤의 약속을 하고 돌아올 때 그는 밤거리를 지나가는 연인들을 향해 가만히 물음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천막집에서 나온 그는 오른쪽과 왼쪽 길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휴대폰에 그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걸 막걸리를 마시던 중에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왼편 산자락의 억새꽃들을 햇살이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민둥산 꼭대기에 시선을 올려놓고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바삐 산꼭대기로 올라갈 뿐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전화번호를 바꿨나. 하긴 나도 전화기를 교체하면서 번호가 자동으로 바뀌었지. 그게 아니라면 사람들 틈에 섞여 억새의 장관을 구경하느라 벨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지. 그럴 확률이 높다. 오 년 뒤에 다시 찾아올 생각을 할 정도라면 전화번호를 쉽게 바꾸진 않았을 거야. 가만, 일부러 안 받는 걸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 만약 이게 꿈이 아니라면?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다면 꿈과 꿈 아닌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나가는 사람 열 명에게 물었을 때 모두 꿈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꿈이 아닐까, 꿈일까. 지나가는 사람 열 명에게 물었을 때 모두 꿈이라고 대답한다면 꿈일까, 꿈이 아닐까. 그는 사람들을 물색하다 저도 모르게 포장집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편에서 땀을 닦으며 걸어오는 경찰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복을 입은 경찰은 바삐 포장집 앞을 지나쳐 민둥산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그는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죽은 게 아닐까. 지금껏 그 두려움 때문에 일부러 꿈이었다고 몰아붙였던 것은 아닐까. 급작스레 쿵쿵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다가 황급히 껐다. 휴대용 전화기처럼 위험한 물건이 없었다. 그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밖으로 나가 산을 내려가는 길과 올라가는 길을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아예 뽑아버릴 듯 사납게 긁어댔다. 자…… 자…… 이 시점에서 가장 현명한 처신을 생각해 보자.
기울어진 햇살이 민둥산 자락을 찬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옷깃에 최대한 얼굴을 감춘 채 산을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왜 다시 현장을 찾아가는지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의 생각은 점점 꿈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길고 세세한 꿈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산을 내려와 천막집에서 허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산을 올라가는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꿈이든 꿈이 아니든, 그녀가 죽었든 죽지 않았든(죽지 않았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억새 더미로 묻어 놓은 그녀를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장소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힘들게 한 층 한 층 쌓아 온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절대로. 앞으로 분명 다가올 행복할 날들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없었다. 숨이 차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딴딴해졌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런 일에 휩쓸렸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곧바로 도망가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곳은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키보다 큰 억새가 우거진 좁은 길을 헉헉대며 올라갔다.
억새 숲으로 뚫린 좁은 길은 마치 미로 같았다. 두 갈래로 갈라지고 구부러지기를 거듭했다. 이곳이 그곳 같고 그곳이 이곳 같았다. 불안, 초조, 조바심이 차례로 또는 한꺼번에 지나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정상에 올라 주변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와 그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누가 봐도 선뜻 발길을 옮길 것 같지 않은 황량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여앉아 술판을 벌이고 몇은 춤을 추고 몇은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더 좋은 자리가 민둥산 곳곳에 허다하게 많은데 왜 하필 거기에 자리를 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세히 보니 산중턱 분지에서 본 경찰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절구통만큼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여 그곳으로 걸어갔다.
“왜 그러시죠?”
그녀가 묻혀 있는 곳을 몰래 훔쳐본 그는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에게 물었다.
“불 피우면 위험한데 이분들이 말을 안 들어요.”
“이 양반아, 휴대용 버너잖아! 배고파 죽겠어!”
“화재 위험이 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요것만 굽고 금방 끌 테니 걱정 말아요. 자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경찰 양반도 소주 한 잔에 삼겹살 좀 먹어 봐. 기가 막혀!”
“에이, 이러면 안 되는데…….”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경찰은 결국 등산객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쪼그려 앉아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마시고 삼겹살을 씹었다. 재빨리 입을 닦은 경찰은 빈 잔을 그에게 건넸다. 그도 얼떨결에 소주 한 컵과 삼겹살을 받아먹었다.
“신고가 들어온 거니 가급적 빨리 굽고 버너 치우십시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신고해서 바쁜 경찰 아저씰 이 산꼭대기까지 올려 보냈단 말이야!”
“요즘 휴대전화 때문에 무서운 세상이 됐습니다.”
경찰은 아예 나무젓가락까지 들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등산객들이 준비해 온 음식들을 맛보았다. 그는 등산객이 준 빨간 사과와 바닥에 펼쳐 놓은 신문을 들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 바로 그녀가 묻혀 있는 마른 억새더미 앞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억새를 뒤적거린 것 같진 않았다. 억새를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등산객들이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았다. 사과에는 그의 이빨 자국과 피가 조금 묻어 있어서 다시 그 부분을 베어 먹었다. 이번에는 더 많은 피가 사과에 배어 있었다. 그는 입 속의 침을 그러모아 뱉었다. 삼분의 일쯤 피가 섞인 침이었다. 그는 더 이상 침을 뱉지 않고 고이는 족족 삼켰다. 신문을 읽으려 했지만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 문장이나 두 문장 정도 읽으면 이내 기사를 떠나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보다 다소 일찍 찾아온 노안은 활자까지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사과를 조심해서 베어 먹으며 등산객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해야만 했다. 산 밑에서 올라온 경찰은 아예 눌러앉은 것 같았다. 그는 하품을 했다. 눈물이 주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저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요.”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옆에 놓인, 반쯤 먹은 사과를 들어올렸다.
“그럼, 술 한 잔 하시던가!”
경찰을 구워삶았던 사내가 팩소주와 안주를 들고 다가왔다. 사내의 얼굴은 사과보다 붉게 변해 있었다.
“억새더미에 이쁜 애인이라도 숨겨 놨습니까?”
“……아니, 좀 쉬려고요.”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둡습니까? 꼭 애인 무덤 앞에 앉아 있는 얼굴 같습니다. 자, 마셔요.”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사내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억새더미에 어정쩡하게 기댄 채 사내가 어서 돌아갈 것을 재촉하듯 이내 잔을 비우고 돌려주었다. 하지만 사내는 쉽게 잔을 비우지 않은 채 눈을 반짝이며 그의 이곳저곳을 뜯어보며 잡다한 질문을 하느라 바빴다.
“근데, 혼자 왔습니까?”
“예. 혼자 오면 안 됩니까?”
“아니 이런 델 혼자 무슨 재미로 옵니까?”
“바람 쐬러 왔습니다. 술이나 한 잔 주십시오.”
집적거리는 사내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는 한숨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부터 그가 등을 기댄 억새더미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는 게 그의 등허리로 감지되고 있었다. 쥐나 오소리, 아니면 두더지, 너구리? 그는 사내 몰래 뒤를 흘끔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그녀의 살을 뜯어먹으려고 찾아온 동물들을 떠올리자 올라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았다.
“아니, 진짜 어디 안 좋으십니까? 갑자기 얼굴이 하얘졌네.”
“저…… 제가 혼자 좀 있고 싶은데.”
“혼자요?”
그는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사내를 억지로 돌려보내고 뒤편 억새더미로 신경을 집중시켰다. 무엇인가가 다시 그의 등허리를 툭툭 건드렸다. 그는 오른손을 뒤로 내밀어 억새더미 속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온갖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으로 흘러갔다.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요일 오후에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 모든 게 그녀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니. 그는 쌓아 놓은 억새 속으로 넣은 손을 조금씩 움직였다. 억새 외에는 만져지는 게 없었다.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른 남자를 찾았더라면 훨씬 더 괜찮은 남자를 만났을 게 틀림없었다. 바보 같은 여자였다. 그러니 이런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뿐인가. 가만히 있는 사람까지 곤경에 빠트리고 말았잖아. 억새더미 속에 넣은 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등산객 사내가 다가오는 걸 본 그는 순간 망설이다가 뒤로 반쯤 누운 듯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괜찮습니까? 여기 청심환 좀 가져왔는데.”
그는 생면부지인 사내의 친절이 불편했지만 사내가 건네준 청심환을 왼손으로 받아 삼켰다.
“근데, 뭘 잃어버렸습니까? 왜 억새 속을 뒤집니까?”
“아, 뭐가 부스럭거려서…….”
“우린 먼저 갑니다. 여기 더 계실 겁니까?”
“예. 가십시오. 저는 노을 좀 보려고요.”
사내의 눈에서 어떤 의심의 빛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억새더미 속에 들어가 있던 그의 손에 그녀의 발목이 만져진 것이. 그는 황급히 손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런 젠장, 그녀의 한쪽 발이 억새더미 밖으로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다행히 사내는 자기 일행을 보고 있었다. 그는 뒷발질로 그녀의 발을 억새 속으로 재빨리 밀어 넣었다. 식은땀이 일제히 등에서 솟아났다.
술에 취한 등산객들은 게으르게 민둥산 봉우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을 배웅했다. 자꾸만 억새더미에서 빠져나오는 그녀의 발을 뒷발질로 밀어 넣으며. 그녀의 발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넣으면 나오고 넣으면 나왔다. 등산객들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삐져나오려는 그녀의 발을 신발 뒤꿈치로 버티면서 비 오듯 솟아지는 얼굴의 땀을 팔소매로 닦았다.
“아저씬 안 내려갑니까?”
배가 불룩하게 나온 경찰이 저편에서 물었다. 등산객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노을을 보겠답니다.”
“민둥산 노을 기막히죠!”
“그래요? 어이, 우리도 노을 보고 내려갈까?”
사내의 말과 그녀의 발 힘에 그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되찾았다. 등산객들은 사내의 말을 무시했다. 경찰이 그에게 소리쳤다.
“해 지면 금방 캄캄해집니다!”
“집이 산 밑에 있습니다!”
민둥산에 조금씩 노을이 번졌다. 엷은 갈색에서 은빛으로 변했던 억새꽃은 급기야 정상에서부터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 그는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같은 자리에 서서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든 민둥산에서 물결치는 억새꽃들을 훑었다. 화산의 분화구처럼 푹 파인 곳과 반짝이는 능선, 그리고 봉우리들 위에서 억새꽃은 금방이라도 날아가거나 화르르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얽히지만 않았다면 정말 근래 보기 드문 장관에 흠뻑 젖어들었을 일요일이었다.
이윽고 그는 한숨과 함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뒤편 억새더미 속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억새더미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그녀의 발이 벨소리의 리듬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살아 있는 거야?”
그는 일주일을 굶은 멧돼지처럼 억새더미를 파헤쳤다. 주둥이가 아닌 두 손으로. 마른 풀잎을 뒤집어쓴 그녀는 실눈을 뜬 채 손을 내밀어 더듬더듬 가방의 전화기를 찾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똑같지만 다른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기를 볼에 밀착시킨 그녀가 마침내 말문도 열었다.
“여보세요?”
그와 그녀는 파헤쳐 놓은 억새더미를 깔고 앉아 한동안 노을에 물드는 억새꽃을 구경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눈부신 금발 같은 억새꽃이 노을과 바람에 밀려 파도치듯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민둥산의 억새꽃 노을에 당도하기까지의 지난한 사랑의 여정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머리카락도, 그녀의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흘렸다. 지금껏 누가 날 이렇게까지 오래 생각해 주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어깨에 와 닿는 그녀의 체취를 오랜만에 들이켰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고 덩달아 사타구니도 묵직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민둥산이 아니라 억새꽃 만발한 산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가만! 가만…… 그러니까 기절한 나를 억새더미에 묻고 혼자 산을 내려갔단 얘기잖아요?”
“정말 죽은 줄 알았다니까.”
“살인자로 몰릴까 봐 도망친 거 아녜요?”
“맞아. 인정해. 그런데 내려가다가 이게 꿈이라고 판단한 거야.”
“꿈?”
“응. 그래서 한시름 놓고 중턱에서 막걸릴 마셨어. 놀란 마음을 달래야 하잖아. 그런데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꿈이 아니란 생각이 드는 거야.”
“스톱! 뭐가 그리 복잡해요! 정리 좀 할게요. 그러니까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했는데 ─ 살인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아! ─ 대충 묻고 도망치다 보니 꿈인 것 같더라. 안심하고 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꿈이 아닌지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다시 산으로 올라왔는데 꿈이 아닌 게 맞는 거 같더라. 그때부터 내가 깨어날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얘기잖아요?”
“응. 그러다 깨어났고.”
그는 더 안전한 곳에다 그녀를 매장하려고 올라왔단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노을을 업고 물결치는 억새꽃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침 넘어가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헛기침을 했다.
“지금은 꿈이에요, 아니에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건 꿈이든 아니든 당신이 119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도망칠 마음밖에 없었다는 거죠.”
“인정해. 하지만 넌 오 년 전의 약속을 지키라고 불시에 나타났고 칼까지 꺼내들었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오 년 뒤에 서로 애인이 없으면 결혼하겠다는 약속이 진짜 약속이라고 생각해? 상대가 놓아 주지 않으니 임시방편으로 그냥 뱉어 놓은 애기일 뿐이잖아. 그리고 오 년 전 그 약속을 하기 직전에도 너는 칼을 꺼내들었어.”
“좋아하니까! 떠나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 넌 어떻게 할 거 같아?”
“내가 왜 싫은데? 그리고 당신이 한 일은 생각 안 나?”
“……내가 뭘?” “만나는 동안 두 번이나 바람피웠잖아?”
“그게 무슨 바람이야?”
“바람이 아니면?”
“그만 하자.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내려가야 돼.”
“졸려. 날 업고 내려가. 그렇지 않음 안 내려갈 거야.”
“업고? 여긴 해발 천백십구 미터야!”
그는 갑자기 몰려든 졸음에 거의 눈이 감겨 가는 그녀를 업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웠다. 길도 미끄러운 검은 진흙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꽉 잡은 채 조심조심 내리막길을 걸었다. 살인이나 자살, 자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그는 민둥산의 서쪽 억새꽃들을 물들이는 눈부신 노을을 정면으로 받으며 걸었다. 산 아래의 작은 역은 벌써 산그늘에 묻혀 있었다. 산을 내려가면 어떡해서든 그녀를 떠나보내야 했다. 가급적 소란피우지 않고. 그녀의 다른 요구는 다 들어준다 하더라도 다시 오 년 전 연인 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싫었다. 그 우유부단함을 이용하려는 듯한 그녀는 더더욱 싫었다. 등에 업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내동댕이치고 싶었지만 그랬을 때 벌어질 일들을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그녀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졌다. 마치 사람 크기의 돌부처를 업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니?”
“…….”
“너랑 나랑은 안 어울린다. 산에서 내려가면 깨끗하게 헤어지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이 몸무게만 더 불어난 것 같았고 그녀는 그의 등에서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추스르듯 고쳐 업었지만 두 손으로 전해지는 힘은 이내 스르르 빠져나갔다. 매일 조금씩 침하하고 있는 민둥산의 곳곳처럼. 석회암 지대에 자리 잡은 민둥산은 움푹 꺼진 곳이 많았다. 그 여파로 산중턱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집을 버리고 이사를 갔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비탈 밭 가운데나 그가 걷는 길옆도 땅이 갈라져 크레바스처럼 변한 곳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녀의 무게 때문에 민둥산을 내려가다가 갑자기 암흑 속으로 빠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어쩌면 그녀의 은밀한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모래의 여인처럼 사구 속에 그를 가둔 채 평생 괴롭힐 것이란 상상이 들자 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놓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무게를 계속 불리는 중이었고 그는 결국 억새 숲으로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억새에 누운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
스산한 바람이 그와 그녀 사이로 지나갔다.
“자는 거니?”
“…….”
“또 죽은 거야?”
“…….”
그는 다시 그녀의 맥을 짚고 코에서 숨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팔뚝을 살짝 꼬집었다. 그는 주머니에 감춰 두었던 녹음기를 그녀의 가방에 몰래 넣고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119에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노을은 민둥산 꼭대기로 올라가고 건너편 산에서는 시린 그늘이 건너왔다.
“아, 저기 있네요!”
산에서 만났던 등산객 사내였다. 그 옆에는 역시 산에서 본 경찰이 땀을 흘리며 다가왔다. 그의 한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억새밭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등산객과 경찰은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그와 누워 있는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양쪽 관자놀이를 힘주어 눌렀다. 길고 지루한 산행이었다.
“그렇잖아도 119에 전화를 하려는 참이었는데…….”
“왜요?”
경찰이 물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는 경찰에게 민둥산 정상 부근에서 중턱까지 그녀를 업고 온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이해하기에는 무리일 거란 생각을 했다. 그 앞의 얘기는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있는데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하던 대로 그녀의 상태를 찬찬히 살폈다. 등산객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경찰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죽은 것 같은데…….”
“거 보라니까요. 내가 뭐라 그랬습니까. 아까부터 수상했다니까요.”
“기절한 건 아닙니까?”
“경찰 양반, 이건 살인사건입니다! 범인은 이 사람이고.”
“아저씬 일단 조용히 계세요. 선생님, 산에서 졸린다고 하는 여자를 등에 업었다, 업고 내려오는데 뭔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이렇다, 이 얘기죠?”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돼? 아까 산 위에서 죽이고 날 어두워지니까 지금 아무도 모르는 데다 매장하려는 계획이잖아.”
“가만히 좀 계시라구요, 아저씬!”
“이 여자 분과는 어떤 관계죠?”
“옛날에 사귀었던 애인입니다.”
“치정살인이야!” 등산객 사내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걸 그는 꾹 참았다.
“옛날 애인인데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거죠?”
“이 여자가 나를 오 년 만에 불쑥 찾아온 겁니다.”
“어떻게?”
“산 밑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찾아가 내 위치를 물은 모양입니다. 아! 우리 집!”
그는 손으로 이마를 쳤다. 깜박 잊고 있었던 출구를 드디어 찾아낸 거였다. 그는 등산객 사내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사라진 민둥산 중턱은 스산한 바람만 설쳐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꿈속의 일이란 겁니다.”
“꿈이라구요…….”
“꿈이라!”
경찰과 등산객 사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억새밭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한 일에 시간을 허비한 게 아까웠다. 뭔가를 한참 고심하던 경찰이 마침내 정리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둔한 등산객 사내는 여전히 복잡한 미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결론은 선생님의 꿈속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 속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럼 당신이 살인범이란 얘기야, 아니야?”
경찰은 머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여러 번 번갈아가며 돌리다가 마침내 정리가 된 듯 입을 열었다.
“선생님, 사실 선생님의 얘기만 듣고선 이게 꿈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게 꿈이라 하더라도 제가 경찰인 이상 선생님을 체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여자 분은 지금 죽었고 선생님은 살인 용의자니까요. 경찰인 제가 여기서 선생님을 놓아 드리면 직무유기일 듯싶습니다.”
“경찰 양반, 맞아요! 꿈이든 뭐든 살인자는 살인자고 당신은 분명히 경찰인 거요. 그리고 당신, 이게 꿈이란 걸 증명할 수 있어?”
“당신들이 떠나면 이 여자 금방 깨어난다니까요! 그게 꿈인데 난들 어떡합니까?”
“당신, 정신병자 아냐? 아니 어떻게 세 사람이 똑같은 꿈을 꿀 수가 있어. 그게 말이 돼?”
“일단 파출서로 가시죠. 언제라도 이 여자가 죽음에서 깨어나면 선생님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한 일을 두 사람이 믿지 않았기에 그는 다시 그녀를 업어야만 했다. 그녀를 업어야만 했기 때문에 경찰은 수갑만은 채우지 않았다. 대신 앞에는 경찰이 뒤에서는 등산객 사내가 도망을 못 가게 감시를 했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그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들은 그가 꾸는 꿈의 등장인물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 또한 당분간 깨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디 꿈 한두 번 꾸는가 말이다. 걸려도 된통 걸린 게 틀림없었다. 등에 업은 그녀는, 돌부처를 업어 본 적은 없지만 정말 돌부처만큼 무거웠다. 등에 와 닿는 젖가슴은 돌처럼 차가웠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호박돌처럼 단단했다. 민둥산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억새의 잎들이 그의 뺨을 칼처럼 베고 뒤로 물러나는 저녁이었다. 이 꿈 밖으로 나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머릿속은 캄캄하기만 했다. 어디서부터 꿈이 시작되었는지 헤아려 보았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혹, 이 꿈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꿈속에서 감옥까지 가야 한단 말인가. 거기서 얼마나 살아야 할까. 아니, 아니…… 이게 정말 꿈일까.
“앞에 가는 형씨? 나 같으면 헤어지고 오 년 뒤에도 날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발가벗고 춤추겠다.”
그는 등에 업힌 그녀가 등산객 사내의 입을 빌려 말한다고 생각했다.
“난 절대 그렇게 못 하니 당신이나 실컷 하든가!”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 감방에서 한참 썩어야겠네.”
“이런 놈들 때문에 교도소가 아까워요, 교도소가!”
앞에서 가던 경찰이 뒷발질로 그의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찼다. 그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 길을 벗어나 그녀를 업은 채 억새밭으로 꼬꾸라졌다. 그녀는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업은 게 아니라 그녀가 그의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비탈진 억새밭에서 그렇게 몇 바퀴 구른 뒤에야 겨우 일어났다. 경찰과 등산객 사내는 어느새 그의 앞뒤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어둠이 내려 잘 보이지 않는 억새가 우거진 길을 걸었다. 바람 한번 불면 모두 산산이 날아갈 거라 여겼던 억새꽃은 아랑곳 않고 꼿꼿하게 매달려 그의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길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을 끝없이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것 같았다. 저 아래 하나둘 따스한 불빛이 피어나는 마을까지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했다. 경찰과 사내는 앞뒤에서 심심찮게 그를 때리며 걸었다. 그때마다 그는 비틀거리거나 억새밭으로 쓰러졌다. 그는 그녀를 등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떨어지면 엉금엉금 기어가 그녀를 다시 업었다. 꿈이어도 좋고 꿈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쓰러졌다가 일어나 걸었고 또다시 쓰러지면 거듭 일어나 입을 꾹 다문 채 걸었다.
어둑어둑한 민둥산에서.
오 년 전에 헤어진, 차갑고 단단한 애인을 등에 업은 채.
《문장웹진 10월호》
2012-09-27 11:45:20 ⓒ 2012년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