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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로 가득 찬 들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2. 17. 23:28

 

가을로 가득 찬 들판

김 대 억

 

캐나다는 러시아에 이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다. 남북한 전체를 합친 우리나라의 36배에 달하는 면적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산악지대 보다는 평지가 더 많기에 어디를 가도 끝없이 펼쳐진 평원사이로 뚫린 길을 따라 달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길이 고속도로이면 말할 것도 없고, 시골 길이라 할지라도 차선이 몇 개냐가 문제지 모두 널찍하게 잘 포장되어 있어 막힌데 없이 전개되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마음대로 즐기고 음미하며 달려 나갈 수 있다.

 

좌우로 펼쳐진 광경들도 얼핏 보면 대동소이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방과 지역과 지형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들을 지니고 있다. 똑같이 광활한 평원이라도 인적의 자취를 찾아볼 수도 없이 한없이 뻗어나간 초원지대가 있는가 하면, 군데군데 인가가 보이기도 하다가는 사람손이 전혀 가지 않은 듯이 보이는 거친 들판이 한동안 계속되고, 잘 다듬어진 넓고 넓은 정원 같은 평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정화시켜주는 동화 속 장면 같은 경치를 볼 수 있기도 하고, 서부개척자들이 포장마차를 타고 달렸음직한 울퉁불퉁한 지역도 지나게 된다. 어째든 방대한 대륙 캐나다의 여기저기를 여행하다보면 지평선이 보이는 데까지 끝없는 펼쳐진 초원이나 들판 사이를 여러 시간 계속해서 차를 몰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는 동안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색다르게 전개되는 캐나다의 자연풍경을 바라보며 북미 대륙이 얼마나 축복받은 땅인가를 가슴 깊이 느끼게 되고 말이다.

 

오면서 가버리는 짧은 이 나라의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접할 수 있는 곳이 도시 주변에 산재한 들판이나 평원지대다. 혼잡한 도심지를 벗어나 한가롭고 평화롭게 뻗어나간 농촌 길로 들어서면 겨울 동안 쌓였던 눈이 녹아 땅속으로 잦아들면서 들어나는 노란 잔디들이 눈에 들어온다. 차창을 열면 아직은 싸늘하지만 봄 향기가 물신 밴 신선한 공기가 코 속으로 스며들고 “죽었던 라일락을 싹트게” 하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기나긴 겨울 후에 이처럼 찾아오는 봄을 맞이하여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봄이 찾아온 기척을 느끼는 순간 그 봄은 성숙의 계절인 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곳이 캐나다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면모를 달리하는 봄의 들을 관찰하면 이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푸른색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들어 낸 잔디가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파랗게 되어 자라나며, 갖가지 들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기 시작하고, 메마른 나무 가지들 틈을 헤집고 나온 연초록 이파리들이 푸른 잎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봄은 가버리고 봄을 성숙시키는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름은 봄에 힘겹게 태동을 시작하는 생명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그들을 강인하게 하며 자라나게 한다. 굳게 얼어붙은 땅을 헤치고 솟아난 가냘프고 연약한 새싹들이 거센 비바람과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며 자랄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고, 긴 겨울 동안 땅 속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깨어나는 개구리나 뱀에게 힘찬 생명력을 부여해주는 계절이 여름인 것이다. 그러기에 여름이 되면 캐나다의 넓은 평원들은 싱그럽고 푸르른 녹음과 그 속에서 날마다 생기를 더해가는 각종 생명체들이 발산하는 왕성한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 누구의 소유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넓은 푸른 초원에서 마음대로 자리를 옮겨가며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나 말 또는 염소와 양들을 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는 캐나다의 가축들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나라에서 여름을 지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라 생각하게 된다.

 

8월 중순이 넘어서면 사물을 성숙시키는 여름의 자취가 사라져 가는 것을 또다시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보고 느끼게 된다. 아침저녁으로 선기가 돌고, 가을의 향내석인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되며, 하늘이 맑고 높아지면서 푸르른 잎들은 노랗고 빨간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알기를 원한다면 들판에 생기는 변화를 살펴보면 된다. 봄에 형성된 나약한 생명들이 여름이라는 성장기를 거처 열매를 맺는 각가지 현상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 가을이 들어서는 들판인 까닭이다. 파랗고 검푸르던 들이 온통 누런색으로 변해가며 갖가지 나뭇잎들은 샛노랗고 새빨간 색으로 물들고, 열매 맺는 나무들의 가지마다에 탐스럽고 먹음직한 과일들이 힘겹게 매달려 있은 현상 또한 가을이 찾아온 산과 들과 계곡에 나타나는 풍경인 것이다.

 

여름에 핀 들꽃들은 그 향기를 잃으며 시들어가고 새로이 피어나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은 가을의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름이 지나간 광활한 평원을 가을로 채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도 하다. 사람 키보다도 높이 자란 잡초들과 한데 엉킨 가을 들판의 야생화들은 정성들여 가꾸고 다듬은 화단의 꽃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거친 들판에 방치된 들꽃들과 잡풀들이 기막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자연의 미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것들은 황량하면서 쓸쓸하게 보일 수도 있는 가을 들판을 천재적인 화가가 그린 완벽한 조화를 이룬 풍경화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넓기만 한 평원 군데군데에 농가들이 보이고, 마른 풀들이 가을바람에 물결치는 곳곳에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나무들과 크고 작은 열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과일나무들이 서있는 중간 중간에 끼어있는 잡초들과 한 덩어리가 된 야생화들로 인해 가을 들판은 삭막한 광야 아닌 신비스럽고 매력적인 자연의 뜰로 우리 에게 닥아 오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이 같은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달릴 때면 난 생각하곤 한다. 가을이 되면 여물고 익어가는 곡식이나 과일들처럼 나도 살아온 인생의 연륜에 부끄럽지 않은 삶의 결실을 거두고 있는 가를. 그러노라면 찾아온 내 인생의 가을에 내가 추수하고 거둬들일 것은 너무도 적고 보잘 것 없다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가을의 평원은 제멋대로 자란 야생화와 거친 풀들까지 합세하여 조화를 이뤄주어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는 풍경이 되는데 내가 걸어온 허물과 잘못으로 수놓아진 빼뚤어진 발자국들로 그려진 내 인생의 풍경화는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조잡하고 추잡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제 곧 가을이 가득한 이 들판에 하얀 눈이 내려 쌓여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이란 생각을 하며 나 자신을 달래며 위로해 본다. “겨울이 오면 봄은 멀지 않을 것”이고, 겨울을 밀어내고 찾아오는 봄과 더불어 움 트고, 싹 터 자라나서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처럼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보는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인생 풍경화를 그리며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말이다.

 

 

 

                                                                                                   알 수 없는 것

김 대 억

 

[님의 침묵]은 만해 한용운의 대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는 시다. 나도 그 시를 무척 좋아하여 고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번 읽었고, 지금도 때때로 그 시를 읽으며 사랑과 이별의 의미를 마음속에 되새기곤 한다. 하지만 난 그의 또 다른 작품 [알 수 없어요]도 [님의 침묵] 못지않게 좋아한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밝고 옥 같은 손으로 끝 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난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인 한용운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싶다고 하는 “발자취”, “얼굴”, “입김”, “노래”, “시”, “등불“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의 가슴속에 타는 “불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른다고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그가 알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기에 자연의 신비는 크고도 오묘하며, 인생은 살 만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들이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만 하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 인생인지. 무엇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인지. 어째서 갖가지 악을 행하면서도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은데 착하고 어진 일만을 행하며 정도를 걸으면서도 주위의 인정을 받기는커녕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어렵고 힘든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는지. 세상의 이런 부조리와 모순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이지. 정확한 해답을 찾고 싶은 질문들이지만 그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해주지 못하기에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문제들이다.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에 관해서만 우리의 이성과 논리가 납득할 수 있는 정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자연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들 보다는 그러지 못한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런 모든 것 중에서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그런 것 같은 데도 알고 보면 그게 아니고, 알다가도 모르겠기에 결국은 “알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복잡하기만 한 인체의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하여 생각의 표현인 말의 사실 여부까지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그런데도 대뇌의 검열을 거치기 전 인간의 가슴속에 잉태된 “생각”이나 “계획”을 착오 없이 읽어낼 수 있는 기계나 방법은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 판에 새겨진 사연을 외부에서 판독해 내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상대가 아무리 사실임을 강조하며 되풀이 하더라도 진정 그렇다는 것을 확인할 방도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는 이와의 인간관계나 그의 인격과 교양 또는 그가 보여준 신뢰성이나 인간성에 근거하여 그가 하는 말의 진의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구두약속은 실현되기보다는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절대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에게서도 배반의 슬픔을 맛보아야 할 때가 수시로 생기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느니, “그 사람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는 한탄과 더불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에 동조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확실히 알 수 없기에 믿기 힘들고,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데 자신만만하게 이의를 제기 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줄 안다. 경우나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한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줄 믿었던 친구나 동지들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달성한 후에는 망설이지 않고 자기네 갈 길을 가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경우를 누구나 한두 번쯤은 당해 보았을 줄 안다. 심지어는 친척이나 가족들에서 조차 배척당한 쓰라린 경험을 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에서 버림당하는 아픔과 슬픔을 체험한 분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까닭이 이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나 아닌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믿는다. 우선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결코 원만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아무도 외로운 섬이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진 이들이 늘어나면 세상은 상호불신으로 인한 미움과 적대로 야기되는 온갖 갈등과 혼란과 분열 속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피차 믿고 의지하며 협조하는 길만이 이 엄청난 비극을 방지하는 첫 걸음이라 생각한다. 그해야만 이웃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경계의 눈으로 보는 대신 신뢰함으로 그들과 더불어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이와 같은 중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다고 그들과 거리를 두거나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 문을 닫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짝 열어야 할 것이다. 그네들이 우리들의 깨끗하고 선한 목적을 지닌 가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요술 안경”을 쓰고서 말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한탄만 한다면 서로를 향한 경계심과 적대감은 커지지만 할 것이며, 우리들 사이엔 높고 두터운 담이 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선한 우리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요술 안경”을 자신 있게 쓰고 다닐 수 있게 우리들 자신이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신뢰를 회복하여 불신시대의 막을 내리게 하는 지름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당선 소감

김 대 억

 

밤과 낮이 다른 먼 이역 땅 캐나다에 살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글들을 썼고, 여섯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목회자의 자격과 신분으로 남의 나라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동포들을 위한 삶의 지침이나 교훈에 중점을 둔 글들을 많이 다루었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순수한 수필이나 문학적 가치를 지닌 것들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공인된 문인이 아닌 목사가 수필가처럼 행세하며 그런 글들을 쓴다는 것이 어색하기도하고, 적절하지도 못하다고 여긴 까닭이다.

 

그러다 나름대로 크게 결단하고 “시와 산문”에 졸작을 보낸 후 기대와 불안한 마음을 함께 지니고 기다리던 중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 부터는 무엇을 쓰든 더욱 신중하게 또 정성을 들여 수필가로서 손색이 없는 글을 써야한다는 막중한 사명감과 책임감도 느끼게 된다.

 

부족한 사람에게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며 문인의 대열에 끼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동시에 이번 당선을 계기로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함은 물론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많은 글들을 읽고 깊이 생각함으로 읽는 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도 다짐한다.

 

 

 

 

약력

중앙 중.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 영문과

Tyndale Theological Seminary (Ontario, Canada)

McMaster University (Ontario, Canada)

 

계간 <<시와 산문>> 수필부분 2011년 겨울호 당선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