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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0. 28. 19:27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기

                                                                                                                 김금용(시인)

음흉하게 웃는 저들 좀 봐

징그럽게 뺨을 부비는 저 선정적인 몸짓을 봐

다리를 벌리고 생식기를 드러내는

어둠 속에서조차 도드라지는 저 윤기

흐르는 색을 좀 봐

눈웃음치며 다가서는 밤의 여자

웃통을 벗어 던진 밤의 남자

무엇이든 끌어당겨 번식하려는 집요함에

지구는 손들었다는데도

뿌리를 퍼뜨리며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곁에만 가도 온갖 향내를 풍기며 꼬드겨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허리를 꼰다니깐

어둠도 두려워하지 않아

언제나 씨방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지

조숙한 여인네의 모양새는 하나 없어

사람을 믿지 않게 하고

등을 돌리게 하고

새 세상을 꿈꾸는 시인들을 유혹한다니깐

치마를 활짝 펼친 채 가리지 않고 문을 열어준다니깐

꽃은 남성이 맞아

씨를 퍼뜨리기 위해 아프리카 평원을 내달리는 숫표범이 맞아

뿌리를 거세게 지구 안으로 내뻗치며

밖으론 여리고 고운 깃발을 내걸지만

꽃, 꽃이라고 발음해 봐

입을 뾰족이 내밀고 덤비는 꼴이 되잖아

촉촉한 입술에 빠져들게 되잖아

꽃, 꽃,

꽃은 참 음흉해

                              -「 꽃은 참 음흉해」전문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이 글쎄, 꽃이 싫단다. 장미는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꽃들이 다 징그럽단다. 식물이란 건 다 싫단다. 도대체 왜?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야말로 공주병 걸린 여자처럼 꽃을 들고 오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좋아할 맘이 생긴다. 남편이, 그것도 말주변 엄청 없는 남편이 연애 시절 내게 “모두 다 잘나 보일 때에는 아내에게 꽃을 사들고 간 다.”라는 일본 단가 한 구절을 말해준 것 때문에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슬 쩍 마음 기울일 생각을 했던 건지 모른다.

꽃을 좋아하는 건, 특히 시인이 꽃을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꽃 같은 여자, 그것도 꽃봉오리인 그 순하디 순한, 달콤하기까지 한 여리고도 부드러운, 꽃띠 아가씨가 꽃이 싫다니, 놀랠 놀 자가 따로 없다. 질투? 아님, 사춘기 반항? 그것도 아니란다. 분명 꽃이 싫은 이유가 있단다.

 

 과학적으로 볼 때 꽃은 생식본능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암술과 수술을 다 동원하여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느냐고 치마를 훌렁 벗어버린 거리의 여자, 남자라는 것이다. 양성을 공유하면서 남성의 생식기를 들이대는, 그런 징그러운 생물이라는 것이다.

아, 아는 게 죄라더니,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나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분명 우리의 인식을 한참 벗어난 충격적인 기사였다. 꽃잎 자체가 남성이라는 것. 부드럽고 물기 촉촉한, 색까지 겸비한 여린 이파리가 남성이라는 것, 생태 유지를 위해 생태 본능대로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기 위한, 유혹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잔인하기 까지 한!

 

 식충식물을 보자. 영국 신문 '더 선' 온라인에 따르면 최근 슬리퍼처럼 생긴 육식식물을 자연사 탐험가인 스튜어트 맥퍼슨(26)이 필리핀 빅토리아산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 네펜테스아텐보라우기’로 명명된 이 벌레잡이 식물은 쥐도 잡아먹는다는데 1.2m이상이나 자란다고 한다. 맥퍼슨은 “먹잇감이 잎 안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잎 안의 산성 물질과 효소가 먹이의 연한 부분부터 분해시켜 결국 뼈만 남게 된다.”고 한다. 식충식물은 사실 그 종류가 엄청 많다.

 

 최근 우리 주변 꽃집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네펜데스 뿐만 아니라 끈끈이주걱, 파리지옥, 벌레잡이제비꽃, 사라세니아 등등 벌레를 잡아들이는 방법도 다양해서 1) 끈끈이형, 2) 포획형 3) 유도형 4) 함정문형 5) 포충망형이 있으며 습기가 많아서, 혹은 너무 척박한 땅이어서 이런 식충식물들이 자리를 잡고 벌레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한 딸이라서 그랬을까하고 이해해 보려한다. 사랑하는 님도 함께 살다보면 방구 뀌지, 코를 드르렁 천장 내려앉게 골지, 화장실 문 열어놓고 끙끙거리기까지 하지, 무슨 신비와 아름다움이 남겠는가. 현미경으로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세밀히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그 아이 입장에선 꽃이란, 단지 생태계의 하나일 뿐, 징그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겐 새로운 충격이었다. 낯선, 아주 낯선 시각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발언에 난 기겁을 할 판이었다. 적어도 꿈속에서지만 뿌리째 푸르러진다는 물푸레나무가 하늘로 하늘로 키를 높이다 못해 푸른 가지를 밑으로 늘어뜨리며 아주 풍만한 젖가슴으로 날 껴안아주는 꿈을 꾸고는 내 등단시이기도 한 ‘물푸레나무’를 완성했는가 하면, 앓고 난 뒤 내 팔을 쓰다듬던 잎에서, 혹은 버려진 화분에서 난초꽃을 피워내며 그 생명의 존엄을 쓰게 된 ‘무명란’이나 발레화를 신고 고통의 춤을 추는 모습을 연상시켜 쓴 ‘여인목’등, 꽃과 나무를 소재로 한 시가 나 역시 적은 편은 아니었다.

 

 물구나무를 서봐야 하겠구나 싶었다. 아파트 마당에 나와 거꾸로 올려다보면, 아파트 여러 동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마치 바다표면으로 보인다. 나 는 바로 그 까마득한 물속에 잠수한 것이다. 그렇게 갇힌 것이다. 때론 내 현실이 이런 인식 아래 아주 절망적이 되고 말지만, 그나마 푸른 하늘이 바다여서 언제고 맘만 먹으면, 저 하늘이 나의 비상구가 된다는 걸 깨닫는다.

탈출할 때가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적어도 내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그러고 보면, 1999년 브라질에 살 때 거리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크고 우람해서 괴물 같아 보였다. 더군다나 우습게도 그런 나무에 주황빛, 혹은 하얀 실밥 풀어진 것 같은 꽃이 피는데, 아침 출근길에 떨어진 그 모습이 꼭 간밤에 바람을 피운 여인네 팬티 같아 민망스러웠다. 꽃이 이렇게 지저분하기도 또 치마를 펼치고 남자를 유혹하는 되바라진 모습도 있구나 싶었다. 그 뒤로 브라질은 내게 삼바축제나 축구의 배경과 함께 ‘Light your fire!’를 외치는 정열적인 감빛 색채로 지금까지 기억하게 한다.

 

 꽃이 과학적으로 남성이든 양성이든, 사실 바라보는 꽃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아름답다는데서 출발한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있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짓거리는 우리 예술인들의 몫이다. 장르를 넘어서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시도를 곳곳에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어를 기호로 하는 문학은, 그 중에서도 시는 제일 보수적이고 더딘 것이 사실이다. 최근 젊은 시인들이 시도하는 ‘미래파’시 등은 그런 면에서 실험성을 인정한다. 오랜 시간 역사성을 갖고 객관적인 평가 아래 명시가 나오는 걸 생각한다면, 어찌 서둘러 명시를 쓸 수 있다 하겠는가. 문제시도 실험시도 그런 면에서 안주하지 않는 시인의 바른 시정신이라고 믿는다.

 

 예술인에게 제일 무서운 건 생각이 굳는 것이다.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영역을 굳혀 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순수한 시 정신을 가진 시인은, 삶과 죽음의 근본을 더듬어 생각하는 시인은, 자신의 본질에 대해 끝없이 의문과 사색을 놓지 못하는 시인은 더욱 자유로워야 한다. 적어도 일반의 시선으로 세상을 평하고 집착하는 걸 벗어나야 한다. 그게 시인의 자세이다.

 

 위의 시를 굳이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도 그렇다. 일반인들에게, 시인들에게조차 낯선 시각으로 바라본 일종의 충격을 줬다는 것에서 딸의 부정적인 시각이 내게 세상을 ‘물구나무서듯 가꾸로 보기’가 필요함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잊힌 기억 너머, 지나친 작은 것 하나하나를 다시 꺼내어 관심을 갖고 되짚어 살펴보려 한다. 시의 소재는 잔치가 끝난 마당 한 구석에 홀로 남겨진 어둠이나 적막 속에서도 응당 제 모습을 기억하는 관심 아 래서 다시 깨어나 ‘또 다른 나’에게로 전이, 혹은 투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연이나 세상만물들이 사람들의 시각에서만 평가하고 단정하듯 평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난 이 한 수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히려 그들은 단 하루치의 삶을 위해서도 전진, 또 전진, 고달픈 전쟁을 치루고 있지 않은지, 거꾸로 되짚으며 이 시를 완성했던 것이다.

 

김금용 시인

* 동국대 국문학과 졸업. 중국 북경 중앙민족대학원 졸업. 1997년《현대시학》등단.

* 시집으로『광화문 자콥』『넘치는 그늘』번역시집『중국현대시』등.

* rmadyd417@hanmail.net http://blog.naver.com/poetrykim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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