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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시의 죽음을 위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7. 31. 17:50

진정한 시의 죽음을 위하여

 

- 새로운 미학의 건설을 위한 반성

 

강동우(문학평론가)

 

아방가르드(전위)의 핵심은 죽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 있고, 아리에가르드(후위)의 핵심은 그것을 아직 좋아하는 데 있다

- 페터 뷔르거(Peter Burger)

 

1. 새로운 미학의 건설?

 

시(문학)에서 햋나 실험적인 작업을 부정해왔던 사람들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 관한 문제에는 신물이 났으니 결국 시의 본령이나 진정성을 담고 있는 서정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식의 이야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재차 심각하게 거론되는 것을 보면 우리 시 혹은 비평이 어떤 곤경에 빠져 있는 듯 하다. 뚜렷한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고 난 뒤 우리 시는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에는 무엇보다 80년대와 90년대 초에 유행하였던 해체시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그 시작과 동시에 사실은 그 종말을 고해버린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정신은 없고 방법만 무성한 해체를 위한 해체나, 적이 없어진 상황에서의 공허한 참여는 독자들을 시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평단에서도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이나 토대를 제시하지 못하고 작품 해설이나 분석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여타의 사정은 시의 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것 같다.

사실 '우리 시의 미학을 진단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해 달라'는 이 글의 의도를 접하고 난 뒤 두 가지 면에서 당혹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드는 고민은 '과연 미학의 건설이 비평가의 몫인가' 하는 점이었고, 다음으로는 '새롭다'는 것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우선 '미학의 건설이 비평가의 몫인가' 하는 점, 이건 분명 나 스스로의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미학의 건설은 비평가가 아니라 작가의 몫이라고 은연중에,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고 나 스스로 타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의 역할, 혹은 의무에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비평은 개별 작품과 작가에 대한 판단. 즉 재판관식의 판단과 실제 비평 및 문학적 취미에 대한 평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은 주로 문학의원리와 이론, 본질, 생성, 기능,효과, 인간의 다른 활동과의 관계, 문학의 종류와 수단, 문학의 기술 및 기원과 역사에 관한 사고를 의미한다. 비평은 문학이론과 시학을 포함하는 것이다"라는 웰렉의 문학비평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새겨보기도 한다. 웰렉의 문학비평 개념은 미학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한 것으로 사실 문학 이론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필자를 포함한)의 비평은 어디에 와 있는가. 우리의 비평 수준은 새로운 미학이나 이론의 설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보인다. 아직까지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논쟁이 쟁점화되고 있고, 시에서만 국한시킨다면, 서정과 반서정의 문제가 최근 가장 큰 비평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서정과 반서정의 문제가 왜 이렇게 반복되는가는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아직도 서정인가, 이것은 혹 우리가 시를 서정시라는 테두리에서 옥죄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똑같은 문제의식이더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실험에 관계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한물 간 것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더 이상 실험은 새로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이것은 비단 평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 스스로가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면도 크다.

미학은, 새로운 미학은 새로운 대상과 함게 어우러질 때라야만 산출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을 때는 문학 이론과 실제의 작품 해석이 따로 노는, 분리와 불일치로 특징지어지는 학문적 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 개별적인 작품해설이 없는 이론은 추상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미학의 건설이 개별적인 몇 작품을 해석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듯이, 서정시가 판을 치는 이 시점에서 새로운 미학의 건설은 요원해 보인다. 이 이중의 고통은 필자가 섣불리 우리 시의 새로운 미학이나 전망을 제시하기를 망설여지게 하는 이유다. 작년, 그리고 2000년을 전후로 해서 우리 시의 미학이나 반성에 관한 논의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식의 논의는 공허한 메아리 같이 들린다. 이런 점에서 김상환의 '내재적 사유와 외재적 사유'에 대한 문제 제기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외재적 사유는 기존의 규칙을 정당한 행위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사유이고 내재적 사유는 스스로 규칙과 방향을 창출해 가는 행위로서의 사유이다. 전자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원리와 이념의 인도 없이는 혼돈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사유인 반면, 후자는 스스로 동길르 만드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이다.그의 식대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타성, 즉 외재성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운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시절 시인들에게는 미학을 찾지 않아도 미학이 먼저 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만으로도 미학이었고, 독재시절에는 민주만으로도 미학이었다. 절대 군중이 휩쓰는 세상에서 시인은 가난을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미학을 구현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시인들이 지난날 시인들을 행복하고 부러운 존재로 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궁핍은 시대와 사회가 주는 타율적 궁핍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이어야 한다. 이 말을 자율적 미학과 타율적 미학으로 바꾸어도 좋다.

 

 

'내면으로부터 갈구하는 자율적 궁핍'을 가지지 못하는 무거운 자기반성과 투쟁이 없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라 죄인이다"는 그의 반성적 성찰은 우리 시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준다. 고운기나 김상환의 지적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재적 사유가 아니라 내재적 사유, 타율적 궁핍이 아니라 자율적 궁핍이다. 사실 80년대 해체시의 선봉에 섰던 이성복. 박남철. 황지우의 시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치열한 실험정신도 있겠지만, 억압적인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 등 현실 참여의 요구를 시가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참여시와 해체시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 데에는 자율적 미학, 자율적 궁핍이 사라진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70-80년대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상황도 없다. 일제시대와 같은 정치적 상황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미학은 무엇일까. 다시 서정일까.

 

 

2. 문학은 죽음의 길이다

 

 

김경복은 「서정과 유토피아」에서 오늘 우리 시대에 꿈꾸는 이상 사회의 원리로 서정이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서정시에서의 서정의 개념을 영혼의 노래, 물활론적 세계관, 신화적 세계에 대한 동경의 표현, 유년과 고향에 대한 이식 등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시대의 인간 소외와 사물화를 저지하는데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서정시임을 역설한 바 있다 물론 이러한 서정(성)의 논의는 현재의 우리 시의 자기 반성으로서 시의위기를 타파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기서 논의되는 서정시는 (개인의 체험과 감정을 표현한)자아 탐구의 다양한 형식으로서의 서정시라기 보다는 두드러진 서정주의의 경향을 띤 현대시( 전통 서정시)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시의 구조 자체가 서정적 구조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식의 개념 정의나 규정은 자칫 시 자체의 본질 문제나 장르 규정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똑같은 장미를 보더라도 개인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제 내에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 체험내용과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감성적이건 지성적이건 관념적이건 추상적이건 구체적이건 문제가 될 게 없다. 또한 그것이 몽환적이고 자폐적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비판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들 간의 차이가 중요하고, 그 차이를 어떻게 형상화하는가가 중요하다. 문제는 서정이 아니라 19세기식 자연이나 섣부른 초월을 노래하는 복고적 서정주의가 문제이다. 그런 면에서 김춘수와 이승훈의 충고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 시가 타성화되어 있는 면은 정말 우려할 만한 것입니다. 1910년대와 20년대의 시풍과 경향이 아직도 고스란히 답습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많은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대 감각이 그렇게 둔하다는 것이지요. 이 시대는 서정시의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낡은 서정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고, 중견이든 신예든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각광받고 있습니다. 1세기 전의 시풍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이른바 순수서정시풍이 한 세기를 이어가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사례일 겁니다. 지금은 다들 손을 놓고 있는 해체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차이를 모르는 것은 문학을 모르고 시를 모르는 무지의 영광일 것이다. 최근에 활동하는 평론가, 이론가들 역시 이론이나 주장에 차이가 별로 없고,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비슷하게 시대착오적인 낡은 서정시론이나 펴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1920년대 수준의 서정시가 최고이고 이런 서정시야말로 시의 본질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으니 작고한 김수영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말할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이 차이가 문학적 경험에 대한, 시적 경험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낳고, 이런 비판적 사유가 실험의식이고 반전통적 반복고적 반보수적 지성이고 한마디로 모더니즘이고 후기 모더니즘이다. 그런 면에서 모더니즘은 어느 시대에나 있고, 있어야 하고, 문학이 썩지 않으려면 어느 시대나 실험적인 시가 있어야 한다

 

 

타성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지금의 서정시풍은 타파할 필요가 있다는 김춘수의 주장이나 차이가 비판적 사유를 낳고 비판적 사유가 실험의식이라는 이승훈의 주장은 모두 서정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단에 압도적으로 흘러나오는 낡은 서정시, 복고적 서정주의이다. 김춘수가 「파롤과 랑그, 혹은 시와 이성」에서도 재차 말했듯이 "시에 대한 의식이 아직도 농경시대를 맴돌고 있는 新世代도 있는 듯 한데, 그 상태는 위선 아나클로니즘으로 밖에는 말할 수 없을 듯하다. 서정을 말하되 서정주의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념 부재의 탈중심주의 시대에 그들이 제시하는 우리 시의 모색 방향은 서정시가 아니라 모더니즘이고 후기 모더니즘이고 해체시다. 혹자는 여기서 서정시만큼이나 (후기) 모더니즘과 해체시도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므로 순수서정시야말로 부조리하고 타락한 현실을 타파해 갈 수 있는 지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반드시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현실의 위기를 대처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아도르노가 서정시가 사회성을 띤다고 한 것은 - 예컨대 작품이 자아와 사회의 관계를 덜 주제화하면 할수록 그것이 더 완벽하게 사회성을 띤다는 노리는- 예술의 현실에 대한 관계를 더 이상 통찰력 있는 비판의 관계로 보지 않고 '절대적 부정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해체나 실험이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사람들이 이미 해체나 실험의식의 부정성 속에 담겨있는 바로 그 거부의식을 자신들에 대해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1930년대 이상의 시적 실험이나, 김춘수의 무의미시론, 이승훈의 비대상시론, 박상배의 메타시론 그리고 김준오의 패러디, 일상시, 도시시 등 후기현대에 대한 여타 이론은 그것의 비평여부를 떠나서 우리 문학의 다양성과 질적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킨 것이 사실이며, 많은 시인들의 자극제가 되기도 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시적 위기는, 이승훈의 지적대로," 실험의식이 죽은게 아니라 실험의식에 대한 의식, 말하자면 평론가들의 의식, 시인들의 의식이 죽"은 데서 비롯된다. "실험의식 이고 복고적 전통의식이고 갈 데까지 가야한다. 말하자면 갈 데까지 가다가 죽어야 한다. 우리 시는 이런 의미로서의 죽음을 모르고 자살을 모르고 추락을 모른다. 한 마디로 실패를 모른다. 모든 시인들이 적당히 쓰고 적당히 시인 행세를 하고 상도 받고 그렇게 산다. 그러나 문학은 적당히 가는 길이 아니고 성공의 길이 아니다. 문학은 실패의 길이고 죽음의 길이고 추락의 길이다 절규에 가까운 이 말은 적당한 실험과 적당한 해체를 경험한 (포스트)모더니즘 시인들이 그 대상일 것이다. 아직도 실험이라는 이름 하에 기존의 시적 태도를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똑같은 형태, 똑같은 패턴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계속되는 반복은 매혹과 감동이 아니라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내재적 사유. 자율적 궁핍(미학)은 치열한 고민과 고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실패와 죽음, 추락이 뒤따르지만 그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이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시적 실험들은 내재적 사유, 자율적 궁핍, 실험의식에 얼마나 투철한가를 잘 보여준다.

 

 

3. 시와 非詩, 미학과 반미학 사이

 

 

이승훈의 초기시에 익숙하거나 매료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최근의 이승훈의 시가 낯설고 이상하고, 한편으론 시가 죽었다고 불평을 하거나 시시껄렁하게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그의 시들은 禪的 깨달음의 시, 시와 몸이 하나가 되는 시, 시와 시론이 무분별한 시, 일상과 꿈,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어느 하나로 지칭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게 얽혀 있는 이 시들은 어쩌면 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읽히지 않은 것과 읽을 수 없는 것은 분명 다르다. 가장 최근에 나온 몇 편을 살펴보자.

 

 

비누를 보면 보는 것이고 만지면 만지는 것 손을 씻으면 손을 씻는 것 발을 씻으면 발을 씻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겨울 저녁 난 시를 쓰네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진다 나는 비누 속에 사라진다 나도 물거품 비누도 물거품 벗어날 길은 없다 비누의 길이 삶의 길이다 비누와 함께 비누를 따라 비누 속에 살자!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

 

- 「비누. 2」(《현대시학》 2004년 1월호)

 

 

무심코 비누로 손을 씻다가 비누가 매일 조금씩 사라진다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발견에서 이 시는 시작된다. 매일매일 비누가 사라지는 만큼 시간(生)도 사라지고 거품이 일 때는 비누가 하나가 된다. 이 대 비누는 비누이면서 비누가 아니고 비누가 아니면서 비누가 된다. 내가 비누를 만지는 게 아니라 비누가 나를 만지고, 비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진다는 발상은 주체와 객체의 무분별, 아니 무분별이라기 보다는 서로에 의지해 서로를 확인하는,'他者'에 의해 '나(我)'가 성립된다는 依他己性을 보여준다. 물론 이 시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無我)으로 진정한 나(眞我)를 찾으려는' 것.

그러나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시의 요소와 非詩의 요소가 섞여 있다는 점이다. "비누를 보면 보는 것이고 만지면 만지는 것이다.....무슨 말이 필요하랴?"까지의 언술은 객관적 사실의 진술로 과학이지 시적 요소로 보기 힘들다. 그러나 "비누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네 문득 비누가 다가와 나를 만진다.....비누 속에 살자!"는 마치 꿈속 같고 환상이고 무의식이고 시다. 이 두 부분의 배치에서 우리는 시와 비시의 경계를 묘하게 줄 타고 있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 "비누는 매일 사라진다"는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시가 아니면서 시가 된다. 왜냐하면 이때 ' 비누'는 비누이면서 나이기도 하니까. 따라서 이 마지막 구절은 앞의 비시적 요소까지도 '시적' 진술로 바꾸어 놓는다. 일종의 고백시 같기도 하고, 일상시 같기도 하다. 보기에 따라 이상할 수고 있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

 

쓰는 건 모두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신문도 시다 시는 쓰는 것 새기 는 것 흘러가는 것 그러므로 가을 오후 시청 앞 사람들도 시다 모두가 시다 시는 없으므 로 이 시들을 사랑해야 하리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쓴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 「모두가 시다」(《현대시학》2004년 1월호 )

 

 

 

세상 만물이 모두 무슨 자율성, 절대성 이른바 自性이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이 있고 依他己가 있다는 논리는 이 시에서도 적용된다. 시 자체의 고유한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 비시와의 관계에서 시가 있다는 것, 일체가 의타기성이라는 것, 그러므로 '새기고, 쓰고, 사라지는' 모든 것, 예컨대 낙서나 햇살, 낙엽, 포말은 물론이고( 곧 사라짐)가을 시청 앞 사람들까지도 시가 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인식은 '시'라는 대상뿐만 아니라 시를 쓰는 주체(우리는 이 주체를 '시인'이라 부르지마)까지도 변화시킨다. 간판도 시인이고 마네킹도 시인이고 저녁도 시인이고 (살다 없어질)한 세상도 시인이다. 이 모든 것은 "시는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는 없으므로" "모두 시다" 는 언술은 이 시의 맨 처음과 끝에 위치하면서 전체 뼈대(형식-시론)를 형성하고, 그 안의 언술들은 모두 세부적인 살(질료)이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자시의 시적 견해를 밝힌 시론시면서 일종의 메타시다. 그것도 아니라면 크리티픽션critifiction처럼 크리티포엣critipoet 이라고 해두자. 여기서도 물론 시론과 존재론, 일상의 무게가 균등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시가 특이한 것은 선이 성취하는 세계관이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선적 사유의 틀 속에서 자신의 일상과 시론과 무의식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 시를 통해 보여주는, "시는 없으므로/모두 시다"는, 그의 시론은 선에서 말하는 일종의 충격요법, 다시 말해 순간적으로 현실에 그을 내리긋듯한 파열이나 부저의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러니까 무슨 뚱딴지같은 궤변이 아니라 세계(우리 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철학적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이상하면 그냥 웃어버리자.

 

 

 

이 낭비가 좋아 지금 내리는 여름 햇살이 좋아 펑펑 쏟아지는 햇살이 좋아 호려한 당신이 좋아 이 사치가 좋아 이 시도 낭비 사랑도 낭비 종이 낭비 연필 낭비 시간 낭비 그러나 낭비가 구원이야 생산은 지겨워 낭비는 나비가 아니야 인간은 낭비하려고 태어났다 아낌없이 버리자 내 것은 없으므로

 

- 「화려한 당신이 좋아」1연(《세계의 문학》2003년 겨울호 )

 

 

 

이승훈의 대부분의 시가 그렇듯이 탁월한 리듬감은 시와 몸이 하나가 되는 시 쓰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물론 살과 핏덩어리(육체)를 포함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몸 쪽을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과 사변과 논리 등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기억과 꿈과 욕망 등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 기술되는 시어들이나 시구는 의식적인 사고에서 형성된 조작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자유로운 것이다. 여기서 의식은 언어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몸)과 언어 사이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할 뿐이다 특히 "낭비는 나비가 아니야"라는 언술은 자유 연상에 의한 무의식의 자유로운 표출이다. 이것은 리듬의 형성과정(물론 의도된 것이 아니다)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구절이지 언어 유희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무슨 의미를 찾는다거나 상징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의도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부분은 전위예술에서 보이는 우연성과도 통한다. 이것이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할지 몰라도 (물론 어떤 사람은 난해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시의 맛을 한층 더 배가시키는 양념 역할을 한다. 이 시도 강조점은 물론 '버림(無)' 의 미학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전의 시와 비교해 볼 때, 이승훈의 시에서 가장 큰 시적 변화는 아마 禪의 세계와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이승훈의 시가 모더니즘 경향과 해체적 양상을 거쳐 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론'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시의 고유성이나 본질성이라 일컬어지는 시의 법(또는 상)에 대한 부정이다. 예컨대 「준이와 나」라는 시는,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시집에 실려 있으니까 시가 되는 것이지 사진첩에 실려 있으면 사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라는 실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시는 고유의 自性이 없다는 것, 다지 依他己性에 의해 시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 고유성이 아니라 상호성, 본질이 아니라 허구, 허구가 본질이고 본질이 허구인 세계가 실제 세계의 모습이라는 인식은 선적 사유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가 최근에 실험하고 있는 시들은 결국 그의 선적 세계를 글쓰기를 통해 실천하는 하나의 양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굳이 선의 이론이나 선의 구체적 사상 체계를 시속에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선의 실천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선'이나 '불교'를 노래하는 여타의 다른 시인들과 구별된다. 예컨대 차창룡이 『나무 물고기』에서 불교의 구체적인 사상이나 고매한 경지를 노래했다면 이승훈은 선적 사유를 통해 일상을 노래한 것으로 시 속에 선적 사유가 침윤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 속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섣부른 초월이나 同和를 꿈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시가 너무 공허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나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단순히 시나 문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우리의 삶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고, 나아가 세계와 우주에 던져져야 할 질문이다. 말해 보자, 우리의 삶을 '이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한정지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 또한 자성이 아니라 의타기성에 의해 이루어질 뿐이다. 空한 것이다. 공하면서도 어렴풋이 존재하는 妙有인 것이다. 진공묘유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의 시쓰기는 잭슨 플록의 충동, 존 케이지의 불확정성과 우연성, 백남준의 충격요법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깨달음으로서의 시 쓰기이다.

혹자의 우려대로 이승훈의 최근 시적 실험은, 그의 말대로 실패와 죽음과 추락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실패가, 죽음이, 추락이 새로움을 낳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모든 아우라는 죽음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듯이, 죽음을 전제하지 않은 문학에 새로운 아우라와 실험의 발생은 기대할 수 없다. 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훈의 '시적인 것도 없고, 시도 없다'는 명제는 '모든 것이 '시'라는 명제와 통한다. 시와 비시 사이의 경계, 미학과 반미학의 경계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 우리 시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시가 아니라 시의 죽음, 미학이 아니라 미학의 죽음이다. 그래도 이상하다면 백남준의 다음과 같은 말이 도움이 될까?

 

 

"어느 시대나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엉터리와 진짜는 누구에 의해서도 구별되지요. 내가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해프닝을 벌였을 때 대중들은 미친 짓이라고 웃거나 난해하다는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를 꿰뚫어보는 눈이 있습니다."

 

 

* 위 글은 계간 『리토피아』2004년 봄호에 게제된 글 입니다.

* 강동우

경남 마산 출생

2001년 《현대시》평론으로 등단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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