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오름에 오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 4. 00:37

 

                 오름에 오르다


                                         -  제주기행. 1

 

                                                                           나호열

    

                                                             

                                    <높은 오름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다랑쉬오름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인다>


 제주는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島)이면서 가장 작은 행정구역(제주특별자치道)이기도 하다. 뭍에서 멀리 떨어진 까닭에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섬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그러나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즐기려 섬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안락과 휴식을 주는 레포츠의 천국이다. 서울의 3배쯤 되는 크기에 골프장은 스무 개가 넘고 곳곳에 아름다운 해변과 섬 중앙에 우뚝 솟은 한라산은 1950미터, 그 높이에 걸맞게 다양한 식물 분포를 보이고 있어 사시사철 여행객들을 매료시킨다. 2009년도에 제주도를 찾은 관광객은 6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고 제주 올레길 15개 코스가 개설되어 20만 명 이상이 섬의 풍광을 가슴에 안고 돌아갔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밝은 풍경 속으로 몇 걸음만 들어가 보면  감추어진 제주의 속살은 아픈 문신을 아로새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먼 과거로 돌아갈 것도 없이  해방 이후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떠올리면 제주 섬의 상흔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1948년 3월 1일에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총을 쏘았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오히려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았다.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파업을 단행하는바.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이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더 커져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미군정은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5월 5일에는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제주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 제주 4.3항쟁 사건으로 제주도 일부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


 현재 제주도의 인구가 50여 만 명임을 감안할 때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되고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으며.  3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되는 수이므로 4.3 사건은. 누구 할 것 없이 당시 제주도민 전체가 피해자이며 희생자로 바뀐 비극 그 자체인 것이다. 어느 편에 서 있던 간에 그 당시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가 최대 500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드디어 2005년 1월에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함으로써 반 세기에 걸친 제주도민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렇지만 4.3 사건이냐. 항쟁이냐의 명칭에 대한 논란처럼, 아직도 응어리는 풀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가해자는 역사의 뒤로 숨고 피해자는 울음을 삼키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자신의 신념의 정당성을 과신하다보면 타자의 신념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이 오류가 증폭되어 폭력으로 이어지는 상황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동족 간의, 민족 간의, 국가 간의, 참담한 비극을 방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함의하는 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응징으로는 끝없이 반복되는 증오와 복수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주의 겉과 속은 삶의 희열과 슬픔, 자연과의 투쟁과 순응이 얽혀져 있다. 제주를 흘낏 바라보는 것으로, 주마간산으로 지나쳐 가는 것으로 제주를 제대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라산을 오르고, 투어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던 첫 번째 제주 기행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 째, 햇수로는 이십 여 년이 지난 후에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주 섬에게 편지를 쓰는 셈이다. 그동안 한라산을 올라 백록담을 보았고, 성산포에도 가 닿았으며.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도 다녀왔다. 이런 이끌림은 제주 사람이 아니면서도 제주를 사랑하고 섬만큼 외로웠던 사람들을 알게 된 까닭이다. 김영갑(1957 ~ 2005)과 이생진이 바로 그들이다. 김영갑은 2005년에 48세를 일기로 작고한 사진작가로 우연히 들른 제주도의 풍광에 사로잡혀 1985년부터 20여 년간 제주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새긴 사람이다. 이생진은 시인으로 우리나라 천 여 개의 섬을 두루 살피고 섬과 인간의 삶을 대비하면서 외로움을 즐기고, 외로움을 넘어서려고 분투한 섬의 시인이다. 이 두 사람은 ‘오름’을 통해서 만났다. 시화집'『제주,그리고 오름'』(2002.4.책이있는마을) 머리말에서 이생진은 다음과 같이 r술회하고 있다.


제주에는 세계에서도 드물게 많은 오름(360여 개)이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성산 일출봉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모두 기생화산인 오름이다. 특히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리와 세화리 일대에 자리잡은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손지오름 ·높은오름 등은 한결같이 신비하고 아름답다. 이 신비와 아름다움에 끌려 사진작가, 화가, 시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내가 사진작가 김영갑과 화가 입현자를 만난 것도 이 오름의 매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오름에서 풍기는 서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그림에 고드름을 달듯 차가운 슬픔을 시로 달았다. 김영갑과 함께 만든 『숲 속의 사랑』(1997)에 이어, 이번엔, 화가 임현자와의 시화집 『제주, 그리고 오름』을 내게 되어 기쁘다.


나는 김영갑의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2004)를 통하여 예술가가 지녀야할 정신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고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 詩作의 방법론을 고치게도 되었다. 김영갑의 몇 권의 사진첩이 있었으나 그의 ‘오름’ 사진들은 다른 사진들에 비해서 내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대답은 내가 ‘오름’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코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오월 어느 날 새벽 4시 반, 제주문화재단의 김석범 부장이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전화를 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내려오라는 것, 아직도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새벽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동행했던 박주순 시인도 졸린 눈을 어쩌지 못하는데 너른 풀밭을 지나 가시덤불이 엉킨 곳에서 고사리를 캐자는 것이다. 난생 처음해 보는 고사리 꺾기. 꺾고 또 꺾어도 여닐 곱 번은 더 순을 내민다는 고사리는 날이 밝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저기 산 밑에서 위로 훑어 올라오는 사람들의 비닐 봉지에는 고사리가 두툼한데 소도, 말도 용케 알아서 먹지 않는다는 고사리는 눈에 밟히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7시 반, 아침 잠은 사라지고 우리 일행은 다시 길을 잡아 타고 달린다. 제주시를 동쪽으로 빠져 나가는 듯 싶더니 약간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도착한 곳 ‘높은 오름’이다. 구좌읍 송당리 산 213-1번지.

 

 400미터가 조금 넘는 정상을 향해 가자니 차를 세워 놓고 처음 만나는 풍경이 공동묘지이다. 공동묘지를 사이에 두고 길은 가파르게 올라가고 빠른 걸음으로 15분이면 정상에 닿는다. 발 밑에 펼쳐지는 분화구(굼부리)는 지름이 500미터 이상 벌려져 있고, 성산 일출봉 쪽에서 솟아오른 해는 여기저기 오름들을 솟구쳐 오르게 한다. 길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사방을 둘러보니 서쪽 먼 곳에 한라산이 우뚝 솟아 있고 바로 발 밑에 비자림이 한 폭 그림 같다. 동쪽 아스라이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가물거리고 때는 오월이었지만 바람은 약간 매운 듯 상쾌하였으니 몇 장의 사진을 남긴 뒤 발길을 내렸으니 하루에 오름 하나씩 오르면 건강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우스개소리는 진실에 가깝다. 기왕에 나들이를 나온 김에 한 군데 더 둘러보자는 김 부장의 제안으로 다랑쉬 오름으로 향했다. 높은 오름에서 내려다 볼 때에는 훤히 보이던 길이 애매한 모양인지 제대로 표지판도 없으니 몇 번인가 멈춰 서고 망설인 끝에 다랑쉬 오름 앞에 도착했다. 정비된 주차장도 없으나 벌써 승용차 몇 대가 서 있고 등산복 차림의 몇몇 사람들이 오름을 오르고 있었다..우리는 다랑쉬오름 앞에 아끈(작은) 다랑쉬를 먼저 오르기로 하였다. 이미 높은 오름을 올랐던 터 이므로 다랑쉬오름으로 오르는 지그재그의 길이 숨을 막히게 했던 까닭도 있었다. 아끈 다랑쉬는 5분이면 올라갈 수 있고 굼부리도 완만할 뿐  아니라 길도 편안하여눈 앞의 다랑쉬오름을 조망하는 맛도 각별하다.

 

 

 

  다랑쉬오름은 높은 오름보다 표고는 낮으나 (380m) 오르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다. 정상에서 분화구까지 깊이가 백록담과 비슷한 110미터 정도이고 밑지름은 1킬로미터, 오름 둘레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3킬로미터가 넘으니 오름 아래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들어갈 때에는 비자림을 지났지만 나올 때는 용눈이오름을 남쪽으로 바라보면서 1136번 도로를 향해 나왔다. 다랑쉬오름을 오른 쪽으로 두고 얼마 안가서 지금은 폐촌이 된 다랑쉬마을 터가 있다.


다랑쉬오름 아래에 펼쳐진 평원에는 조용한 산간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이 1948년 겨울 4.3 때 초토화작전으로 불바다가 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팽나무 한 그루만 말없이 서 있다. 그때 한라산 산간지대에 있는 마을은 거의 다 작전상 불태우거나 소개해 버렸지만 다랑쉬마을은 다른 마을이 소멸(掃滅)되는 황당함 이외에도 또 다른 비극이 묻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다랑쉬오름을 볼 때마다 아파했다. 

 지금 서 있는 팽나무에서 남쪽으로 300m쯤 대나무숲과 감자밭과 억새풀을 헤치고 내려가면 큰 돌덩이로 재갈을 물린 후미진 곳이 나온다. 그 돌 밑에 있는 좁은 굴이 비극의 산실이다. 그곳에 피신했던 11명의 마을 사람들이 죽은 채로 44년(1948~1992)  동안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다. 그 굴에는 어린아이 하나와 여자가 셋, 남자가 일곱, 모두 11명이 희생된 채 가정에서도 마을에서도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20년을 두고 제주도의 풍경만을 그렸다는 화가 임현자의 오름 그림 옆에 ‘다랑쉬오름의 비가(悲歌)’라는 시를 넣어 시화집『제주, 그리고 오름』(2002)을 펴냈다.


                             이생진 ,「제주, 그리고 오름 1」중에서



 이생진 시인은 ‘다랑쉬오름의 비가(悲歌)’ 7 편을 쓰고 다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이 시를 쓰고 싶었던 것은 1995년 겨울부터였다. 그 후 매년 다랑쉬오름을 찾았다. 그러다가 2002년 2월 27일부터 3월 7일까지 다랑쉬오름 근처에 머물며 이 시를 썼다. 그리고 매일 이곳에 와서 4.3으로 인한 모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뜻으로 팽 나무와 비문 앞에 술을 따르고 머리를 숙였다. 그저 시인이라는 소박한 심정에서 인간의 아픔을 아파하며 머리를 숙였다. 나의 가슴엔 이쪽도 저쪽도 모두 내 잘못이라는 아픔으로 가득했다. 그때 나는 혼자였다. 


                                이생진.『제주, 그리고 오름』(2002)중에서


 시인 이생진은 11명의 희생자 중에서 아홉 살 된 이재수의 마음을 빌려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7 편의 연작시를 썼던 것이다. 인간의 아픔을 아파한다는 것, 이쪽도 저쪽도 모두 내 잘못이라는 시인의 통곡은 입에 발린 요즘의 날 선 구호와는 격이 다르다.


  

너는 패러글라이딩이 처음이니?

아홉 살에 변을 당했으니

그 동안 네가 살았다면 지금 몇 살이지

예순 셋?

그럼 44년(1948-1992) 동안을 망각의 굴속에 있었단 말인가

빌어먹을

말하자면 세월이 정지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아니면 세월을 빼앗겼다는 이야기인가

그걸 돌려 받을 순 없나

그것도 동회에서 보상해주느냐 이거야

두고두고 불쾌한 악몽이여


하늘엔 오래 머물 수 있는 쉼터가 있을까

바람은 지혜로우니

바람을 잘 타면 하늘에서도 쉴 수 있지

오늘은 바람을 실컷 이용해야돼

바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나, 그렇다

그래서 화가들은 부러진 나무를 그리고

쓰러진 파도를 일으켜 세우려고 붓에 힘을 주는 거지

파도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냐

모두 바람의 힘이지

사람은 바람이 들어야 멋이 있어

나는 다랑쉬오름에 올라와서야 그걸 알았어

분화구 가득 바람을 담아봐

너를 공중으로 들어올리듯

가볍게 세상을 들어올릴 테니

그때 사람이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단 말이지

그러나 그때 조심해야해

바람을 알아야 패라글라이더를 조정할 수 있어

바람은 그것을 띄울 뿐 아무런 책임을 지지 못해

그것이 바람의 권력이자 책임소재야

허나 예술은 바람만으로는 안돼

그건 허풍이지

역시 그건 사람의 일이야

사람이 붓을 조절하듯

패러글라이딩은 바람을 조절해야해

불조심보다 바람을 조심하라구

바람이 죽으면 화염은 저절로 죽게 돼 있어

그러니 세상은 보이는 불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더 무섭다구


                           이생진 「소년과의 패러글라이딩」



 나는 이생진 시인의 「다랑쉬오름의 비가(悲歌)」를 오래 전에 읽었으나 그 비극의 현장에 가까이 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형태로든 폭력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 이데올로기도, 그로 말미암은 전쟁도, 심지어 때로는 종교도 거리낌없이 인간을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정의의 이름으로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싸움을 하고 서로를 헐뜯고 서로를 죽인다. 쓰라리고 아픈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분노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복수를 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름은 빨리 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직선의 즐거움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가르쳐 주고 가쁜 숨을 달래가면서 유연한 곡선의 부드러움을 만끽하라고 권유한다. 헤아릴 수도 없는 먼 옛날, 시뻘건 용암이 솟구쳐 올랐던 분화구에는 사시사철 풀들이 자라고 꽃이 핀다. 쉬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생명을 떨구기도 하고 다시 불꽃처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오름은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사람에게 오름을 허락한다. 


 

 

 

'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0) 2010.02.17
노고단 기행  (0) 2010.02.16
白碑를 찾아서   (0) 2009.12.13
토론토 시편  (0) 2009.02.16
폐허를 담다   (0) 2009.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