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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바람따라(여행기)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2. 17. 22:11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나호열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청화

 

 

남쪽 향로에

반쯤 타던 향

홀연히 쓰러져 꺼진 날

 

북쪽 빈 법당

가득히 남은

향내음을 어찌하리

 

아침이슬에게도

저녁바람에게도

이제는 물을 수 없는

 

一惚不見의

안타깝고 안타까운

오오 그대의 행방

 

어디갔느뇨

오월 신록이

목놓아 부르도록

 

한 점 지리산을

깃처럼 떨구고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오늘 목탁소리

백리까지 울려

단풍이 드는 나무

 

그 아래 한 가인의

여섯 줄 끊어진

현금을 또 어찌하리

 

 

작년 가을도 쓸쓸했으나 올 가을은 더욱 쓸쓸하다. 가만히 나이를 셈해 보니 내 삶도 어느덧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투병생활을 시작했다는 친구의 소식을 접하다 보니 세상이 한층 어두워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나는 때깔고운 단풍보다 갈색으로 뒤덮힌 낙엽 숲길을 더 좋아한다.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발 밑에 떨구고 파란 하늘을 잘 마른 빨래처럼, 깃발처럼 걸어놓은 나무들 그 밑을 서성거리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든다.

 

 

                                                   보광사 일주문

  

토요일 아침 문득 길 하나를 잡는다. 길은 과거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간 땀 냄새, 손때가 묻어 있다. 끝나는 길은 없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무엇인가의 실체를 느끼는 것이다. 십 년 전에 걸어갔던 길을 오늘 다시 되짚는다. 그 무엇인가의 실체는 기억이고 그 물리적 생체반응이 시간의 여과를 거치면서 추억이 된다. 追憶은 삶의 거름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추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되새김하고 반성하는 힘이 결여된 사람에게는 추억이 주는 기쁨이 없을 터이다.

 

장흥에서 기산, 광탄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수려한 경관 탓에 음식점과 카페 촌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이고 그만큼 왕래하는 사람들도 부질없이 많아졌지만 이맘 때 소령원과 보광사로 가는 발길은 번잡스럽지 않다. 10년 전 날씨가 차가워지는 초겨울 호젓하게 길을 떠날 수 있는 기쁨을 느끼던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소령원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이다.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 11월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태어나, 7세에 궁에 들어가 숙원(淑媛)·숙의(淑儀)·귀인을 거쳐 숙빈에 봉해지고, 1694년(숙종 20) 영조를 낳았다. 1718년 3월 49세로 죽어 서울 궁정동 칠궁 안에 사당을 짓고 그 묘호(廟號)를 육상(毓祥), 묘호(墓號)를 소령원이라 하여 묘비는 1744년 영조가 친히 썼다.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왕을 생산하였지만 천출, 후궁의 신분이었기에 죽어서도 그 신분을 땅에 묻은 셈이다. 어머니에 대한 영조의 지극정성은 소령원을 능으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었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소령원으로 가는 길목에 표지판은 없다. 의정부 쪽에서 출발하면 송추역 조금 지나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을 하여 계속 직진하여 기산 저수지에서 우회전하여 영장삼거리 못 미쳐 능촌교(아주 조그만 다리)을 넘어 마을을 지나야 한다. 소령원 옆에 유길원이 숲길 건너편에 있는데 두 군데 다 비공개이다. 일 년에 한 두 번 제사 땔르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닫고 있는데 마음씨 좋은 관리인 아저씨를 만나면 눈동냥을 할 수 있겠다. 두 원 사이 전나무 숲길 끄트머리에 음식점이 생겨 호젓한 맛은 많이 사라졌으나 이른 시간에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면 틀림없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다. 유길원 또한 소령원과 마찬가지로 영조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묘원이다. 정빈 이씨는 이준철李竣哲의 딸로서 1701년 영조의 후궁이 되었고 1719년 2월 15일 영조의 장자로 세자로 책봉되었디가 열 살에 세상을 떠난 후에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孝章世子를 낳았다. 그 뒤 병으로 1721년(경종 1) 11월 16일 28세에 짧은 생애를 마치고 죽어서 지금의 자리에 장사지냈다. 1725년 빈에 봉해졌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칠궁 안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보광사 대웅보전

 

 

 

 

  보광사 대웅보전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보광사는 영장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오,륙 분 남행을 하여 됫박고개를 오르기 직전에 다다를 수 있다. 구파발 쪽에서 오다보면 벽제를 지나 됫박고개라 불리는 덕파령을 넘어야 하는데 일설에 이르면 고개가 하도 높아 영조가 능행이 더디고 어려우므로 "더 파라!"고 하여 덕파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할 만큼 소령원과 보광사는 영조의 효심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보광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전란을 통하여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다가 영조 때 숙빈 최씨의 원찰로 자리잡아 오늘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영조의 효심의 행적은 대웅보전의 글씨와 어실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라고 하더라도 대웅보전의 판벽화를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각의 벽체는 흙이나 회를 바르는 것이 보통인데, 보광사 대웅보전의 벽체는 모두 판자를 끼워 구성한 판벽이다. 판벽은 회벽에 비해 내구성이 떨어져 그곳에 그려진 벽화들의 수명이 오래가지 않는다. 보광사 대웅보전 판벽화는 짧은 내구성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벽화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판벽화는 동측 면에 위태천도. 기사문수동자도.금강역사도 등 3점, 북측 면에 용선인접도.괴석도.대호도.노송도.연화화생도 등 5점, 서측 면에 관음도.기상동자도 등 2점을 포함해 모두 10점이 남아있다. 특히 사람이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연화 화생도를 바라보노라면 희노애락이 한 순간의 바람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키도 한다. 대웅보전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만세루도 감상의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연화 화생도

 

 

 

사찰에서의 樓는 밑에는 통행의 용도로 윗층은 강당과 집회의 장소로 이용되었지만 사찰의 형편에 따라 일층을 막아 승방이나 다른 용도로 쓰임새를 바꾸기도 하는데 보광사 만세루가 바로 그 경우이다. 만세루 마루에 매달린 목어를 바라다보면 생각이 사라진다. 첩첨한 전각 뒤로 1980년대에 조성된 남북통일 기원 대불이 있다. 최대, 최고를 향한 우리네 뿌리 깊은 심성을 어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산 속에 우뚝하게 솟은 모습은 약간은 거추장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만세루와 목어

 

 

 

 

                                                        만세루 전경

 

 

 

 

  

예전에는 널찍하게 터 잡은 주차장과 막 공사를 시작한 일주문을 바로 지나면 왼쪽 나지막한 언덕에 비석이 보였다. 戀友之石이라고 한자로 쓰여진 글씨가 큼직하여 촌스런 느낌마저드는데 유심히 보니 그 밑에 시가 적혀져 있다.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는 먼저 세상을 떠난 도반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목 놓아 부른 시이다. 哀別離苦는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한결 성숙한 경지로 나아갈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호르륵 날아간 산새여」는 글 짓는 솜씨로 보아 시력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저자인 청화는 염불선을 주창하고 1924년 2월 14일에 태어나 2003년 11월 12일에 입적한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아니라 조계종 교육원장을 역임한 1944년에 태어난 청화스님이 맞을 것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활 속의 불교를 설파한 청화대종사가 2001년 5월, 성륜사 금강선원애서 행한 하안거 결제법어 몇 구절을 되살려 본다.

 

행복도 참 쉬운 것입니다. 원래로 행복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가 행복하기 위해서 금생에 나와서 우리가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정말로 참다웁게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인생고를 느끼면서 살아가는데, 다행히도 부처님 법 만나서 걸음걸음 지금 부처님한테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은 우리가 삼매에 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그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염불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반 세속적인 명상같은 것은, 그때 그때 머리가 좋아지고 몸이 날씬하고 예뻐지기 위해서 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유위법이라, 세간적인 중생들이 생각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고, 이것은 해탈의 공부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성불 해탈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재가불자들께서는 비록 선방에서 공부하는 못하시더라도, 자기 집에서나마 염불 공부를 지속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나옵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무실때도 역시 염불하다가 주무시고 말입니다.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못하더라도, 공부를 하시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면 잠든 가운데서도 공부가 됩니다. 또는 잠든 가운데 또 다른 망상을 했다가도, 일어나자마자 그냥 마음을 추스려서 또 염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어가면 나중에는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됩니다. 그때는 바람 불면 바람 소리도 염불하고, 또 시냇불이 흘러가면 시냇물 소리도 염불하고, 그러다가 나중엔 부처님 광명이 눈앞에 훤히 비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덩치만 큰 대불을 외면하니 바로 옆에 도솔암 가는 길이다. 늦은 가을날 발자국 소리를 염불 삼아 고령산의 다른 이름인 앵무봉(622미터) 바로 밑까지 올라가 보라. 수북하게 쌓인 갈잎을 밟을 때 마다 소리가 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릎도 저리고 가슴도 쿵쾅거릴 것이다. 도솔은 평화의 세계, 싸움이 없고 미움이 없는 세계, 이정표는 가팔라지는 산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이 도솔암으로 가는 길이다. 산마루턱 도솔암에는 풍채 당당한 처사가 있다. 맑은 약수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저만큼 도솔암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그리워할 친구 하나 없이, 자신의 몸에 달았던 장식들을 하나씩 털어내며 그것들을 발길로 깨트리며 오는 사람이 있다. 청화와 그의 친구, 숙빈 최씨 그리고 내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있다. 호르륵 산새가 혼자 고령산을 넘어가고 있다.

 

   

                                  연우지석 전경

 

 

                                                  대웅보전 판벽화

 

                                                 대웅보전 판벽화

 

 

                                                   대웅보전 판벽화

 

 

 

                          시 「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비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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