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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17. 12:51

물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강인한 
    
 
    "나를 물로 보느냐?" 라고 묻는 말에서 물은 만만한 것을 뜻한다. 또 만만한 존재에게 잔뜩 덤터기 씌우는 것을 흔히 '물 먹인다'고 한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쟁점의 문제에 대하여 회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엉뚱한 문제를 부각시켜 사람들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게 하는 '물타기' 수법이란 것도 있는 모양이다.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규정한 파스칼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동원될 필요도 없이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접시 물에도 빠져죽는다는 말이 있거니와 물은 또 사람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물 흐르는 방향은 순리이다. 그래서 물이 흘러가는 것을 순리와 도덕적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법(水+去=法)이라는 말도 생겼을 것 같다.

 

  # 1 물로 보는 사람들
 

 

  지난 해 이른봄 정국은 온통 대통령 탄핵으로 벌집을 쑤신 듯했다. 다수의 힘으로 야당 연합 세력이 이제 막 임기 1년이 된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탄핵안을 국회에 발의하고, 거룩한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다수결로 급기야 탄핵을 가결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도 그 역사적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중국음식점에서 맵싸한 사천자장면을 먹으면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았다. 별로 선량하지 않은 선량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감격하기도 하고, 의사봉을 엄격하게 두드린 의장은 "대한민국 역사는 전진해야 합니다."고 아래쪽에서 대성통곡하는 소수의 여당 의원들을 흘겨보며 못박아 말했다.
  그런데 대다수 민심을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 날 행해진 여론조사의 결과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힘으로 밀어붙인 제1, 2, 3 야당에 대한 지지도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너흰 아니야."라는 노래가 광화문 일대의 촛불 집회에서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 넘칠 무렵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제2 야당이 중진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결국 민심을 오도하고 편파적인 방송을 내보낸 방송국에 원인이 있다고 결론을 모은 그들은 당대표를 앞세워 방송국을 찾아갔다. 그들이 M 방송국을 들러 다시 K 방송국을 방문한 건 일과가 끝나고도 한참 뒤인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국영방송이 그렇게 편파적인 보도를 할 수가 있느냐 말이야." 격앙된 당대표의 말을 듣던 카메라 뒤쪽의 한 사람이 말대답을 하였다. "국영방송이라뇨? K 방송이 왜 국영방송이오?" 공영방송이라고 해야 할 걸 그만 실수했다. 그분은 그냥 벙벙한 표정이었다. 곁에서 보다못한 부대변인이 나섰다. "M 방송국에 갔더니 거기서는 보도국장이 직접 나와서 영접해 주시고 그랬는데…." 그는 말을 잠깐 끊고 손목시계를 보고 나더니 "지금 우리가 여기 온 지 십이 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물 한 잔이 없습니다." 당대표를 비롯한 중진 의원들에 대해 푸대접이 심하다는 얘기였다. 
  다음날 아침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에는 K 방송국의 전경이 합성사진으로 올라와 있었다. 방송국 건물 중앙에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펼쳐진 플래카드가 간밤에 찾아온 부대변인의 마지막 말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 물은 셀프 ―

 

 

  # 2 물먹는 사람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긴요한 건 식량 못지 않은 물이다. 혹시 물 안 마시고 술로 대신해도 된다는 사람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물은 생명에게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오래 전 삼풍백화점이 대낮에 거짓말처럼 무너지고 더 이상 생존자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열이틀 만이던가 그 무너진 구조물 밑에서 최명석이라는 청년이 기적같이 살아 나왔다. 그가 살 수 있었던 건 캄캄한 시멘트 바닥의 물을 움켜 마실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물 대신 맥주를 마셔도 갈증을 가시게 할 수는 없고, 사이다나 우유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성분이 다른 술을 향료와 함께 섞는 것을 칵테일이라 한다. 이를테면 소주에 콜라를 섞어 마시기도 하고, 그러면 '소콜'이라고 부르는 술이 되는데 그것도 칵테일인 셈이다. 맥주 글라스에 소주 한 잔 퐁당 섞어 마시는 걸 한국형 폭탄주라고도 한다. 우유와 사이다를 섞은 음료수도 괜찮고, 콜라와 사이다를 섞은 것도 맛이 괜찮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우유와 콜라를 섞고 거기에 다시 사이다를 섞어 마셔본 적이 있다. 웬걸, 그 맛이란 슴슴하고 껄쩍지근한 것이 영락없는 설거지물 그것이었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수돗물을 안 마신다. 부식된 수도관의 녹물을 걱정해서다. 으레 생수라는 걸 사다 마시는 게 보통이다. 설악산 생수, 제주도 생수도 슈퍼에 있다. 옛날엔 동네 우물에 가서 물동이에 한가득 물을 길어 오는 일은 여인네 몫이었다. 그래서 평범한 갑남을녀를 흔히 초동급부(樵童汲婦)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긷는 아낙, 풀 베는 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승용차를 운전하는 남편들이 알 만한 곳에 가서 생수를 물통에 담아 차에 싣는 일을 흔히 본다. 식당에서 내놓는 생수라는 걸 마셔야 할 때는 왠지 미덥지 않은 마음이 든다.
  수돗물을 정수기로 걸러 마시는 가정도 있고, 더 좋은 생수를 고가로 사 마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집은 그저 수돗물에 볶은 보리 알갱이를 넣고 푹 끓여 마신다. 볶은 옥수수 알갱이를 넣을 때도 있다. 어쨌든 끓여 마시는 물은 중금속 오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내로라 하는 부호들만 모여 사는 동네가 서울에 있다. 느닷없이 로또복권에 일등 당첨된 사람이 숨어살기도 하는 타워팰리스라는 아파트 동네다. 그 사람들이 마시는 물은 물론 수돗물을 끓인 식수가 아니다. 그게 한 번 밝혀진 적이 있었다. 천연 빙산수라던가, 아쿠아마린 심해수라던가 아무튼 깊고 깊은 바닷속의 천연 생수라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장삿속에 놀아난 우습지도 않은 생수라는 거였다. 봉이 김선달보다 머리 좋은 장사꾼들이 지하수에다가 적당히 소금을 설설 풀고 물통의 몸뚱이에 빙산수인지, 심해수인지 그럴싸한 상표를 만들어 붙인 것이었다고 하니 이건 또 얼마나 희한한 칵테일인가.   

 

 

    # 3 물이 무서운 사람
  비가 오지 않는 마른 장마가 지루하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시인 P 선생은 객지에 나와 살면서 같은 고향의 S 선배 시인을 평소에도 존경하며 늘 집안의 장형처럼 모시는 게 스스로도 싫지 않았다. 마침 고향의 아는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 S 선배를 찾아갔다.
  "선생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아무개 씨가 어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던데요." 한참 꿈을 꾸는 것처럼 먼 데 시선을 주던 S 선생께서는 한숨을 쉬듯 나직하게 말했다.  "인생이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거여."
  고인의 부인이 돌아가시고 미처 두 달이 안 되어서였다. 아내가 죽고 곧바로 뒤를 이어 그 남편이 따라갔으니 두 사람은 정녕 천정 배필이라고 해야 할는지. P 선생은 한 시간 남짓 고향을 향해 차를 달렸다. 옆 자리에 존경하는 선배 시인을 태우고 가느니만큼 한결 심심치 않아서 좋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흐린 날씨였다. 읍내의 제법 번화한 거리를 지나 고인이 살던 마을로 접어들자 갑자기 차 유리창에 후두둑 비가 듣기 시작했다. 마을 가까운 산모롱이를 돌아드는데 밭두둑에 무성한 호박잎들이 빗방울에 키들키들 간지럼 타는 듯 너울거렸다.
  좁은 마당에는 큼직한 차일이 쳐졌고, 멍석 위에는 마을 사람인 듯싶은 화투꾼들이 대여섯 자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빈소에 가서 분향을 하고 물러나와 차일 밑으로 들어섰다. 상가에는 조문객들보다 고인의 일가친척들이 더 많았다. S 선배가 술잔을 비우고 P 선생 앞에 놓아준다. P 선생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하였다. 운전을 해야 하니 참는 것을 양해해 주시라는 말에 S 선배는 그럼 그 몫을 대신 마셔주겠노라면서 석 잔을 마시고 홍어회를 집는다. 한 무리 문상객들이 찾아들 때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발이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마을의 비포장도로가 끝나가는 어름에서 갑자기 차가 멈칫하고 시동이 꺼져버렸다. 십 년 넘은 고물 차를 싼 맛에 산 게 이 모양이라고 P 선생은 혼자 투덜거리며 다시 키를 돌렸다. 시동이 걸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난데없는 고랑이 생긴 것이었고, 거기에서 차가 딱 멈춘 것이었다. 찰진 진흙 바탕에 빠진 차바퀴는 제 자리에서 용쓰듯 헛돌고 또 헛돌고는 그만이었다. 하는 수 없이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왔다. 부러진 나뭇가지며 삭정이를 찾아다가 바퀴 밑을 비집고 어찌어찌해서 겨우 차기 빠져나오는데 삼십 분이나 걸렸다. 우산을 들었지만 끙끙거리며 혼자 곤욕을 치르느라 위통이 흠뻑 다 젖어버렸다. 그 동안 S 선배는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일은 운전기사가 다 알아서 처리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자세였다. 차가 포장도로로 나서자 그는 위로해주듯 점잖은 한 마디를 하였다.
  "물이란 무서운 거여." 

  소나기가 스쳐간 강둑 건너편 산의 어깨에는 햇빛이 뭉게구름 사이의 보랏빛 그늘을 벗겨내고 있다. 햇살이 명주실처럼 강물 위에 반짝거린다. 조는 듯 오리 두 마리가 강 위에 버들잎처럼 떠 있다.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라고 사람들은 바라본다. 그러나 오리가 물이 무서워서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죽을둥살둥 수면 아래서 바지런히 발을 놀려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결코 물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