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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힘이 세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2. 28. 15:43

시는 힘이 세다
                      김정열

1980년 5월 나는 군 영창에 있었다. 수감자의 신분이 아니라 '근무자' 라 불리는 영창보초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당시 나는 남쪽 지방에 있는 예비사단의 헌병대에서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반 행정병이 아니라 헌병대 안에서 사단 부대 및 예하 부대 내에서 사고를 줄이기 위해 사전에 예방 및 점검을 하는 방범업무 담당 행정병이었다. 

80년 5월에 광주에서의 일을 여러 분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나는 헌병 교육을 받은 행정병이 아니라 그냥 일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군 영창에서 근무를 할 수는 없게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헌병들은 광주에서의 사태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진강 초소나 시내 곳곳으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대에 남은 행정병들이 영창근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 근무자들은 2시간씩 영창근무를 하고 다른 사람과 교대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대할 사람이 별로 없어 남은 행정병들은 그보다 긴 시간을 근무했다. 나는 보통 6-8시간 길게는 12-18 시간씩 근무를 하였다. 그 긴 시간 영창 안에서 보초근무를 하며 나름대로 세상을 많이 알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사단 내 영창은 주로 군내 재판을 받기 전의 미결수들의 일시 대기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오랜 시간 근무를 하니 나도 군 수감자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수감자는 아니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거의 하루를 보내는 것은 수감자와 다름이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수감자와 보초요원, 고용인과 피고용인, 치자와 피치자 등 세상이 어떤 기준으로 구분해놓은 경계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누가 죄인이며 누가 심판자인가? 

그리고 보통 30평 정도의 공간에 보통 50 여명의 수감자들을 보며 그들이 너무나 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랐다. 일반적으로 책에서 보거나 이야기로 듣는 바로는 죄수들은 보기에 인상이 험악하거나 성격이 이상한 사람들이라야 하는데 지방의 군부대에 근무하는 병사(주로 방위병)들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줍어하고 대부분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착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의 일시적 순간에 대한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었겠지만 그 이후 나는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으면 착해진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기독교의 원죄의식을 깊이 믿게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고 돈이 있거나 빽이 있으면 군 영창에도 오지 않는다는 '무전유죄' 의 현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이 기간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근무자들은 그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책을 들고 틈틈이 보기도 한다. 나는 초보 보초라서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책을 들고 들어가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당시 헌병대 내무반에는 위문품으로 들어온 문고판 책들이 구석 서가 여기저기에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시집들도 몇 권 있었다. 

소설 등 다른 책들은 집중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얼른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비해 시집은 그런 곳에서 보기에 적당한 것이었다. 책을 볼 때는 수감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지만 급할 때는 책을 들고 수감자들 앞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일부 수감자들이 "근무자님! 무슨 책 봅니까! 보시고 우리에게도 이야기 좀 해 주소!" 라고 하였다. 

나는 근무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수감자들을 경계하면서 그들에게 시를 읽어주기로 하였다. 보통 한두 달 동안 영창에 있다 죄가 가벼우면 석방을 하지만 절반 이상은 민간 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되어 있는 수감자들을 생각하니 그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대부분 처음 이런 곳을 오는 사람들이라 그들은 보기에도 무척 답답해하였다. 

처음 시를 읽어주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시를 읽어주니 영창이 너무나 조용하였다. 자주 수감자들에게 말을 삼가고 조용해야 한다는 수칙을 상기시키지만 그들은 근무자가 보이지 않으면 늘 옆 사람과 대화를 하여 영창은 늘 시끄럽다. 사실 대화도 못하면 어떻게 지내겠는가! 읽어주는 시를 듣는 수감자들은 대부분 눈을 감았다. 경건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시를 읽어주면서 수감자들도 시를 외우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종이와 볼펜을 돌리고 각 방마다 대표 수감자들에게 시를 큰 소리로 읽어주고 그것을 적도록 하였다. 그들은 반색을 하며 진지하게 싯귀들을 받아 적고 있었다. 30평 남짓의 영창은 그 안에 다시 7개의 작은 방으로 나누어졌다. 큰방도 있고 작은 방도 있어 그 안에 5-16 명씩 앉아있고 그래서 밤에는 몸으로 옆으로 눕는 '칼잠'을 자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먼저 외우도록 한 시는 잘 알려진 청마 유치환의 '깃발'이었다. 각 방의 대표 수감자가 적은 시를 각 방의 사람 수만큼 옮겨 적어 수감자들은 종이를 들고 중얼중얼 시를 외우고 있었다. 살벌하고 딱딱한 영창이 갑자기 아늑한 '詩敎室' 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먼저 외운 사람들은 일어 세워 한번 외워 보라고 하니 각 방 마다 다투어 서로 자원하여 시를 외우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며칠동안 이육사의 '청포도' 와 김춘수의 '꽃' 과 당시 젊은 층에 인기를 끌었던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를 암송시켰다. 수감자들은 내가 근무에 들어가면 시키지 않아도 자랑하려는 듯 일어서서 서로 시를 외우려고 하였다. 수감자의 이름을 부르고 시 제목을 말하면 그들은 일사천리로 시를 낭송하였다. 몇 명을 빼고 거의가 가르쳐준 시를 암송할 수 있었다. 그들이 시를 외는 순간 그들은 나와 친구가 되었다. 마치 오래 전에 만난 것처럼 친한. 

며칠 후 그날은 군 법원에서 재판이 있는 하루 전이었는데 다음 날 재판결과에 따라 이감이나 석방이 결정되어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늦게까지 근무를 하고 취침점호를 취하고 있었다. 그때 수감자 한명이 "근무자님! 시 한번 외워도 됩니까?"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죄가 약간 무거워 민간 교도소로 갈 가능성이 많은 처지에 있었다. 나는 즉시 허락했다. 그것이 그들과 나의 일종의 이별의식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김춘수의 '꽃' 중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를 외우다가 목이 메었다. 그러더니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저녁 각 방 한사람씩 시를 낭송하게 하였다. 어느 방인지 몰라도 누군가는 유치환의 '깃발' 중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 누구인가?"를 외우며 엉엉 울어 버렸다. 

또 누군가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도 슬픔도 버린다' 는 정희성의 시를 시작해놓고 감정이 너무 격해서인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육사의 '청포도'를 차분하게 읊조리기도 했다. 사실 나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들이 시를 낭송하는 것을 들으며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그래서 수감자들이 볼 수 없도록 쓰고 있던 철모를 얼굴 앞으로 당겼다. 

사람이 살면서 크게 잊혀지지 않는 날이 몇번 있지만 나는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무엇보다 시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키는 것과 절박할 때 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능과도 같은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그 수감자들을 일부는 그 다음 날 석방되기도 하고 일부는 민간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그후 5월 말 광주사태가 진정되면서 헌병들이 부대로 복귀하였고 일시적으로 운영되던 나의 시교실은 문을 닫게 되었다. 

나는 그후 제대를 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정치에 입문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 후 전문적으로 시를 쓰지 않았지만 항상 시를 생각하였다. 사실 내가 만난 세상의 많은 것들 중 <시가 가장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달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시를 항상 염두에 두다가 마침 미국에서 그동안 써놓았던 시를 정리하여 용기를 내어 <문예운동>에 응모하였는데 당선이 되었다. 군 영창에서 시교실이 있은 지 2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특별히 자랑할만한 시를 잘 짓는 재주는 없지만 이 세상에 나와 내 주변을 보며 느낀 것을 성실하고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여 년 전 군 영창에서 만난 그 친구들의 얼굴들이 가끔 생각난다. 꽃이 되고 싶다고 하던 그들은 '어떤 꽃'으로 피어나고 있으며 또 '어떤 깃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 순간의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을 기대하지 않지만 설령 잊었다해도 그 시 구절들이 그들의 인생에 있어 작은 물결의 흔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확신한다. 나에게처럼.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시는 정말 힘이 세다" 고.



 


 

위의 글은 미국 워싱턴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는 김정열 시인이 내게 보내온 것이다. 김정열 시인은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습작활동을 하여 뒤늦게 시인으로 등단 하였으며,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주고 받은 서신의 일부이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읽고 싶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