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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지리산을 생각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23. 10:48

다시 지리산을 생각한다.
              ― 큰 산, 어머니의 산, 지리산

                                                   복 효 근
 
  大鵬의 날개 위에서

  매년 12월 31일 자정을 전후하여 지리산 아래 백무동의 하동바위 길이나 중산리의 법계사 길은 손전등의 행렬이 마치 긴 뱀이 꿈틀대듯 밤을 도와 정상인 천왕봉을 향하여 이어진다. 천왕봉에서 새해 첫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이 때쯤이면 천왕봉 길은 눈이 쌓여있거나 눈보라가 치는 날씨일 수도 있지만 이 행렬은 해마다 이어진다. 야간 산행 다섯 시간 정도, 야간 등반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미리 제석봉 아래 장터목 산장(대피소)에서 1박을 하며 기다리기도 한다. 숙박공간이 한정된 산장에 들지 못해 주위의 처마와 바위틈을 의지하여 침낭 속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도 볼 수 있다. 뺨이 얼얼하고 입술을 얼어붙게 하는 산 정상의 체감 온도는 영하 20℃ 정도. 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멀리 서울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 부산에서 진주에서 모여든다.
  동쪽 하늘에 붉은 기운이 비쳐들 무렵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의 숨소리도 들릴 듯 사뭇 긴장감마저 감돈다. 종교의식의 한 순간처럼 경건함 속에서 이윽고 버얼건 햇덩이가 그 광명의 빛을 어둠 속으로 내뿜게 되면 사람들은 환호를 지르며 가슴에 품었던 소망을 외쳐대기도 한다. 완전히 해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데 길어야 2분 남짓. 이 순간을 위하여 그 힘든 겨울밤 해발 1915미터 천왕봉을 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마다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눈보라가 사납거나 구름이 낀 날씨일 수도 있고 산 아래와는 달리 날씨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三代가 積功을 해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의 일출. 그 일출도 일출이지만 모여드는 사람들만으로도 장관을 이룬다. 이 날 천왕봉 아침해를 맞이하는 사람은 줄잡아 2∼3천명, 해는 지리산 천왕봉 1월1일에만 뜨는 것이 아닐진대,  무엇이 이들을 모여들게 하는 것일까? 왜 하필 지리산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관목 숲에 雪花가 만발하고, 죽어서도 의연한 기개로 곧추 서있는 고사목 사이로 한번 지리산 천왕봉의 아침해를 보라. 황홀하게 솟아오르는 해도 해이려니와,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저 산자락에 가뭇없이 파도치는 구름물결을 바라보면 대자연에 대한 경건함과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그 환희심을 말로써 표현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리라.
  전북, 전남, 경남 3개 道와 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 등 5개 郡에 걸쳐 자리잡아 단일한 산으로는 남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지리산은 지금 서있는 이 정상 천왕봉으로부터 서남단 노고단까지 약 35킬로미터. 정확한 거리가 측정되기 전에는 100리 길이라 했다. 높이로 말하면 한라산 다음으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1915미터, 해발 1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20개가 넘는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함양을 넘어 경호강 줄기를 따라 진주까지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리는 동안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이 모두 지리산이며 남원에서 서쪽으로 섬진강을 따라 하동까지 두 시간을 달리면서 왼편으로 보이는 산이 온통 지리산, 그 둘레만도 320킬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 이 산 정상에 서서 천하를 굽어보는 것만도 장쾌한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등넓이가 몇 천리에 이르는지 알 수 없다는 壯子의 鵬의 모습을 사람들은 저 지리산 자락을 굽어보며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大鵬의 날개 위에 올라서 대자연을 소요유하며 호연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래서 지리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증명하듯 정상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에서 발원되다."라는 문구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서 그 정기가 흘러가는 큰 줄기만을 따라 굵은 선을 그어보면 이름하여 백두대간, 그 끄트머리에서 농울차게 꿈들대며 우뚝 서는 곳이 바로 이 지리산, 그래서 얻은 이름이 頭流山, 중국적인 지리관에 의하면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불린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신선이 산다는 이 방장산에 삼천동자를 파견했다고 한다. 그런 산이 어찌 예사로우랴? 예사롭지 않은 산이라서 智異山. 예사롭지 않은 만큼 지리산을 읽으면 우리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이 산은 세계의 유명한 산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도저한 높이의 산이거나 전문 산악인들만의 정복을 허락하는 험준한 악산은 아니다. 높은 만큼 골도 깊고 우리 나라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넓어 그 주름진 골짜기마다에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배어 있으며, 상처받은 생령들을 그 품에 안아들여 문화로 꽃피워낸 흔적이 도처에 깔려있다. 온유하면서도 당찬 우리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산이다.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셔지는 분들이 모두 여인네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늘 새롭고 아름다운 산

  위에서 말한 대로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은 그 황홀한 신비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산이 크고 높은 만큼 아름답고 신비로운 절경이 곳곳에 숨어있다. 지금은 남원 쪽 산내면 달궁에서 구례 쪽 천은사까지 그리고 남원의 운봉에서 산내면 달궁까지 종단도로가 생겨 자동차로 쉽게 지리산을 횡단하며 그 아름다움을 일별할 수 있다. 맑은 날에는 이 종단도로의 중간쯤에서 노고단을 오르면 이 노고단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또한 정령치에서 한 시간 거리의 만복대에서는 전남의 조계산, 무등산, 전북의 회문산, 성수산, 장안산, 덕유산, 경남의 백운산, 오봉산, 가야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 발로 밟아가며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와 흐르는 계곡물에서 느끼는 우리 산하의 숨결만 하랴. 우선 지리산을 온전히 느끼는 방법으로는 종주등반을 꼽을 수 있다. 주로 전남의 구례 화엄사계곡을 출발하여 노고단에 이르러 주능선을 타고 천왕봉을 올라 하산하는 방법, 혹은 그 반대 방향의 코스를 종주등반으로 말한다. 천왕봉에서 연장하여 중봉 써리봉을 지나 대원사 쪽까지를 종주코스로 말하기도 한다. 대개 2박 3일 혹은 3박 4일을 잡는다.
  화엄사 계곡에서 출발하면 화엄사의 웅장한 경개를 관람할 수 있으며, 새벽 노고단에 이르면 그 유명한 운해를 볼 수 있다. 햇솜을 펼쳐놓은 듯 산 봉우리만 섬처럼 남기고 온 세상이 구름바다에 잠긴 모습은 이 땅에 태어난 기쁨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노고단에서 천왕봉 쪽을 바라보면 겹겹 지리산의 전모와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능선에 일단 오르면 그리 험한 길은 없어 더러 야간에도 등반을 강행하는 사람도 있다. 천왕봉까지 이르는 약 35 킬로미터 사이에는 임걸령, 총각샘, 연하천 등지에 물이 있고 야영할 수 있는 곳도 많다. 가는 길목마다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풀꽃들을 만나고 희귀한 수목을 대할 수 있다. 이처럼 산의 규모가 크고 높은 만큼 지리산에 분포하는 동식물은 학계의 지속적인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환경부는 1997 11월23일 현재 지리산엔 아직도 반달가슴곰이 서식하고 있다고 공식 확인한 바 있다. 또한 산 위에서 바라보는 저 아래 속세의 올망졸망한 모습도 새삼스럽다. 
  이 종주코스에서 철만 잘 맞춘다면 세석평전에 이르러서는 늦은 봄 철쭉의 사태에 휩싸이는 황홀함을 맛볼 수 있다. 꽃의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남원 운봉의 바래봉 철쭉과 함께 규모나 그 아름다움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혹 벽소령에 이르러서 푸르고 시린 달을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생애에 몇 번 다가오지 않는 기쁨이 될 것이다. 달 속에 광한전이 있는지 없는지 어깨 높이에서 달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연하천 산장에서 새벽을 맞이한다면 안개 속의 기암절벽과 고사목 사이로 홀연 신선이 나타날 것 같은 신비경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주능선에서 살짝 비켜서 있지만 반야봉에서 보는 낙조 또한 장관이다. 
  종주코스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피아골의 단풍과 쌍계사 위 쪽의 불일폭포, 그리고 천왕봉에서 벽송사 쪽으로 내려오는 칠선계곡의 원시림의 아름다움은 지리산이 그 품안에 감추고 있는 비경들이다. 위에서 소개한 아름다운 지리산의 모습은 흔히들 말하는 지리산의 10경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에 하나 빠진 것이 산을 서쪽으로 에두르고 지리산의 발부리를 적시며 흘러가는 섬진강의 맑은 물줄기이다.
  주로 종주코스와 관련한 절승지를 소개했지만 지리산은 그 품에 50여개의 등산로와 수많은 심마니 길이 있다. 여기에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산이 지리산이고 늘 새롭게 다가오며 늘 새로운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 지리산이기 때문이다. 종주등반 대신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넘어가는 등반을 즐기는 등산애호가들도 무수히 많다. 어느 계곡이라 할 것 없이 모든 계곡이 빼어나고 시리도록 맑은 물이 사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물됨을 살피는 데 있어서도 그 외모만을 가지고 말할 수 없듯이 지리산을 그 산세나 규모 혹은 고색창연한 사찰 몇 개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산의 봉우리마다 그 깊고 많은 골짜기마다에는 피와 땀과 눈물의 인간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산, 호국의 산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비경을 갖고 있는 이 지리산이 한때 피로 물들었던 비극의 산이기도 하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멀리는 1592년 패배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이 산으로 들어와 최후를 마쳤고, 가깝게는 6.25를 전후하여 군경과 빨치산 2만여명의 젊은 넋이 숨져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1948년 여순반란의 주동자 김지회가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이 산에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지리산의 피비린 역사는 전개된다. 이듬해 4월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에 의해 뱀사골 반선마을에서 유격대 지도부가 괴멸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토벌은 끝나는 듯 하였지만, 조선노동당이 창당되면서 이현상을 병단장으로 하는 지리산 유격대의 활동은 다시 본격화하게 된다. 이들은 거창경찰서 점거, 전라선 군용열차 습격 등 수많은 유격활동을 벌이다가 남원에 설치된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대' 지휘 총본부에 의해 거의 괴멸 직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6.25가 터지자 많은 인민군 패잔병과 부역자들이 가세해 이현상의 남부군의 유격활동은 다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1951년 11월 '백야전 사령부'가 남원에 설치되면서 1기, 2기, 3기, 4기에 이르는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좀처럼 빨치산의 활동이 수그러들지 않자 1953년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사령부'가 설치되어 이해 9월 18일 남부군 총책 이현상을 빗점골에서 사살하기까지 치열한 토벌작전이 펼쳐졌다. 이후로도 남아있는 빨치산 대원들이 완전 소탕되기까지 수없는 군경합동 작전이 전개되어 1955년에 이르러서야 정부는 완전소탕을 발표하게 된다.
  이렇게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 지리산 인근은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이라 하여 두 개의 이념이 지배하는 속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되었다. 즉 밤엔 빨치산들에게 원치 않는 부역을 해야만 했고 낮엔 국군들에게 '통비분자'라고 하여 시달림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시달림 정도가 아니었다. 국군은 통비분자를 색출하고 빨치산을 고립시킨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양민들을 무차별 살상하여 아직도 지리산 근방의 많은 산마을에서는 국군들에게 이유 모를 죽임을 당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아직도 이 지역엔 그 때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러 남아있다. 그리고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뱀사골 등의 외진 등산로에서 삭은 탄피를 간간히 발견할 수 있었으며 만복대 근방의 계곡에서는 빨치산 환자들이 은거했던 비밀 아지트로 보이는 토굴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지리산은 좌우 이념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곳의 하나이며, 그 때 무고하게 죽어간 양민들의 보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남북통일이 되기까지 그 비극은 미완으로 남아있다고 하겠다. 민족의 이 비극을 교훈으로 새기기 위하여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는 전적기념관이 세워져 관련된 많은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이념적 갈등, 수난과 시련의 역사를 생각하며, 그래서 시인 김지하는 지리산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샆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김지하 「지리산」에서  

  그러나 지리산이 동족간 이념대립의 비극적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이민족에 대한 저항과 호국정신이 찬란하게 발현되었던 자랑스러운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지리산이 민족의 성산이며 영산으로 여겨지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신라시대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셨으며,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도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천왕봉 정상엔 예전에 이러한 지리산신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성모상이 있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상이라고도 하고 옥황상제의 딸 마고할미의 상이라고도 하는 이 석조물은 미신의 상징이라 하여 많은 수난을 겪은 후에 지금은 중산리 계곡의 천왕사에 있다. 이 조형물의 주인공이 누구이든 지리산을 신성시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성소로 여겼음은 분명하다. 국태민안을 기원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너나없이 목숨을 던져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는 호국정신의 흔적이 이 곳 지리산엔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전남 구례 석주관의 '칠의사묘'를 들 수 있다. 임진왜란때 호남을 장악하지 못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전라도를 치게 된다. 그 중 한 무리는 진주를 거쳐 지리산 남서쪽 구례의 석주관으로 쳐들어온다. 이때 구례출신 선비 왕득인이 의병을 모아 싸우다 전사하자 이정익, 왕의성, 양응록, 한홍성, 고정철, 오종 등 의혈선비들이 재차 의병을 조직하여 왜구와 싸우다 역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가면 이들 七義士의 묘가 그들이 지켜낸 지리산 자락에 나란히 모셔져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리산이 서북쪽으로 제 키를 낮추고 옥처럼 맑은 물을 흘려적시며 제 치마자락을 펼쳐놓은 곳에 남원평원이 있다. 전라도에 진입한 왜구 중 5만 6천명은 이 남원성을 공략하는데 왜구는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에 맞서 남원성의 6천여주민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이 마지막 하나까지 의혈항전하다가 장렬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정규군도 아닌 일반 민중들이 대다수였던 이 전투는 내 고장 내 향토를 이민족의 더러운 발굽 아래 두지 않겠다는 고귀한 호국정신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 고귀한 정신을 받들어 순절한 그 분들을 모셔 지리산 서북 사면이 바라보이는 곳에 萬人義塚을 조성하였다.
  왜구들의 우리민족에 대한 침략의 역사는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남원에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지리산 여원치를 넘어가면 운봉고원이 나온다. 여기에는 황산대첩비지가 있는데, 고려말에 서천해안으로 침투한 왜구가 남하하면서 이 곳 지리산 부근에 진주해 있었다. 이 곳에서 고려 장군 이성계는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 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웠으나 뒷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를 폭파해 버렸다. 일제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민망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에 비를 다시 세우고 그 조각난 파편을 역사의 거울로 모셔놓고 있다. 
   이러한 일본에 대한 감정의 뿌리는 훨씬 더 오래 전부터 풍수지리와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흔적을 이 지역 사찰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남원에서 지리산으로 좀더 깊숙히 접어들다보면 신라 구산선문의 최초의 가람으로, 아름다운 3층석탑과 목조탱화 등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실상사가 있다. 이 곳의 약사전에 봉안되어있는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은 우리 땅의 氣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누르기 위해 풍수비방에 따라 4천근의 철로 조성되어 좌대도 없이 맨땅에 모셔져 있다. 철불의 시선이 천왕봉과 일본의 후지산(富土山)과 일직선이 되도록 세워졌다고 한다. 또한 이 절의 보광전에 설치되어있는 범종에는 일본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그 곳을 두드려 일본으로 흘러가는 地氣를 교란한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사실 민족주의적인 풍수설에 바탕을 둔 것이긴 하지만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의 일단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조와 정절의 산 

  큰 산은 큰 사람을 키우는가.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느 학교 교가를 보아도 '00산의 정기'를 이어받았다고 노래하지 않은 예를 보기 어렵듯이 산은 그 정기로 뭇생명과 그 생명들의 정신을 길러내지 않나 싶다. 지리산은 그 산세나 규모만큼이나 세파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 높고 진중한 정신을 길러냈다. 
  산청쪽에서 지리산의 주봉 천왕봉을 향하여 중산리 쪽을 향하여 들어가다보면 선비의 고고한 지조를 지켜 지리산만큼이나 향기로운 이름 남명 조식 (1501∼1572)선생의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덕천서원, 산천재, 남명의 묘소가 바로 그 곳. 남명 선생은 퇴계에 비견될 만큼 도학이 높았으나 여러 차례 주어진 관직도 단호히 물리고 이 곳에 山天齋를 세워 오직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그의 훌륭함은 그가 복마전 같은 현실정치를 멀리하고 청렴한 삶으로 위정자에게 보이지 않는 사표가 되었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곽재우, 최영경, 정인홍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들은 뒷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활동에 나섰다. 그에게 배운 '知行一致'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한 제자들에 의해서도 그의 훌륭한 덕은 드러난다.
  남명 선생이 선비의 지조로써 지리산의 동쪽을 빛내고 있다면 그 서쪽에는 매천 황현 선생이 있었다. 천왕봉의 맞은 편 노고단에서 화엄사를 향해 내려가면 화엄사를 지척에 두고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에 매천사가 있다. 
  매천 황현 선생의 삶 또한 지조로 뭉쳐진 삶이었다. 과거에 응시했다가 가장 우수한 성적을 얻고도 지방출신이라는 이유로 2 등으로 물러나자 남아있는 시험에 불응하고 되돌아온 일, 뒷날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다시 응시하여 장원하였으나 어지러운 정치현실에 대한 저항의 뜻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일들은 그의 지조있는 삶을 대변해준다. 문란한 정치현실과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그의 저항과 비판의식은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이라는 책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知行一致'의 덕목을 죽음으로써 실천한 선비의 지조라고 하겠다. 선생은 1910년 일본에 의하여 나라가 강제로 합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에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고 하며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는 아편을 먹고 자결하게 된다. 지리산 한쪽 끝 노고단 아래 절조 있는 한 선비의 향기로운 삶과 죽음이 동시대는 물론 후손의 가슴에 늘 서늘한 매화향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구례 화엄사를 가다보면 입구 약 1킬로미터 지점 시비공원에는 매천의 절명시비가 있다.
  대쪽같은 선비의 지조 말고도 여염집 아녀자의 정절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도 설화로 남아있다. 『고려사』의 「樂誌」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가요인 「지리산가」에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지리산 아래 구례현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극진히 지키는 미모의 여인이 살았는데 백제왕이 아내로 맞이하려 하자 이 『지리산가』를 남기고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록 허구라고 하지만, 끝까지 정절을 지킨 춘향과 비천한 아녀자와의 하룻밤 어설픈 약속으로 생각지 않고 고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이도령의 이야기가 지리산 아래 남원을 배경으로 한 것도 예사롭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또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한문소설로 기록되는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는 어떠한가? 이 소설의 주인공 양생은 이미 죽은 처녀와 영혼으로써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그 처녀와의 약속을 지키고 끝내 그 처녀와의 사랑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지리산에 숨어버린다. 한 남자에 대해 여자가 정절을 지킨 예가 『춘향전』이라면, 한 여자에 대해 남자가 정절을 지킨 예가 「만복사저포기」아닐까? 지금은 남원 시가지를 막 벗어난 지점의 만복사지에 지리산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증명하듯 오층석탑만 외롭게 서있다.


  향기가 있는 산

  지리산에는 향기가 있다. 이른 봄 전남과 경남의 경계선 지리산 화개동천 계곡이 시리도록 맑은 눈녹이 물을 섬진강으로 흘려넣고 있을 때 화개동 십리 벚꽃길을 가보라. 온 계곡이 환하도록 핀 벚꽃을 보고 그저 습관적으로 일본의 무사혼을 떠올리진 말자. 본래 벚꽃의 원산은 한반도였다고도 하니까. 이 때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만 보자. 그 꽃 터널 가다보면 쌍계사가 나온다. 유서깊은 쌍계사 사찰도 사찰이지만 어디서 투명하고 은은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둘러보면 사방 산자락 곳곳에 푸른 차밭을 볼 수 있다.
  화개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에는 茶始倍地 기념비가 서있고  쌍계사 매표소 가까운 곳에도 '茶始倍追遠碑'가 있다.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져왔고, 문성왕 때 우리나라 범패 (불교음악)의 원조격인 진감선사가 중국유학을 마치고 차 씨앗을 가져와 이 부근에 차밭을 조성하고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후에 칠불암의 초의선사에 의하여 차는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의미에서 조명되고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로 자리매김되기에 이른다. 지금도 이 지역을 중심으로 傳統茶道의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도 지리산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 쌍계사에서 토끼봉 아래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면 범왕 마을이 나오고 그 위 해발 830미터 고지에는 칠불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칠불사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 이 곳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 깊은 곳이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일행이 가락국 수로왕 6 년에 배를 타고 와 불교를 전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허왕후는 아들 열과 딸 둘을 낳게 되는데, 아들 중 일곱은 허왕후의 오빠이자 아유타국의 승려인 보옥선사의 인도로 지리산 자락에 운상원을 짓고 승려가 된다. 이들은 모두 성불하게 되었는데 일곱왕자가 성불했다고 하여 칠불암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법흥왕 15년(528)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는 정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미  1800년 전에 이 지리산 자락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말이 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허왕후의 오빠 보옥선사가 '이크탈'이라는 현악기와 '분지'라는 피리를 연주하였다고 하는 대목인데 우리 국악의 연원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진감선사에 의하여 이 칠불사와 쌍계사 중심으로 불교 정통음곡인 '魚山之妙'라는 범패음곡이 꽃피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또 하나, 이 칠불사의 '亞' 字形의 방은 그 독특하고 과학적인 설계와 시공으로 1000여 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고치지 않았어도 한번 불을 지피면 석 달 열흘 따뜻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북쪽으로 삼도봉을 넘으면 남원의 운봉, 인월이 나온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운봉의 바래봉 철쭉은 세석평전의 철쭉과 함께 전국적으로 곱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철쭉 말고도 이 곳은 판소리의 발상지로 그리고 판소리 명창들의 탯자리로 더 알려진 고장이다.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송흥록이 이 곳 운봉의 비전마을 출신으로 그는 춘향전의 옥중가 중 귀곡성을 귀신에게 배웠고 그의 귀곡성은 귀신을 울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동생 송광록이, 명창 송만갑이, 명창 박초월이 모두 이 운봉 태생이라는 점은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곳이 바로 판소리 동편제의 요람이라는 것이다. 운봉에 가면 송흥록 생가터가 있다.
  고증에 의하면 판소리 흥보가가 지리산 어름에 있는 인월 성산리 흥부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춘향전이 또한 이 곳 남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이나, 혹은 가루지기 타령이 지리산 벽송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천왕봉 아래 백무동은 많은 무당이 살았던 곳이며 이들 무당의 서사무가에서 판소리가 출발하였다는 학설에 비추어보면, 이 지역이 판소리의 고향이라는 판단은 무리가 아니리라.
  큰 산 지리산은 이처럼 은은한 차향과 함께 귀로 듣는 향기까지 뿜어내고 있다. 이뿐이랴? 가슴으로 느끼는 문학의 향기는 어떤가? 가사가 전하지 않은 『지리산가』는 앞에서 언급하였고 지리산 남서쪽의 화개 마을은 김동리의 「역마」의 배경이다. 그 아래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시인묵객들의 시편들을 일일이 거론하기가 어렵다.
  지리산 골골이 그 품에 감춰두고 있는 불교사찰을 얘기한다고 해도 지면이 너무 좁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지 16년만에 들어선 화엄사와 연곡사는 그 만큼 오래된 古刹로 유서가 깊을 뿐 아니라 절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종교예술품들은지금도 여기를 찾는 이들에게 보배로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정감록에 푸른 학이 사는 이상향으로 묘사된 청학동이 지리산에 그 공간을 설정한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터이다. 지금은 관광지로 되어버린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러나 그 나름의 삶의 방식을 외곬로 고집해온 사람들의 향기를 여기서도 맡을 수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까닭으로 이 지리산에서 1월1일 새해를 맞으려 한다. 지리산은 정신의 산이며, 천왕봉에 새겨진 대로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되"기 때문이며 우리 역사와 문화의 시작과 진행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영원하구나 지리산이여
시방세계 울창한 어머니들 일어나
봄기운 휘몰아 산천초목 흔드니

그 바람 압록과 청천에 이르고 그 바람 대동과 두만에 이르고 그 바람 금강 일만 이천봉에 이르고 그 바람 묘향산과 구월산에 이르고 그 바람 북만주땅 요동벌에 이르고 그 바람 북방을 휩쓰는 곳에서 
우뚝우뚝 하구나 지리산이여
                   -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 7」에서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다. 이 산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간난의 역사를 그 세월의 갈피갈피에 새기고 있으며 그 아픔을 삭여 향기로 뿜어내는 큰 산이다. 
  지리산을 몇 번 다녀왔다고 지리산을 안다고 얘기할 수 없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산이 지리산이라고 한다. 지리산 바라보며 태어나 서른 여섯해 넘게 살았어도 그 큰산을 필자의 짧은 글재주로 그려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장엄국토의 한 끝자락에서 감히 그 숨결의 깊이를 헤아려 볼 뿐이다. 
  지리산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