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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시창작론

시적 대상의 관찰과 활용 기법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5. 14:28

시적 대상의 관찰과 활용 기법

 

나호열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 무엇에 대한' 생각이다. 말하자면 생각을 위한 재료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창작의 계기는 여러 경로를 가질 수 있을 터인데 첫째, 어떤 주제를 설정한 상태에서 그 주제를 잘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을 찾으려고 할 때이다. 이때 마주치는 대상은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장치로써 사용하게 된다.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은 창작자가 표현하려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사상 등을 다른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이를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을 뜻한다. , 개인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객관화하려는 창작기법이다. 두 번째, 의도하지 않았던 사물이나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 새로운 자각이나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창작 태도에 공통적으로 유념해야 할 사항은 사람을 포함한 사물과 자연현상, 사건에 대한 치밀하고 섬세한 관찰력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이른바 피상적이고 상식적인 인식은 창작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조태일이 구체적 인식이야말로 시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라고 지적하면서 "대상의 외형적 관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훤하게 꿰뚫어보는 통찰에 의해서 생겨난다." 고 한 것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관찰력의 배양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다독(多讀)이 필수적이다. 만일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면 최소한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만큼은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산과 들에는 수많은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자리 잡고 있다. 나무와 풀의 이름을 모르고 생태를 모른다면 그것들은 '나무들', 풀들' 또는 잡초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잡초일지 몰라도 세상에 잡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니 그것들의 세세한 이름과 모양새를 알고 습성까지 알 수 있다면 더 생생하게 그것들을 글에 끌어다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금씩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서 견문을 넓혀간다면 글은 보다 시야가 넓어지고 이야기가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만의 세계관의 확립은 생각하는 주체(시인)가 대상을 찾아내는데 용이함을 준다. 일관된 인식은 대상을 관찰하고 대상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 수 있도록 귀를 열어준다. 반면에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 시인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나 깨달음을 줄 수도 있고, 평소 시인이 지니고 있던 인식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다.

 

여기 두 편의 염주꽃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예문시 1>

염주꽃 / 강만

 

그곳에 집을 비워두고 집을 나선 고승은 서릿발치는 산과 숲과 우주를 걸어 마침내 하늘의 문 앞에 이른다.

영혼이 하늘에 오른 후 어느 날은 큰 바람이 그 숲에 불어오자 바위의 낡은 빈집은 풀풀풀 한 줌 재로 남아 이승에서 사라지고 빈 집에 걸려 있는 백팔 개의 염주알만 별이 흐르듯 주르르르 바위 아래로 흩어졌다.

이듬해 봄

빈집 없어진 자리

염주꽃 피어 눈부시다

 

<예문시 2>

염주꽃/ 구재기

 

한길에서 샛길로 접어들다가

무리지어 핀 너를 보고

네가 진짜꽃이었음을 알았다

 

바람이 자는 것도

그러다 낙엽이 홀로 지는 것도

생각하면 모두가 큰 죄임을 알았다

풀풀 티끌만 남기던 기억

묵묵히 텅 빈 하늘을 견디어 내며

가슴까지 텅 비우는

,*삼고의 꽃

 

비로소 네가 꽃이었음을 깨닫고는

텅 빈 방안으로 돌아와

내 가슴 비우는 법을 알았다

 

<예문시 1>은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욕망과 생명의 윤회를 그리고 있다. 어떻게, 발상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시인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마음껏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리를 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즉 삶의 유한성과 윤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공고하였기에 이에 적합한 소재(염주꽃)를 찾아내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피어있는 염주꽃을 발견하고 이에 불교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보다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발상의 단계



대상의 발견 (염주꽃) 염주꽃의 개화의 원인 추리 이야기의 구성 (고승의 구도와 입적)

                                                                          ↓



보이는 것 (가시적 대상) 보이지 않는 관념

 

시의 구성



1연 고승의 입적 (죽음) 2연 육신의 사라짐과 구도의 상징( 염주알)의 해체3연 시간의 흐름4연 장소의 이동 염주꽃의 개화(새 생명의 탄생. 윤회)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위의 시는 발상의 단계와 창작의 단계가 역순으로 엮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 창작이 대상의 관찰로부터 추리(상상력)를 통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예문시. 1>에서의 염주꽃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매개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가.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가에 핀 꽃이 염주꽃이라는 사실을 시인이 알아차린 데 있다. 만일 그 꽃이 무슨 꽃인지 몰랐다면 시는 다른 방향을 잡아갔을지도 모르고 아예 씌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의 발화는 염주꽃 열매가 간혹 염주알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염주알은 대체로 모감주나무 열매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염주꽃은 열대 아시아가 원산지인 귀화식물로서 열매가 녹색에서 검은색으로 변하면서 광택이 나고 둥글다.

 

<예문시. 2>또한 염주꽃이 왜 염주꽃으로 불리는지를 알지 못하였다면 씌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문시. 1>이 염주꽃이 주제를 드러내는 매개체로 활용되었다면 <예문시. 2>에서는 의인화되어 화자(話者)를 각성시키는 존재로 형상화되고 있다. 왜 염주꽃이 진짜 꽃인지(1) 그 연유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염주꽃의 꽃말이, 은혜와 기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은혜와 기도는 섬김과 낮춤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기꺼이 타자(他者)에게 쓰임을 당하는 존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고행이 있기에 염주꽃 열매는 생식의 도구를 넘어서서 고행과 수도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삼고(三苦)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를 말한다. 고고는 육체적 고통이요, 괴고는 모든 것이 파괴되고 소멸됨에서 오는 고통이며, 행고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물의 고통을 말한다. 시인은 염주꽃을 보면서 그 내부를 상기하였을 것이다. 그 옛날 천축을 향하여 사막을 건너고 설산을 넘던 구도승들이 여로에 지쳐 병에 걸리고, 기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여도 그들이 지닌 염주는 살아남아 그들이 땅으로 돌아간 자리에 나무로, 꽃으로 돋아 올랐다고도 하는데 <예문시. 2>의 무리진 꽃들은 시인에게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고행의 길을 가는 그 옛날의 승려들로 보였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이 무심한 듯 주변을 스쳐지나가거나 머물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 등의 현상에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시적 대상과의 은밀한 대화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중한 삶의 진리를 체득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note

조태일은 좋지 않은 인식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1. 피상적 인식

대상의 외형만을 단순하게 바라봄으로써 대상의 숨겨진 진실, 가치, 의미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적인 넋두리, 푸념으로 그치기 쉽다

2. 관습적 인식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태도가 고정된 틀에 매여 있거나 자동화 된 것이다. 말하자면 상식에 그치는 낡은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 본문에 밝힌 세계관의 확립과 관습적 인식은 구별되어야 한다. 개인의 세계관이란 낙관, 허무, 긍정과 부정 등의 개인을 둘러싼 세계와 환경에 대한 주관을 말하는 것이다.

3. 기계적 인식

관습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형식적이고 대상의 외형만을 건성으로 인식하는 태도

4. 추상적 인식

시가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에 선뜻 동의를 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막연하고 불투명하여 문맥이 파악되지 않는다면 이는 추상적 인식의 결과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시에 있어서의 '형상화'는 이미지의 구성, 즉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한 장의 그림을 볼 때의 정서가 생성되는 것과 같다.

염주꽃과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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