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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고속 성장 달음질 속 그림자를 잃어버린 한국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19. 15:58

고속 성장 달음질 속 그림자를 잃어버린 한국
중앙일보
입력 2024.07.16 00:26

업데이트 2024.07.16 18:29



입체적 성장을 위하여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인생은 일종의 거래처럼 보인다. 사회에 나아가 자기가 가진 재화를 거래하고, 그 거래 과정에서 끊임없는 손익 계산이 이루어지고, 그 거래에서 이익을 본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향상하는 데 성공한다. 프랑스 출신의 독일 작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슐레밀은 바로 그런 거래에서 ‘대박’을 친 사람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건네주고 금은보화를 마음껏 꺼낼 수 있는 주머니를 얻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림자마저 팔아가며 해낸 성장
이젠 전 지구적으로 한계 부닥쳐
빛과 어둠 함께해야 성숙한 존재
어떤 사회 만들 것인가 탐구해야

그림자를 팔아버린 사나이


생각의 공화국

이 거래 덕분에 슐레밀은 엄청난 부와 호사를 누린다. 막대한 돈의 힘으로 호의호식을 하는 것은 물론 (가짜) 백작 행세를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슐레밀을 이상하게 여긴다.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하게 되면서, 슐레밀은 점차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돈으로는 사람들의 입에 발린 호의만을 살 수 있을 뿐. 사람들은 그림자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성실한 사람은 태양 아래에서 걸어가면서 자신의 그림자를 잘 간직하는 법이지.”(열림원판 『그림자를 판 사나이』 32쪽) 이리하여 그림자가 돈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슐레밀은 절감하게 된다.

슐레밀은 그림자를 사간 이를 다시 찾아, 자기 그림자를 돌려받기 원한다. 그러나 그 거래 상대는 사실 악마였던 것으로 판명되고, 그 악마는 순순히 그림자를 돌려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영혼을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슐레밀로서는 사실 할 말이 없다. 악마는 슐레밀로부터 그림자를 강탈한 것이 아니라 거래를 통해 가져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합법적 거래였고, 슐레밀은 합법적 거래로부터 이득을 얻으려 했던 이른바 합리적 인간이었을 뿐이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득을 생각하는 법이지요.”(108쪽)

악마와 거래를 통해 금은보화를 넘치도록 얻었으나 슐레밀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랑하던 여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뒤 자신을 유폐하고, 이렇게 탄식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단지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말았구나.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32쪽) 부자가 되었으나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게 된 사람 슐레밀. 그는 이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그림자는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베풀어졌다. 그림자란 형이상학적 본질의 부산물을 상징한다, 아니다, 그림자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상징한다, 아니다, 그림자는 잃어버린 고향을 상징한다, 아니다, 그림자는 집단적 기억을 상징한다, 아니다, 그림자는 집단적 연대성을 상징한다, 아니다, 그림자는 성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등등.(162쪽) 인간의 해석이 늘 그렇듯, 이 모든 해석들은 다 일리가 있되 그 어느 하나가 유일하게 딱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떤 해석을 하든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그림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지만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림자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림자를 가지고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잠을 잘 수도 없고 투자를 할 수도 없다. 그처럼 그림자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슐레밀처럼 비참해지고 만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에 따르면, 특히 부자가 그렇다. “당신처럼 부유한 사람은 그림자를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104쪽) 무엇이라고 딱 못 박아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림자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소중한 것,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킨 인간에게 없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다.

그림자, 입체적 존재의 증거

그림자란 무엇인가. 그림자는 그 자체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 뭔가 물리적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가 생길 수 있다. 그림자를 잃었다는 것은 물리적 실체를 잃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림자가 곧 물리적 실체는 아니다. 빛이 특정 각도에서 물리적 실체를 비출 때 생기는 것이 그림자다. 빛과 물리적 실체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다. 물리적 실체와 빛이 함께 할 때 그림자는 생겨나고, 그림자가 생겨났을 때 비로소 그 존재는 입체적이 된다.

‘신곡’ 연옥 편에서 단테는 자신과 함께 걷는 베르길리우스가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자 베르길리우스는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만들던 육신은 이미 나폴리에 묻혔다고. 즉 그림자는 이 속세에 살아있다는 증거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갖는 생동감과 입체감을 표현하고 향유하고자 했고, 그들이 원하는 생동감과 입체성은 원근법과 그림자를 통해 가능했다. 생동감 있는 입체적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같은 어둠이 필수적이다. 철학자 헤겔 역시 ‘논리학’에서 절대적 어둠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적 밝음 속에서도 존재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때만 비로소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통해 존재는 비로소 명확해진다. 즉 빛과 어둠이 함께 해야만 입체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림자는 그저 칠흑같이 검기만 한 어둠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은 그림자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과 빛이 섞여 있는 상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리 시커먼 땅에도 자갈과 먼지와 나뭇잎에 반사되는 빛이 섞여 있기 마련이라고. 그저 밝기만 한 상태는 갓 태어났을 때로 족하다. 성장한다는 것은 곧 삶의 두께를 갖는 일, 삶의 두께를 갖는 일은 곧 입체적 존재가 되는 일, 입체적 존재가 되는 일은 곧 어둠을 받아들이는 일, 어둠을 받아들이는 일은 곧 그림자를 갖는 일이다. 성숙한 존재란 빛과 어둠이 함께 하는 존재, 명암이 함께 하는 입체적인 존재다.

그러니 그 성숙은 단지 경제적 성장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 그림자마저 팔아가며 해내는 성장에는 한계가 왔다. 단지 한국에만 한계가 온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한계가 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지 경제 성장만이 아니다. 입체적 존재로서 성장을 해야 하고, 그 성장에는 그림자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인생은 일종의 거래처럼 보인다. 사회에 나아가 자신이 가진 재화를 ‘자유롭게’ 거래하고, 그 거래에서 큰 이익을 보기 원한다. 그 누구도 명시적으로 그 거래를 강제하지 않았기에, 자신은 자유로웠다고 느낀다. 그 습자지처럼 얇은 자유를 행사한 끝에 뭔가 중요한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자유스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슐레밀은 자문한다.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32쪽)

고속 경제성장 뒤에 드리운 그림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했던 슐레밀은 결국 어떻게 되었나? 그림자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합법적인 거래였으므로. 그가 그림자를 팔고 얻은 돈을 갖고 있는 한 그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 돈을 손에서 놓고 나자, 장화 한 켤레가 생겼다. 한 걸음으로 7마일을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장화. 그 장화를 신고 슐레밀은 이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없었기에 그는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는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이 세상을 탐구한 끝에 그는 마침내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을까? 얻었다. 탐구하는 행위가 곧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그의 새로운 정체성은 부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바로 탐구자다. “그 이후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저는 편안하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뿐입니다.”(127쪽) 슐레밀은 이제 외롭지만 마음의 평화를 얻은 탐구자로 살아갈 것이다.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은 고속경제성장이라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국가 자산 순위’(국민 전체의 총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 순위)에 의하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는 세계 10위다. 이 놀라운 성공을 위해 치른 대가가 없었을까. 치러야만 했던 그 유무형의 대가를 한국의 그림자라고 부르자. 한국인이 그림자와 경제적 번영을 교환했다면, 부자가 될지언정 결코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늘어난 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고 나라는 소멸의 길을 걸을 것이다. 이 사회는 돈이 좀 더 생긴다고 갑자기 살만한 곳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슐레밀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사회에는 “이제 이 지상에서 나는 어떤 사회가 될 수 있고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탐구자로 존재하는 길이 남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