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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싸워야만 한다면 잘 싸우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3. 22. 17:02

싸워야만 한다면 잘 싸우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27 00:32

싸움의 기술

 

잘 지냈어? 혼자 있을 때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이 몸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다. “오늘 어땠어?” 몸이 대답한다. “너무 힘들었어.” 마음이 대꾸한다. “그 정도로 힘들어하면 어떡해. 한국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라구.” 몸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의지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니야. 네가 날 너무 몰아세우면 견딜 도리가 없어.” “내가 널 너무 몰아세웠다고?” 토라진 마음은 몸에게 소리친다. “넌 너무 저질이야!” 그래. 난 저질이다. 난 평균 이하의 저질 체력이다. 그러나 이 험난한 세상에서 저질 체력도 살아가야 한다. 싸우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부터 소개할 것은 저질 체력을 위한 싸움의 기술이다.

이 세상에서 싸움은 불가피하고
모든 싸움에는 비용이 들기 마련
미세 공격과 이데올로기 투쟁은
물리적 싸움보다 효율적인 방법

약자든 강자든 싸운다

                                                                                          생각의 공화국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 생존하기 위해 싸우고, 체력이 넘쳐나서 싸우고, 무료해서 싸우고, 욕심에 비해 자원이 부족해서 싸우고, 남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려 싸우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싸우고, 한 줌 존엄을 지키려고 싸우고, 남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싸우고, 빈틈없는 자기애가 충돌해서 싸운다. 그뿐인가. 그냥 싸우기도 하고, 알 수 없이 싸우기도 하고, 정신 차려 보니 싸우고 있기도 하다. 싸울 이유와 계기는 널려 있다.

어떤 이는 공공연하게 싸움을 찬양한다. 검투사의 육체는 나무늘보의 육체보다 아름답다고. 싸움을 통해서만 인간은 긴장할 수 있다고, 긴장해야만 단련할 수 있다고, 단련해야 진일보할 수 있다고, 진일보한 상태가 더 아름답다고. 말로는 평화를 사랑한다지만, 어떤 이는 내심 싸움을 사랑한다. 평생 투사로 지내왔는데 갑자기 싸울 상대가 없어지면 어떡하나. 싸울 상대가 없어지면 내 삶이 의미를 잃을 텐데.

약한 순둥이조차 평화를 사랑하기 쉽지 않다. 저 게살을 발라내기가 귀찮다, 그러나 저 맛있는 게살을 먹고 싶다. 이제 약자에게 싸움을 걸고 패자를 만든 뒤, 그 패자에게 게살 발라내는 일을 시키는 인간이 나타난다. 저기 놓여 있는 바위가 유난히 평화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바위를 부수려 드는 인간이 나타난다. 가만히 있는 상대를 지분거려 기어이 우월감을 느끼려 드는 인간이 나타난다. 결국 참다 참다 역류성 분노가 치미는 순간이 약자에게도 온다. 분연히 일어나 저항하기로 한 이상, 약자도 싸움을 피하기 어렵다.

물리력을 이용한 싸움은 지친다

이렇게 강자든 약자든 누구나 잠재적 싸움의 한 가운데 있다. 그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야기가 직관적인 호소력이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정치 질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목숨 보전과 욕망 충족을 두고 사활을 건 전방위적 투쟁의 상태에 있다.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권력자를 옹립한다. 질서는 혼돈보다 나으므로.

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야기에 대해 직관적인 의구심을 품어 왔다. 투쟁이라니, 일단 너무 기운들이 넘치지 않나. 누워 있기도 힘든데 싸울 생각을 하다니. 침대에 누운 사람은 만인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 자신과 기상 투쟁부터 해야 한다. 날이 추운데 오늘 하루도 일어나서 살아가야 하나. 가만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침대 위에 소변을 보면 따뜻하겠지. 그러나 잠시 후 이불이 차갑게 젖을 것이고, 내 인생을 후회하게 되겠지. 일단 사람 꼴을 해야 한다. 화장실부터 가보는 거다.

그건 체력이 약한 당신한테나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나는 체력이 좋으니까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그렇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저질 체력이 된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 누구나 나이 들고 힘이 부치면 저질 체력의 나라로 귀순해온다. 해가 갈수록 체력이 급속도로 방전되고, 침대는 충전용 거치대로 변한다. 체력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정복이 성취이겠지만, 저질 체력에게는 생존이 성취다.

체력이 아직 넘쳐나는 사람이 선호하는 싸움법은 물리력이다. 육탄전이다. 원정(遠征)이다. 그러나 무한 체력의 소유자는 없다. 결국 누구나 지친다. 물리력을 사용한 싸움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 누구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으며 패배할 경우 참혹한 상태를 감수해야 한다. 요컨대 물리력을 동원한 싸움은 비용이 많이 든다. 그것은 지속 가능한 싸움이 아니다. 따라서 체력이 넘치고, 군사력이 월등한 강자도 전선을 쉽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

비용을 아끼는 싸움의 방법

강자도 물리적 싸움을 조심할 정도니 약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간 감수한 굴욕과 착취를 생각하면, 전면 봉기와 무장투쟁에 나서야 속이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약자들은 쉽게 봉기하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 담보로 거는 일이기에. 비용이 많이 들기에, 무장봉기를 주저한다. 그러면 그 수많은 농민봉기는 무엇이었냐고? 정말 굶어 죽을 정도의 수탈이 계속되면, 삶보다 못한 생존이 지속되면, 그리하여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면 인간은 봉기한다.

그러나 농민봉기는 대개 실패한다. 잠깐의 승리 뒤에, 곧 지배계급이 반격하여 기성 질서를 회복하기 일쑤다. 어쩌면 실패가 아닌지도 모른다. 봉기의 효과로 다음 세대 농민에게 수탈이 약화되면, 그것도 일종의 승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승리는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 승리일 뿐이다. 따라서 목전의 일상적 싸움을 위해서는 농민들은 이른바 약자의 무기를 개발한다.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말했듯이, 약자들은 고의적 지연, 좀도둑질, 태업, 공유지 무단 점유 등의 방식으로도 싸운다. 그런 미시적 투쟁이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약자들만의 일이겠는가. 강자들도 지배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아무리 기운이 넘치는 사람도 1년 365일 전면전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강자도 약자의 무기를 차용한다. 강자 역시 물리력뿐 아니라 평판 훼손, 따돌림, 은근한 무시와 미시적인 모욕 등의 방법을 통해 약자들을 괴롭힌다. 즉 “미세공격”을 감행한다. “미묘하고 의외이며 종종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비언어 교류로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데럴드 수, 리사 스패니어만 『미세공격』)

이성적 토론은 가능한가

강자든 약자든 그렇게 치사하게 굴지 말고 이성적 토론을 하면 어떤가? 이성적 토론을 싸움의 대안으로 손쉽게 내미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적 토론이 이루어지는 걸 본 적이 있느냐고. 이성적 토론의 이상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전두엽을 거치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독일의 사상가 위르겐 하버마스보다 이성적 토론의 중요성을 더 역설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 정통한 학자들이 이성적 토론은커녕 물리적 싸움 직전까지 가는 것을 보고, 이 방법의 한계를 절감한 적이 있다. ‘논리 배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성적 토론도 싸움의 요소가 있는 법. 이성적으로 여러 번 연이어 설득당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게 인간이다. 그러다 보면 토론을 하다 말고 주변에서 둔기를 찾는 이가 나타난다.

이성적 토론이 요원한 꿈이라면, 남는 것은 이데올로기 투쟁밖에 없는가. 이데올로기 투쟁은 물리적 싸움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던가. 천 냥을 벌기 위한 노동보다 달콤한 말 한마디가 쉬운 법, 상대를 어르고 달래고 지배하기 위한 각종 ‘가스라이팅’(?)이 세상에 난무한다. 특히 국가는 표어, 담화문, 교과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 든다. 정부가 세금을 걷는 것도, 국회에서 고성을 지르는 것도, “이게 다 네 손해 같지만, 실은 너를 지켜주고 싶어서 벌이는 일이야.”

물리적 폭력 vs 심미적 탁월함

서툰 이데올로기 주입은 역효과를 불러온다. 노골적인 프로파간다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상대의 설레발이 공허한 가장행렬처럼 느껴지면 그 연극은 실패한 것이다. 애써 큰 비용을 들여 서툰 연극을 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의 역사가 폴 벤느는 이렇게 말했다. “주인은 노예에게 굳이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지 않는다. 자신이 노예보다 더 강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므로.”

왜 충분한가? 노예는 강자를 보고서 자기 머릿속에서 ‘상상적 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 나를 사랑해줄 거야, 나는 저 사람을 따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결국 상대의 상상력을 자극할 정도로 멋진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율적인 싸움의 기술인 셈이다. 그렇다면 물리적 폭력보다는 심미적 탁월함이 중요하다. 자, 이제 남과의 싸움이 아니라 멋진 존재가 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것은 축복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