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버스터미널 · 7080 음악다방… ‘매운맛’ 없지만 ‘심심·느슨한’ 매력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2-01 09:17
- 업데이트 2024-02-01 09:18
우산성 칼바위 능선에서 본 청양읍 전경. 능선을 따라 바위가 톱니처럼 이어져 있다고 해서 칼바위 능선이다. 능선 끝의 정자는 청룡정이다. 외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관광지는 아니지만,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시간이 무르익은 청양
읍내 중심의 시내버스터미널
동네 마실 나온 주민 삼삼오오
이야기 꽃피는 ‘사랑방’으로
레트로 감성 느끼는 ‘청춘거리’
지역 이야기 실린 신문 전시도
1950년대 번성한 ‘구봉광산’
매몰사고 여파 등으로 문닫아
당시 구출사진 박물관에 보관
바느질 가게·솜틀집·방앗간…
오래된 가게들, 옛추억 지켜
청양=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청양을 여행하는 방식
충남 청양에는 뛰어난 자연경관도, 내로라하는 역사명소도 없다. 이웃한 부여나 공주, 보령과 비교해보면 더 그렇다. 여행을 목적으로 거기까지 갈 이유가 도무지 없어 보인다. 여행지로서의 장점이 거의 없는 곳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건 명소 방문과 경관 감상 위주 여행을 했을 때 얘기다. 다른 방식의 여행이라면, 청양은 썩 괜찮은 여행지이기도 하다.
바쁜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청양에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곳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속도를 늦추고서 때때로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보인다. 청양을 여행하는 다른 방식은 ‘가만히 들여다보기’다.
청양에서 가만히 보아야 할 것들은 곳곳에 있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에, 장날 아닌 날의 무료한 시장에, 첫차를 기다리는 버스터미널의 난로 옆에…. 그것들 뒤에는 하나같이 흥미진진하거나 마음 따뜻해지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스며있다. 이야기야 뭐 어디든 없을까만 청양에서 유독 그게 도드라지는 건,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이야기를 길어내 주는, 오래됐거나 누추한 풍경이 곳곳에 남아있어서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방식의 여행을 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먼저 기대를 지워야 한다. 기대를 줄이고 심심함을 받아들이자. 심심해져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니까. 마치 거기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청양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바로 ‘거기 사는 사람처럼’ 여행하는 것. 이게 결론이다.
청양에서 주로 마주치게 되는 건 공간이 아니라 느슨한 시간의 밀도다. 일상에서 번아웃이 왔거나 마음을 다쳤을 때, 혹은 위로가 필요할 때, 헐거운 시간이야말로 좋은 치유재료다. 시간을 여행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추억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청양으로의 여행을 권한다.
출렁다리 붐이 일기 한참 전인 2009년에 만든 천장호 출렁다리. 고추와 오미자 조형물의 미감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1960년대까지 청양의 중심이었던 읍내1리에는 레트로 풍으로 조성된 ‘청춘거리’가 있다. 청춘거리의 중심인 ‘7080음악다방’ 내부 모습.
청양에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내버스터미널’이 있다. 승객들이 터미널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 청양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다
충남 청양에는 철도가 없다. 기차역이 없으니 청양의 유일한 관문은 시외버스터미널이다. 외지에서 차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청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다. 시골 노인들은 아직도 버스가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그래서 버스터미널은 ‘여전히’ 당당한 청양의 중심이다. 청양 여행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보면 어떨까. 터미널이라기보다는 정류장에 가까운 허름한 대합실에서 여행 가방 손잡이를 끌고 밖으로 나오면 ‘시간여행지’ 청양이 기다리고 있다.
청양에는 버스터미널이 두 개다. 하나는 시외버스터미널이고, 다른 하나는 시내버스터미널이다. 먼저 시내버스터미널 얘기부터 해보자. 청양은 시(市)가 아니라, 군(郡)이면서 읍(邑)이다. 하지만 청양을 다니는 버스는 군내(郡內)버스도, 읍내(邑內)버스도 아닌 ‘시내(市內)버스’다. 다른 곳에서도 다 그렇게 부르니 어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읍내 중심 한복판에 아직 남아있는 시내버스터미널은 생소하다.
얼음분수축제가 열리고 있는 정산면 천장리 알프스 마을.
도시에서는 시내버스터미널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정류장은 있지만 터미널은 없다. 있다면 노선별 버스회사 차고지가 있을 뿐. 그런데 청양에는 버젓이 간판을 달고 있는 ‘청양시내버스터미널’이 있다. 청양 10개 읍면은 물론이고 부여나 보령까지 들고나는 버스가 모두 여기서 출발했다가 여기로 돌아온다.
1960년대 청양 거리풍경을 재현해놓은 ‘추억의 거리’. 백제문화체험박물관 안에 있다.
시내버스터미널은 청양시장에서 가깝다. 시골 사람이 읍내에 나오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다. ‘장 보기’ 아니면 ‘병원 가기’. 그렇다면 병원이 몰려있는 청양시장 바로 옆 시내버스터미널은 그야말로 최적의 위치다.
시내버스터미널은 누추하다. 말이 터미널이지 구멍가게 딸린 작은 대합실 하나에 버스 4∼5대가 정차할 수 있는 승강장이 전부다. 대합실의 낡은 연탄난로가 작년에 신식 가스난로로 바뀌었고, 표 팔던 매표소 창구가 인건비 부담으로 닫힌 것 말고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터미널 대합실의 낡은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순식간에 한 세대 전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칠갑산 들머리인 대치터널 부근 도로 옆에는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동상이 있다.
# 시내버스터미널이 다시 돌아온 사연
시내버스 대합실 한쪽 자리는 장 보따리를 안고 있거나 석 달치 약봉지를 든 할머니가 차지했고, 다른 쪽은 막걸리 몇 순배에 대낮부터 얼굴이 붉어진 할아버지 몇이 모였다. 버스를 기다리며 난로를 쬐고 앉은 아주머니 둘의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 아주머니가 상대 마을 부녀회장의 안부를 묻다가 ‘부녀회장 나이가 칠순이 넘었다’며 까르르 웃자, 대합실에 있던 모두가 따라 웃었다. 이야기는 이웃집이 새로 본 사위의 품평을 거쳐 신발가게 아들과 양복점 딸 사이에 오가는 혼담의 업데이트 버전까지 갔다. 다 팔고 나니까 금값이 된 고추 얘기로 건너갔는가 싶더니 며느리가 생일을 앞두고 부쳐준 용돈 자랑으로 이어졌다.
청양 사람들에게 시내버스터미널은 버스만 타러 가는 곳은 아니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는데도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아쉬워서 미적거린다. 터미널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정민호(78) 씨는 집 근처인 부여 외산면 가는 차가 왔는데 버스를 한번 기웃거리고는 차에 오르지 않았다. “왜 안 타시냐”고 물었더니 “아는 기사가 아니라서…”라며 말을 흐린다. 그는 늘 아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기다렸다가 탄다. “그럴 것까지 뭐 있냐”고 했더니 “뭐 바쁜 일도 없다”며 웃었다.
청양에서 시내버스터미널이 잠깐 사라졌던 적이 있다. 조금씩 엇갈리는 증언을 종합해보면, 아마 1997년쯤이었던 듯하다. 경영이 어려워진 청양여객이 임대료가 싼 외곽으로 차고지를 옮기면서 하루아침에 시내버스터미널이 없어졌다. 시내버스터미널이 사라지자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다리쉼을 하던 대합실이 없어진 것도 불편했지만, 노인들은 버스 번호나 노선표를 빠르게 읽지 못하는 데다 동작도 느려 정류장에 나가 섰으면서도 코앞에서 버스를 놓치기 일쑤였다.
시내버스터미널이 없어지면서 큰 타격을 입은 건 손님이 뚝 끊긴 대합실 옆 구멍가게 해태슈퍼마켓이었다. 터미널 주변 다른 상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생각다 못한 해태슈퍼는 터미널 뒤쪽의 방앗간 주인과 의기투합해 나간 시내버스터미널을 다시 데려왔다. 슈퍼와 방앗간이 반반씩 돈을 보태 터미널 자리 땅을 사서 버스회사에 싸게 임대하는 방법으로 시내버스터미널을 다시 불러들인 것. 땅값이 적잖이 들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여기까지가 시내버스터미널이 돌아오게 된 사연이다.
40년 넘게 부부가 운영해오던 해태슈퍼를 이제 아내 혼자 지킨다. 남편이 코로나19에 걸려 세상을 뜨고 나서 아내는, 적자만 겨우 면하는 가게를 정리하려 한다. 하지만 난감한 건 버스터미널 땅을 살 사람이 없다는 것.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버스회사는 땅을 살 형편이 안 되고, 인수할 것처럼 했던 청양군은 입장이 바뀌어 ‘땅을 안 사겠다’고 딱 자르더란다. 그러고 나니 땅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 땅을 사면 버스터미널을 내쫓아야 하는데, 그랬을 때 쏟아지는 비난을 누군들 감당하려 할까. 그래서 해태슈퍼는 오늘도 문을 연다.
# 시외버스터미널은 왜 거기 있을까
청양에 도착해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시외버스터미널과 시내버스터미널이 서로 ‘멀다’는 것이었다. 보통 버스터미널은 딱 붙어있게 마련이다. 시외버스에서 시내버스로 갈아타거나, 반대로 시내버스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는 손님의 대중교통편 연계를 위해서다. 그런데 왜 청양의 버스터미널 두 개는 떨어져 있을까. 기록을 뒤져봤다.
그 단서가 1972년 2월에 신문마다 일제히 실린 ‘성명서’에 있다. ‘청양지구 뻐스주차장 추진위원 일동’ 명의의 성명은, 읍내1리에 있던 시외버스터미널이 넓고 시원하게 뚫린 시내 ‘십자로’ 주변 후보지 대신, 좁은 소방도로 안쪽으로 옮겨가는 데 대한 항의를 담고 있다. 추진위원들은 ‘권력이나 일부 개인의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의심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주민의 설명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시내 중심을 두고 시외버스정류장이 엉뚱한 밭으로 옮겨가기로 밀실에서 결정됐는데, 공교롭게도 그 주변 땅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국회의원 소유였다는 얘기. 성명서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전은 강행됐고, 지금의 시외버스터미널이 그때 옮겨 간 자리에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의 분위기는 시내버스터미널보다 더 썰렁했다. 조용한 공간을 일러 흔히 ‘절간 같다’고 하는데,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이 딱 그런 분위기다. 터미널 2층의 ‘향수다방’은 간판만 남기고 폐업한 지 오래다. 다방 입구에는 ‘새 임대인 모집’을 알리는 벽보가 나붙었다.
청양의 경제적 소외 혹은 성장 지체는 통계와 숫자 같은 것으로 금세 확인된다. 충남 전체의 산업체 가운데 청양이 차지하는 비율은 1.8%. 산업체 종사자 숫자는 이보다 적은 1.3%다. 지역 내 총생산은 충남 지역 총생산량의 0.7%에 불과하다. 청양군 전체를 통틀어 목욕탕이 두 개이고, 일반 시중은행은 단 한 곳도 없다. 다른 지역에서는 면마다 있다시피 하는 오일장도 청양읍의 청양장, 정산면의 정산장, 이렇게 두 개가 전부다.
# 매몰 광산에서 16일 만에 살아나오다
경제적 형편으로 보면 지금은 이른바 ‘뒷방 신세’에 가깝지만, 한때 청양이 남부러울 것 없이 번성했던 시절이 있었다. 남양면에 1970년대 초까지 남한 최대의 금광으로 꼽혔던 ‘구봉광산’이 있었다. 1950∼1960년대 구봉광산에서는 한 해 1000㎏이 넘는 금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나라 전체 금 생산량의 60%쯤 되는 양인데, 지금 시세로 치면 1010억 원이 훨씬 넘는다. 금광 하나가 청양 경제를 이끌며 다 먹여 살리던 시절이었다.
청양이 쇠퇴하기 시작한 건 구봉광산 대명광업소가 문을 닫으면서부터였다. 구봉광산은 1971년 폐광했는데, 대명광업소 폐업은 생산량 저하와 임금상승, 외국에서의 금 수입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지만, 폐광을 앞당긴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전국을 온통 떠들썩하게 했던 ‘구봉광산 매몰사고’다.
그 시절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1967년 8월 22일 오후 3시 30분. 구봉광산의 수직갱도가 무너져 내리면서 지하 125m 수평갱도에서 혼자 배수 작업을 하던 광부 김창선(당시 36세) 씨가 매몰됐다.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암흑 속에서 매몰 사흘째 되던 날, 6·25 전쟁 중 통신업무를 담당한 경험이 있었던 김 씨는, 스스로 갱내 전화를 연결해 생존 사실을 알렸다.
이 사실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매몰된 갱도 안쪽에 김 씨가 생존해 있음이 확인됐는데도, 구조작업이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릴레이식 보도가 이어졌다. 온 국민이 애타는 마음으로 구조를 기다렸다. 김 씨 구출이 온 국민의 염원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도 나섰다.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광업소에 지금의 민정비서관 격인 민원비서관을 보내 ‘특별구조 지시’를 전했다.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데다 대통령까지 등판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출하라’는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으니 대명광업소의 압박감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광업소는 김 씨 구출을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썼다. 이 과정에서의 막대한 지출로 이후 경영이 크게 어려워진 게 구봉광산 폐광으로 이어지게 된 직접적 원인이었다.
다행히도 구조의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밖에서는 미군 공병대까지 동원돼 밤낮없는 구출작전을 펼쳤고, 안에서는 갱도 천장 벽으로 흐르는 물을 받아 마시고, 가죽 혁대를 물에 불려 씹고, 갱목용 통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버텼다. 김 씨는 15일 9시간 만에 구출됐다. 뒤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깨졌지만, 그때까지 광산매몰사고 구조 생존시간의 세계신기록이었다.
# 집단의 기억 새긴 박물관과 음악다방
1년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구봉광산 매몰사고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청양 곳곳에 지문처럼 새겨져 있는 이유다. 자칫 상처로 남을 뻔한 사고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바람에 동시대의 청양 사람들이 공유하는 아련한 집단 추억이 됐다.
청양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칠갑산이나 장곡사가 있는 대치면에는 옛 폐교를 다듬어 만든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 한쪽 금광체험관에서는 당시 광산의 현황과 함께 구봉광산 매몰사고와 광부 김창선 씨 구출과정 등의 기록과 사진을 전시해놓고 있다. 1960년대 청양 읍내의 거리 풍경을 세트장과 인형 등으로 재현해놓은 ‘추억의 거리’ 전시 공간도 있다. 백제 도요지를 재현했다는 박물관 공간보다, 이런 곳들이 훨씬 더 볼 만하다.
구봉광산 매몰사고의 자취는 당시 청양읍의 중심이었던 읍내1리에도 남아있다. 1960년대까지 청양의 중심은 지금의 시내와는 좀 떨어진 ‘읍내리’였다. 읍내리는 1리부터 5리까지 있는데, 앞의 숫자가 중심에 더 가까웠던 곳이다. 읍내1리가 읍내2리보다, 읍내2리가 읍내3리보다 더 번화한 동네였다는 얘기다. 청양의 중심이었던 청양읍 읍내1리에는 ‘청춘거리’가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원을 받아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으로 2021년 조성한 거리다. 코로나19의 와중에 활용방안을 못 찾던 이 거리에서 이른바 ‘레트로’를 앞세운 주민참여형 소생활권 활성화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읍내1리에는 옛 국일여관 건물이 있다. 한때 청양을 대표했던 숙소였는데, 지금은 폐건물이 되다시피 했다. 건물 입구 안내판에는 ‘국일여관의 전성기 때는 구봉광산 매몰사고 즈음’이라고 쓰여있다. ‘구봉광산 매몰사고 당시 취재를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기자들이 모두 여기에서 묵었다’고 자랑스럽게 적어 놓았다.
국일여관 옆에는 ‘7080음악다방’이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지금의 자리로 가기 전에 ‘차부’라 부르던 버스대합실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간인데, DJ 부스와 가득 꽂아놓은 LP판으로 1970년대식 음악다방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내부에는 재봉틀이며 라이터, 자명종 등 그 시절의 손때 묻은 물건과 빛바랜 옛 청양 사진을 전시해놓고 있다.
# 꽃상여 가게의 마지막 꽃상여 납품
청춘거리에는 스티커 사진을 찍는 ‘인생네컷’ 사진관이 있고, 옛 청양문화원이 들어서 있었던 적산가옥 풍 건물에 꾸며놓은 전시공간도 있다. 이 공간에 커다란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오래된 신문기사를 인쇄해놓았는데, 기사에는 청양과 관련된 별의별 얘기가 다 있다.
1979년 12월 25일 청양 대치면 주민 2명을 포함한 12명이 방풍나물을 캐러 서산에 갔다가 무인도에 고립됐다는 기사도 그중 하나. 사건인즉 주민들이 배를 대절해 서해 끝 동격렬비열도에 들어갔는데, 돌아오기로 약속한 선장이 배를 팔고 사라지는 바람에 44일 동안 무인도에 갇혀있다가 극적으로 구출됐다는 얘기다. 벽천리 여호골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기사도 있고, 화성면 신정리에선 동굴 속에서 죽은 어미 호랑이와 같이 발견된 새끼 호랑이 두 마리를 데려다 기르고 있다는 믿기 어려운 기사도 있다.
사연이 켜켜이 쌓여있기로는 시장만 한 곳이 없다. 청양시장은 본래 읍내리 하천 변의 작은 시골장이었다가 197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동안 청양시장에는 막대한 투자가 이뤄졌다.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부실해 마땅히 돈을 쏟아부을 곳이 시장밖에 없는 탓이 컸다. 청양시장에는 지금까지 200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입돼 청년 몰을 짓고 휴게실과 시장조리실까지 세웠지만, 청년몰 상가는 폐업해 텅 비었고 시장 휴게실이나 조리실도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오래된 소읍의 시장을 힘겹게 버티고 있는 건 투자가 아니라, 욕심 없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이다. 북적이는 장날의 흥겨움도 좋지만 장날이 아닌 날, 적막한 시장에서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는 가게들이 더 잘 보인다.
청양시장에는 40년 넘게 꽃상여를 만들어온 가게가 있다. 주인은 서른여덟 살 때부터 40년 넘게 꽃상여를 만들어 왔다는 김종만(82) 씨다. 한창 때는 보령이나 부여, 서산에서까지 주문이 밀려들었다는데, 지금은 1년에 한두 개 주문을 받는 게 고작이다. 김 씨는 꽃상여 만드는 일을 이제 막 접었다. 지난 19일에 납품한 꽃상여가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김 씨는 한 마을의 노인회관에서 ‘마을 초상에 앞으로는 꽃상여를 쓰지 않기로 한다”고 결정하고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울더라는 얘기를 들려줬다. 이렇게 퇴장하는 것이 청양시장에서 꽃상여 가게뿐일까. 바느질가게, 솜틀집, 술도가, 방앗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퇴장을 앞둔 오래된 가게들이 그 시장에 있다.
■ 붕어빵 굽는 목사님
지방 소읍까지 불어닥친 ‘초대형 베이커리 카페 붐’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청양에 근사한 카페가 없는 건 아니다. 가장 좋았던 건 남양면 소재지의 옛 보건지소를 개조해 만든 레트로풍 카페 ‘춘소커피’다. ‘춘소’란 이름은 아들 이름의 한자 ‘춘(椿)’ 자에 장소를 뜻하는 ‘소(所)’를 붙여 지은 것이란다. 카페 옆에 남양 침례교회가 있는데, 매주 금요일 붕어빵을 굽는 리어카 좌판이 선다. 붕어빵을 굽는 건 이 교회 유성훈 목사. 유 목사는 정성껏 구운 붕어빵을 누구에게나 그냥 나눠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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