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 물길에 ‘근심’ 비우고 정자선 ‘허기진 마음’ 채운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1-18 09:12
- 업데이트 2024-01-18 14:46
에메랄드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수승대 아래 구연소(龜淵沼)의 물색. 물가의 정자는 거창 신씨 가문의 정자 ‘요수정(樂水亭)’이다. 요수란 이름은 논어의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겨울 풍경·전통·맛집 ‘3박자’ 어우러진 경남 거창
퇴계가 바꿔준 이름 ‘수승대’
詩文·이름들 빈틈없이 빼곡
강물은 바닥 보일 만큼 투명
신권이 지은 정자‘요수정’엔
마루 중간 방 한 칸 지어넣어
장작 불 때워 몸 녹이는 공간
‘블루리본’ 받은 식당만 9곳
근사한 정자가 카페로 변신
오일장엔 가성비 순댓국골목
양식 진료실에 한옥 입원실
박물관 된 자생의원도 볼만
쇠퇴한 원도심엔 ‘문화거리’
거창=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바위에 새겨진 250명의 이름
‘거창의 명소’라면 수승대다. 누구도 이견이 없다. 거창에서, 아니 거창을 포함한 경남 내륙을 통틀어도 수승대에 견줄 만한 곳은 드물다. 수승대는 명승의 요소를 두루 다 갖추고 있다. 무엇 하나 빠질 게 없다. 영락없는 거북 형상의 기이한 바위와 눈부신 옥빛 물색이 있고, 물가의 근사한 정자와 거기에 얽힌 흥미로운 내력도 있다. 당대의 학자 퇴계가 이름을 고쳐 지었다는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오죽하면 거창 신씨와 은진 임씨가 소송을 불사해가며 수승대를 가문의 뿌리로 삼고자 했을까.
수승대에는 온통 명사의 이름과 시문(詩文)으로 빽빽하다. 노트 반 장 공간도 남아있지 않았을 정도다. 바위에 새긴 크고 작은 글씨에서 너도나도 이름을 새겨 남기려는 욕망이 드러난다. 높이 10m, 면적 15평(50㎡)의 수승대 바위에 새긴 이름만 250개가 넘는다. 이 중 이름 석 자가 다 판독되는 건 150개쯤. 대부분 지역을 기반으로 한 명사나 유지들이다. 누구나 다 아는 이른바 ‘전국구 명소’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수승대 바위에 가장 많이 새겨진 이름이 거창 신씨다. 거창 신씨의 이름만 36개다. 뒤이어 은진 임씨가 25명으로 뒤를 잇는다. 양 문중에서 수승대와의 인연을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거창 신씨는 요수 신권을, 은진 임씨는 갈천 임훈을 내세운다. 신권과 임훈은 사실, 처남과 매부 사이다.
신권은 조선 중종 때 거북바위를 암구대(巖龜臺)라 이름 짓고 주변에 정자 요수정과 서당 구연재를 지어 자연을 벗하며 제자를 길렀다. 퇴계가 그를 보러오기로 했다가 급히 한양에 올라가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대신 시 한 수를 적어 보낸 얘기는 유명하다. 퇴계는 그때까지 수송대였던 이름을 ‘어감이 좋지 않다’며 수승대로 바꿔 붙였다. ‘근심을 잊을 만큼 빼어나다’는 뜻이다.
# 명승의 주인을 놓고 벌인 분쟁
퇴계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수승대란 대 이름을 새로 바꾸니…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서, 큰 붓을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라.” 퇴계쯤 되는 당대의 석학이 그리 말하니, 수송대는 곧 수승대가 됐다. 퇴계가 그 이름을 거론하면서 수승대는 일약 최고의 명소가 됐다. 그럴 만도 하겠다. 지금으로 치면 방탄소년단(BTS)쯤 되는 스타가 관광 명소를 거론하며 이름을 지어주고 찬사를 보낸 격이었을 테니까.
신권은 퇴계의 서신에 감읍해 퇴계가 보내준 시를 바위에다 새겼지만, 한 살 아래였던 처남 임훈의 생각은 좀 달랐던 듯하다. 아무리 당대의 대학자라고 해도 다녀간 적 없는 곳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못마땅했던지 좀 비딱해 보이는 내용의 화답 시를 지어 새겼다. 신권과 임훈이 새긴 시는 훗날 거창 신씨 가문과 은진 임씨 가문이 수승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분쟁의 씨앗이 됐다.
다툼이 시작된 게 16세기쯤이라니 분쟁은 자그마치 400년 넘게 이어졌다. 두 가문은 수승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먼저 임씨 문중이 ‘갈천 선생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끌고 노닐던 곳(葛川杖구之所)’이라 새겨진 글을 ‘수승대 소유의 근거’로 내세우자, 신씨 문중은 ‘요수 선생이 몸을 감추고 마음을 닦은 곳(樂水愼先生藏修洞)’이라 글을 새겨 대응했다.
결국 1866년 보다 못한 현감이 나서서 거창 신씨 가문의 손을 들어줬는데도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두 문중은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도 다툼을 계속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때 신씨 문중이 소유 신고를 하지 않아 수승대가 국가하천에 편입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났다. 은진 임씨 가문에서는 이를 기회로 다시 이의를 제기해서 재판까지 갔다. 2년여의 재판 끝에 1931년 법원은 임씨 문중이 제기한 ‘수승대 소유권 확인 청구소송’을 증거불충분이란 이유로 기각했다. 수승대의 거창 신씨 소유권을 재확인해준 최종 판결이었다.
거북의 형상을 빼닮은 바위 수승대. 바위 전체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이름과 시가 새겨져 있다.
# 수승대 경관을 보는 누각과 정자
수승대가 내로라하는 명승이니 앞다퉈 주변에 누각과 정자를 지었다. 정자를 짓기도 했지만 그늘이 드리운 바위에 정자의 이름을 붙인 곳도 있고, 옛 선비가 노닐었다는 이야기 속 공간을 정자로 삼기도 했다.
수승대를 대표하는 정자는 단연 ‘요수정(樂水亭)’이다. 본래 거창 신씨 가문의 신권이 500여 년 전쯤 수승대 쪽에다 지은 정자다. 요수란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논어의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요수정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그 뒤에 다시 물난리로 사라졌다가 200년쯤 전에 수승대 건너편,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정자는 사방을 마루로 두고 가운데 방 한 칸을 넣었다. 주변이 온통 산지로 둘러싸인 거창에는 추운 겨울 때문인지, 불을 땔 수 있는 방을 둔 정자가 유독 많다.
앞으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뒤로는 솔숲 사이로 불어오는 솔바람이 어우러지는 요수정 위에 올라앉으면 온몸의 감각이 다 깨어나는 듯하다. 수정 같은 물빛을 보고,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차가운 솔바람의 감촉을 느끼고, 겨울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미감의 경험이다.
요수정 건너편에는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연서원이 있다. 서원 입구에 ‘관수루(觀水樓)’라 적은 현판을 건 문루가 휘어 자란 나무를 기둥으로 삼아 장대하게 서 있다. 관수(觀水), ‘물을 본다’는 뜻이다. 일찍이 맹자는 ‘물을 보는 데도 방법이 있다’고 했다. 맹자가 ‘봐야 한다’고 강조한 물의 덕목은 이런 것이다. 쉽게 포기하거나 중도에 그치지 않으며 웅덩이가 있다고 피해가지 않고 그곳을 다 채운 뒤에 앞으로 나아간다. 맹자는 물이 가진 본성에서 학문하는 선비의 도리를 읽었다. 그 시절 선비들에게 자연은, 삶의 원리를 가르치는 책이나 다름없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첨. 그가 정자에 올라 쓴 글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정자에 오르니) 정신을 넓히고 맑게 한 뒤에야 번거롭던 것이 간단해지고 어지럽던 것이 안정되며 옹색하던 것이 통하고 막히던 것이 열린다.” 높고 넓은 곳에 이르러 아득히 멀고 큰 것을 바라봄으로써 번잡하던 마음을 열고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정자에 올라서 보고 느끼는 건 매한가지다.
옛 선비들이 이 물가에서 먹을 갈고 붓을 씻으며 술을 마시고 다시 학문의 길에 매진했다면, 지금 수승대를 찾아온 이들은 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옥색 물빛 앞에서 감탄하며 돌아가서 다시 시작된 일상을 살아낼 힘을 얻는 셈이다.
오도산 계곡 아래 계곡을 끼고 있는 정자 모현정. 앞마당에 수석처럼 바위를 놓았다.
# 멋진 경관으로 위세를 드러내다…거창의 정자
거창의 정자 중에서 손꼽히는 곳들을 골라보자. 우선 거창읍에는 건계정이 있다. 건흥산 아래 천을 끼고 있는 중국 송나라 때 우리나라에 귀화한 성씨인 거창 장(章)씨 집안의 정자다. 내력은 짧다. 1905년에 지어졌고 1970년에 고쳐 지었다. 건계란 정자 이름은 주돈이의 고향 ‘염계(濂溪)’와 주자의 고향 ‘자양(紫陽)’에서 본뜬 이름이다. 거창 장씨의 조상이 중국 지린(吉林) 지역의 옛 이름인 건주(建州)에서 건너왔으니 ‘후손이 선조의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정자에는 용과 호랑이, 피리 부는 신선이 그려져 있다.
정자로 드는 입구에 장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식당이 있다. 거창 장씨 후손이 운영하는데, 건계정이란 정자 이름 그대로 식당 상호로 쓴다. 토종닭백숙과 해물찜닭 등이 대표 메뉴다. 이름만 빌려 쓸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울타리 안에 정자를 둔 격이어서 정자는 잘 관리되고 있다.
거창에서 안의로 가는 3번 국도 옆. 마리면 고학리 병항마을 입구의 용원정(龍原亭)은 거창의 정자 중에서도 가장 젊은 축에 속한다. 1964년에 지어진 것이니 올해로 꼭 환갑이다. 용원정은 계곡을 끼고 있는 훌륭한 풍경 속에서 ‘딱 맞는 자리’에 서 있다. 정자는 누구든 거기 무엇이든 짓고 싶었을 것 같은 자리에 있다.
오도산 계곡 아래 가조면 도리에는 모현정(慕賢亭)이 있다. 합천의 김굉필과 함양의 정여창이 딱 중간지점인 이곳에서 만나 머물면서 김굉필의 동서 최숙량과 교유했는데, 정자는 최숙량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것이다. 1898년에 지은 것이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는데, 말갛게 세수한 듯 정갈한 풍모가 인상적이다. 정자와 마당에 놓인 수석 같은 큰 바위가 주위 풍광과 근사하게 어우러진다.
모현정 앞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는데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가조 8경(景) 중 제6경으로 꼽는 ‘수포대(水瀑臺)’가 있다. 계단 같은 너럭바위를 타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곳이다. 수포대를 지나면 오도산 등산코스와 연결되는데, 물소리가 따라오는 솔숲 길이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북상면 농산리의 용암정(龍巖亭)과 모암정(帽岩亭)은 위천의 물가를 끼고 지어진 근사한 정자다. 용암정은 천변의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는 풍모가 당당하고, 모암정은 정자 안의 생동감 넘치는 단청과 용을 새긴 들보 조각이 인상적이다. 모암정은 ‘민들레울’이라는 허브농원 겸 카페 안에 있다. 정자를 상업공간 안에 두는 게 낯설지만, 정자가 잘 보존된 건 카페를 관리하는 주인이 정자를 잘 관리하고 있어서다.
개인 소유의 천변 숲에 지어진 정자 모암정. 허브농원카페 ‘민들레울’ 안에 있다.
# 겨울에도 뜨거운 곳…거창 오일장
거창시장은 상설시장 겸 오일장이다. 장날인 1, 6일이 되면 시장이 두 배가 넘게 커진다. 장날마다 콩 자루가 터진 것처럼 시장통의 좌판이 와르르 도로로 쏟아져나온다.
거창시장은 규모가 제법 크다. 장날이면 거창읍 위천천 둔치의 주차장이 꽉찬다. ‘격해도(隔海度)’라는 게 있다. 바다(海)에서 멀리 떨어진(隔) 정도(度)를 뜻한다. 영남지역에서 격해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여기 거창이다. 바다가 먼 거창시장에 뜻밖에도 생선이 많다. 작두로 썰어주는 꽝꽝 언 동태와 갈치, 민어, 조기 등을 펼쳐놓은 생선전이 몇 걸음에 하나씩이다.
거창시장에서 가장 이름난 곳은 순댓국 골목이다. 시장통 안에 골목을 따라 순댓국을 내는 식당이 줄 서듯 늘어서 있다. 이곳은 피순대가 유명하다. 맛도 맛인데, 놀라운 건 가성비다. 순대부터 내장까지 골고루 푸짐하게 넣어주는 순대모둠은 가격이 잘 안 믿길 정도다. 시장통의 순댓국이 보통 기름지고 무거운 법인데, 여기는 맑은 국물에 깔끔한 맛이 인상적이다. 굳이 한 집을 꼽으라면 시장통의 신미국밥(055-943-8186)을 추천하지만, 다른 식당들도 저마다 만만찮은 내공을 갖고 있다.
음식 얘기가 나온 김에 더 해보자.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경상도는 음식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거창은 그렇지 않다. 국내 유일한 미식가이드북인 ‘블루리본서베이’는 맛있는 식당에 ‘블루리본’ 평점을 부여하는데, 블루리본을 받은 거창의 식당이 9곳이다. 군 단위에서, 그것도 경상 지역에서 9곳이라면 적잖은 숫자. 인접한 경북 성주나 고령의 경우는 블루리본 식당이 각각 3곳에 불과하다. 블루리본을 받은 거창의 식당은 두서없다. 갈비찜을 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양푼에 보리밥을 내는 식당도 있다. 천연발효종으로 프레첼 등을 만드는 베이커리와 돌복숭아차를 내는 전통 찻집도 있다. 지역을 대표하는 압도적인 메뉴는 없지만 다양한 요리를 내는 수준급 식당이 많다는 얘기다.
# 거창에서 맛본다…‘계절 다이닝’
거창에 간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은 맛집이 있다. 이른바 ‘제철 다이닝’을 표방하며 지난 6월 문을 연 퓨전레스토랑 ‘가치’다. 이른바 ‘파인다이닝’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근사한 코스요리를 내는데, 요리의 구성이나 맛이 깜짝 놀랄 정도다.
메뉴는 코스요리 하나다. 수프와 아뮈즈 부슈로 시작해서 ‘육회 브리오슈’ ‘감태로 싼 고추다대기 밥’, 들기름소스의 ‘거창한 국수’, 토마토소스를 얹은 ‘토란으로 속을 채운 가지’ ‘따뜻한 고기 온반’ 등으로 이어지는 10개 코스다. 제철 음식을 앞세우는 곳이어서 매월 구성을 바꾼다. 이만한 음식을 거창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2만 원이라는 가격이다.
‘가치’는 임봉철(37)·김민지(37) 부부가 12년 동안의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차렸다. 부부 모두 국내 대학에서 조리를 전공했는데, 졸업 후 싱가포르로 건너가 남편 임 씨는 식품유통회사를 다녔고, 아내 김 씨는 세계적인 리조트 마리나베이샌즈의 주방에서 요리를 했다. 거창은 아내 김 씨의 고향. 오랜 꿈이었던 레스토랑 개업을 위해 귀국했다가 경남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진행한 지역가치창출 공모사업의 지원을 받아 거창읍에 식당 문을 열었다.
거창에서 추천하는 식당 또 한 곳. 지역에서 맛집을 찾는 데는 요령이 있다. 그중 하나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내는 노포(老鋪)를 찾아가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한다면 어지간한 솜씨가 아니고서는 버텨내기 힘들다. 그러니 그런 식당이 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범상찮은 내공이 있는 집이라고 봐도 된다는 얘기다.
거창세무서 근처의 ‘풍전복집’이 딱 그런 곳이다. 앞에서 ‘격해도’ 얘길 했듯이, 거창은 경남에서 바다로부터 가장 먼 산간 지역이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복요리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맛집임이 증명된다. 복맑은탕 가격이 9000원. 반찬이 다양하게 나오는데 하나같이 단정하고 차분한 맛이어서 복탕의 맛을 살려준다.
거창읍의 옛 자생의원. 서양풍의 병원 건물에 입원실로 쓴 한옥이 덧대져 있다.
# 인문 없는 도시재생의 한계
거창읍에는 ‘옛 자생의원’이 있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지어진 자생의원은 거창 지역 최초의 근대 의료시설이었다.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이었던 성수현 원장이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개원해 50년 넘게 운영했다. 자생의원은 2006년 문을 닫았고, 성 원장은 이태 뒤에 세상을 떴다.
자생의원은 거창 사람들이 공유하는 대표적인 ‘집단기억의 공간’이다. 문을 닫자마자 유족이 병원시설을 기부하고, 거창군이 부지를 매입해 ‘거창근대의료박물관’으로 다듬어낸 이유다. 옛 자생의원은 최초의 근대 의료시설이란 의미도 있지만, 건물 자체의 건축적 미감도 훌륭하다.
박물관에는 당시 사진과 의료기구 등을 전시해놓았는데, 눈길을 붙잡은 게 박물관 한쪽에 전시해놓은 ‘거창만령단’이다. 거창만령단은 거창 신씨 문중에서 대대로 ‘영약(靈藥)’으로 전승돼오던 약이다. 200년쯤 전에 거창에서 한방의원을 운영하던 이가 눈병을 치료하러 온 스님을 1년 8개월 동안 치료해주고 얻은 처방이 바로 ‘만령단 비방(秘方)’이었단다. 만령단 비방은 5대에 걸쳐 전해졌는데, 1917년에는 매약업자 제조허가를 얻어서 일본, 만주, 중국, 인도까지 수출되기도 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건 만령단의 명맥이 끊기면서 후손이 기증한 자료다.
옛 자생의원 주변에는 ‘문화거리’가 있다. 한때 ‘거창의 명동’이란 불리던 옛 본정통인 원도심을 복합공간으로 다듬어냈다는 곳이다. 기대를 한껏 품고 찾아갔지만, 가보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믿기 어려운 건 도시재생사업을 한다면서 인문적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원도심 건축물의 내력이나 공간의 의미 등에 대한 최소한의 조사조차 하지 않은 건 거의 직무유기 수준이다. 원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가 어디고, 과거 원도심에 무엇이 있었는지, 골목 한쪽의 적산가옥이 어떻게 여태 살아남았는지 아는 이가 없다. 삼육슈퍼도, 정우당도, 승리양복점도, 옥이수선집도 스토리가 없이 간판만 있으니 거기를 찾아갈 이유가 있을 리 없다.
도시재생을 앞세워 타낸 예산은 ‘토목’에 다 썼다. 전신주를 없애고 전깃줄을 지중화했고 누더기 길을 다듬고 밝은 색조의 간판을 내걸었다. 적잖은 예산을 들였지만 결과는 ‘거리 정비’ 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던 셈이다. 그랬으니 새로 말끔히 칠한 페인트 위에 금세 다시 먼지가 덮이고, 주변의 가게는 공실이 늘어나고, 골목은 온통 불법주차 차량으로 어지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다.
결론은 거창 관광안내지도에 ‘문화거리’가 있다면, 굳이 가볼 이유는 없다는 것. 딱 한 곳, 옛 자생의원만 빼고. 아, 한마디 더 붙이자면 문화거리는 본래 ‘창조거리’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 ‘창조경제’에 발맞춘 작명이었다. 분명한 건 창조거리의 ‘창조’도, 문화거리의 ‘문화’도 거창 원도심에는 없다는 것이다.
■ 수승대의 돌거북 세 마리
수승대 인근 마을에는 ‘수승대 부근에 돌거북 세 마리가 나타나면 거창을 천년 먹여 살린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수승대에는 두 마리 돌거북이 있는데, 한 마리 거북이는 구연암으로도 불리는 수승대고, 또 한 마리는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가 딛고 올라선 암반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 직후 요수정 맞은편 천변에 거북 형상의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이로써 ‘돌거북 세 마리’가 완성됐다는 게 호사가들의 설명이다.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천포 (3) | 2024.01.29 |
---|---|
필름시대 극장, 폐쇄앞둔 기차역… ‘레트로 감성’ 빠져볼까 (2) | 2024.01.25 |
안동과 영주 (1) | 2024.01.15 |
붉은 해·빨간 동백·눈 내린 산사… 겨울이라 더 좋다 (0) | 2024.01.11 |
철따라 길따라 쌓은 추억… 돌아봐도, 다시봐도, 또 보고 싶구나 (0) | 2024.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