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우연히 만나서 더 오래 기억 깊숙이 간직하게 된 절집 나무
★ 1,197번째 《나무편지》 ★
지금 그곳의 배롱나무 꽃은 어떤가요? 다 시들어 떨어졌는가요? 아니면 아직도 이 여름의 끝을 붙안고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지요? 한 여름 내내 우리 사는 세상을 붉게 밝혀주던 배롱나무 꽃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아침 저녁, 옷깃을 스미는 바람 결에서 배롱나무 꽃 지는 소식이 담긴 듯해서 더 그렇습니다. 제가 사는 곳의 아파트 단지 안의 배롱나무 꽃은 아직 싱그럽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불러 젖히는 배롱나무 꽃의 여름 노래는 끝이 없네요. 여름 무더위에 지친 몸은 가을 바람을 그리워하지만, 배롱나무 꽃을 조금 더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중부지방, 경기도 부천시입니다. 예전이라면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배롱나무가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오래 되고 큰 배롱나무는 거의 남부지방에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등의 중부지방에서도 배롱나무가 잘 견뎌냅니다. 물론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만큼 훌륭한 모습으로 자라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돌아보면 지금 중부지방에서도 우리가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지구가 우리에게 보내는 아주 중요한 ‘시그널’일 겁니다. 날씨가 따뜻해졌다는, 지구 온난화의 사정이 시급하다는 신호 말입니다. 그냥 예뻐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을 한번 더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길 위에 오르는 대개의 경우가 나무를 찾아보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그런 목적을 모두 내려놓을 때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족여행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그런 길에서 굳이 “나무를 찾아가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지는 않습니다. 그런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나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나무들이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배롱나무 가운데에도 정말 아무 생각없이 나섰다가 우연처럼 만나게 된, 오래 기억나는 나무가 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교룡산 자락의 교룡산성 안쪽에 자리잡은 작은 절집 ‘선국사’에서 만난 배롱나무입니다.
나무를 만난 건 오래 전의 일입니다. 지금은 다 큰 딸 아이를 업고 산길을 오르느라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을 정도니, 대략 20년 전의 일일 겁니다. 겨우 절집에 이르러 등에 업힌 아이를 내려놓고 숨을 돌리려는데, 이 작은 절집의 법당 앞에서 붉은 꽃을 화창하게 피우고 서 있는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법당 앞 석탑을 휘감아 도는 듯한 자태로 휘어진 배롱나무의 맑고 깨끗한 줄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활짝 피어난 배롱나무 꽃은 더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필경 여느 배롱나무 못지않게 기억하게 되는 나무인데, 이상하게도 그 뒤로는 한번도 찾아간 적이 없는 나무입니다. 어쩌면 다시 찾아가지 못한 나무인 때문에 더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지난 여름에 만났던 나무, 혹은 꽃 가운데 지금 기억에 떠오르는 나무는 어떤 게 있으신지요? 무덥고 끈끈했던 지난 여름이 마침내 꼬리를 감추기 전에 한번 여름의 나무를 떠올려 보아야 할 시절입니다.
아직은 낮 햇살이 뜨거워 배롱나무 꽃을 볼 시간은 남아있습니다. 바람 더 선선해지기 전에, 아직 남아있는 배롱나무 꽃도 한번 더 바라보시며 서서히 스며오는 가을 향기, 풍요롭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9월 11일 아침에 1,197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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