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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정이품송의 ‘정부인’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얻은 큰 소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8. 28. 16:24

[나무편지]

정이품송의 ‘정부인’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얻은 큰 소나무

  ★ 1,195번째 《나무편지》 ★

  말씀드린 대로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는 〈보은 속리 정이품송〉의 ‘정부인송’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보은 서원리 소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굳이 누가 ‘정부인송’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든 말든 6백 년의 긴 세월을 말없이 바람 부는 대로, 구름 흐르는 대로 살아온 큰 소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보은 서원리 소나무〉입니다. 정이품송의 안부가 궁금해 찾아간 지난 주의 보은 답사 길에 우리의 〈보은 서원리 소나무〉도 함께 돌아보았습니다. 정이품송에서 〈보은 서원리 소나무〉까지는 지도상의 직선 거리로는 4킬로미터인데, 재 넘어 한적한 고갯길을 돌아들면 7킬로미터 쯤 걸립니다. 멀지 않은 길이어서, 언제나 정이품송을 찾을 때는 반드시 함께 돌아보게 되는 나무입니다.

  〈보은 서원리 소나무〉는 정이품송과 달리 뿌리 부근에서부터 줄기가 둘로 나누어진 채 우람하게 솟아 올랐습니다. 근육질의 굵은 줄기에서 느껴지는 힘이 저절로 느껴지는 기세입니다. 곧게 오른 중심 줄기 바깥으로 뻗어내린 나뭇가지는 큰 우산처럼 반듯하면서도 우아합니다. 한눈에도 정이품 벼슬을 한 우리의 소나무의 정부인으로서의 기품을 갖춘 나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무나이도 정이품송과 비슷한 600 살 쯤 되는 나무입니다.

  건강한 생육상태를 가진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번 답사에서는 가지 끝에 솔방울이 지나치다 해야 할 만큼 많이 달렸다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또 솔방울이 다닥다닥 달린 가지 끝 부분의 솔잎들도 몇해 전의 답사 때와 달리 한눈에도 무척 성글어졌다는 것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나무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태풍 피해로 큰 가지를 부러뜨린 정이품송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그의 정부인송인 〈보은 서원리 소나무〉의 건강 상태도 면밀히 조사해야 하지 싶습니다.

  소나무는 암나무 수나무가 따로 없는 암수한그루의 나무이니, 구태여 따지자면 ‘부부’의 연을 가지는 나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무에 기대어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 곁에서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옛 사람들은 오랫동안 한 그루를 기품 있는 선비로 여겼고, 다른 한 그루를 그의 배필로 여기며 ‘정부인송’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겁니다. 한 쌍의 부부 소나무는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 근엄한 기상의 선비로, 그를 따르는 푸근한 정부인의 모습으로 잘 살아왔습니다. 과학적인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질 게 아니라, 나무를 공생의 대상인 하나의 생명체로 여기고자 한 옛 사람들의 생각을 돌아보는 게 더 소중할 겁니다.

  〈보은 서원리 소나무〉가 정이품송의 정부인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게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왔다고만 전할 뿐입니다. 속리산 자락의 보은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소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인데다가 두 나무의 나이가 대략 6백 살 정도로 비슷해 보인다는 데에서 이 마을의 옛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것입니다.

  정이품송 못지 않게 훌륭한 나무이면서도 정이품송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진 정부인송은 정부인다운 기품을 갖췄습니다. 특이하게 정부인송은 뿌리에서 뻗어오른 줄기가 둘로 나누어지는 특징을 갖췄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줄기가 둘로 나눠진 나무를 대개는 여성형, 즉 할매나무로 불러왔습니다. 시골 마을의 나무를 찾아보면 그 중에는 ‘할배나무’ ‘할매나무’처럼 부부의 이름으로 부르는 나무를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곧은 줄기가 하나로 솟아오른 나무를 할배나무로, 둘로 갈라진 나무를 할매나무로 부르곤 합니다.

  정이품송의 정부인 이름으로 살아온 〈보은 서원리 소나무〉의 갈라진 두 줄기는 무척 튼실하게 솟아올랐습니다. 두 줄기 중 하나는 곧게 섰고, 서쪽으로 뻗은 한 줄기는 서쪽으로 조금 기운 상태이지만, 두 줄기의 사이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나무는 전체적으로 옹골찬 모습의 기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줄기에서 넓게 펼친 나뭇가지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 부러지고 찢겨나간 가지도 있고, 썩어 문드러진 나무줄기껍질도 눈에 들어옵니다. 오래된 그 상처들이 나무의 수명에 문제 될 만큼은 아니라고 보이는데, 문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뭇가지 끝에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매달린 솔방울들과, 가지 끝의 빈약한 솔잎들이 걱정을 일으킵니다.

  그래도 앞으로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끝까지 ‘정부인송’의 이름으로 남아주기를 기원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8월 28일 아침에 1,195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