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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아름다운 도시 ‘서울’을 진정 훌륭한 도시로 지키기 위해서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5. 4. 16:22

[나무편지]

아름다운 도시 ‘서울’을 진정 훌륭한 도시로 지키기 위해서는……

  

★ 1,178번째 《나무편지》 ★

  어린 시절의 학교에는 어떤 나무가 있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등 꽃 활짝 피어난 학교 그늘에 우두커니 앉아 어린 시절 뛰놀던 초등학교 교사 옆의 큰 은행나무를 떠올립니다. 학교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도시에서 다양한 나무를 풍요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특히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두에게는 그렇지 싶습니다. 울타리의 개나리 꽃에서 시작한 봄은 아늑한 그늘 쉼터의 보랏빛 등 꽃으로 이어지고, 울긋불긋한 봄 꽃 모두 지고 나면 짙은 초록 빛 그늘의 느티나무 은행나무 혹은 벚나무 양버즘나무 숲이 아이들을 끌어들입니다. 대개의 학교는 어린 시절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작지만 큰 자연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학교라면 그 학교를 먼저 다녔던 훌륭한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나무도 남아 있게 마련입니다.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옛 터에도 그런 큰 나무가 있습니다. 1887년에 서울 정동에서 ‘정동여학당’으로 문을 열고 1895년에 종로구 연지동으로 자리를 옮겨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는 1909년에 ‘정신여학교’로 확장합니다. 하지만 1939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바람에 일제 침략자들에 의해 학교재단이 해체되며 문을 닫고 맙니다. 일제 침략자들이 물러간 1947년 7월에 다시 정신여학교로 문을 연 학교는 얼마 뒤 지금의 정신여자중고등학교로 확대됩니다. 그 뒤 1978년 12월에 송파구로 옮겨가고, 옛 학교 터인 연지동에는 ‘서울보증보험’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옛 정신여고 터인 이 자리에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 한 그루가 남아있습니다. 〈서울 연지동 회화나무〉입니다. 이 회화나무는 이 학교의 선배인 독립운동가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 ~ 1944) 열사에 얽힌 이야기가 담겨 전합니다. 〈서울 연지동 회화나무〉는 나무나이 500년이 넘은 나무로, 김마리아 열사가 나무 줄기의 커다랗게 뚫린 구멍 안에 독립운동 관련 비밀 문서를 숨겨 보존해두었다는 이야기가 살아 있습니다. 열사의 자취를 증거하기 위해 나무 바로 곁에 ​독립열사 김마리아의 흉상을 세우고, 그와 함께 이 자리가 ‘정신여자고등학교’ 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놓았습니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어린 시절에 부모가 모두 돌아가셨는데, ‘반드시 대학까지 공부를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열 네 살 때인 1905년에 서울로 와서 그의 삼촌인 김필순(金弼淳)의 집에 머무르며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정신여고의 전신인 연동여학교로 전학해 1910년에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모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후배 교육에 열성을 다한 인물입니다. 연동여학교, 지금의 정신여고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선배이자 선생님인 겁니다.

  김마리아는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독립운동에 적극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의 사전준비운동에 나섰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지요. 겨우 석방된 뒤에 그는 정신여학교 교사로 지내며 애국부인회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이어갔지요.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지 않은 그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 운동에 가담한 일이 발각돼 다시 3년 형의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겨우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21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여성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옮겨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1935년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던 중 두 차례의 투옥과 고문 때 얻은 병이 재발하여 1944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김마리아 열사의 흔적을 간직한 〈서울 연지동 회화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원래 경사가 급한 언덕이었던 모양입니다. 나무의 위치 곁으로는 대형 주차장 터가 연결되는데, 그 터와 나무의 위치는 5미터 정도의 높이 차이가 있습니다. 주변 지형 평탄화 과정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주변에 석축을 쌓고 나무 보호 구역 안쪽으로는 화단을 조성했습니다. 화단 가장자리에는 철제 울타리를 설치했고, 화단 안쪽으로 다시 또 1미터 높이의 단을, 그 바깥 쪽으로는 2미터 높이가 되는 화단을 2중으로 쌓아서 나무 보호 공간을 넉넉하게 배려했습니다. 나무 보호를 위한 성의가 느껴지는 풍경입니다. 그 덕에 나무의 현재 생육 상태는 건강한 편입니다.

  〈서울 연지동 회화나무〉는 몸통을 이룬 줄기의 5미터쯤 높이에서 굵은 줄기가 넷으로 나뉘었는데, 그 부분에 큰 공동이 있었던 것을 외과수술로 처리하며 충전재로 메웠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김마리아 열사가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숨겼던 곳으로 이야기하는 자리입니다. 나무는 21미터 높이까지 잘 솟아올랐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4미터를 조금 넘습니다. 사방으로 넓게 펼친 나뭇가지 펼침폭은 동서로 15미터, 남북으로 13미터쯤 됩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우리나라의 오래 된 여느 회화나무에 비해 뒤지지 않는 규모입니다. 게다가 전반적인 나무 생김새도 무척 수려한 편입니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사람들의 성의가 눈에 띄는 게 사실이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나뭇가지를 펼친 한쪽으로는 ‘목소리학교’라는 건물이, 다른 한쪽으로는 ‘골프연습장’ 건물이 나무높이보다 높이 올라가 있는 탓에 나무의 경관적 가치를 더 높일 수 없는 상황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나뭇가지의 일부가 양쪽으로 틀어막힌 건물 벽에 닿아있는 지경입니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싶긴 합니다만, 장기적으로 보아 치명적인 장애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또 주변 건물들이 드리운 그늘에 파묻혀 자랄 수밖에 없는 현재 사정도 나무의 생육에는 필경 좋지 않겠지요. 더 아쉬운 건 개선의 여지를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위해서라면 양쪽의 건물을 들어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데, 과연 서울에서 그게 가능하겠느냐는 겁니다.

  큰 산과 큰 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입니다. 특별한 조형물 몇 개 더 세운다고 더 훌륭한 도시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서울의 깊은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살이의 자취를 온전히 지켜내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유럽의 도시를 찾는 여행객들은 모두가 그곳에 남아있는 옛 문화예술의 자취에 감동합니다. 옛 사람들의 살림집까지 고스란히 지킬 뿐 아니라, 옛 거리의 흔적을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좁은 골목을 유지한다는 데에 큰 감동이 있다고 모두가 입을 모읍니다.

  지금 우리의 서울이 세계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유서깊은 역사적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 무얼 어떻게 지켜아 할지 곰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5월 1일 '노동절' 아침에 1,178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