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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3〉 부산 150여개 고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4. 4. 16:03

물 귀하고 변 넘치고…100억 사기도 판친 고갯마루

중앙선데이

입력 2023.04.01 00:21

업데이트 2023.04.0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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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3〉 부산 150여개 고개

부산 만덕고개길 병품암석불사 바위에 새겨진 석가모니·미륵·나한 등 석불 수십 기는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조각가 김석담과 박판암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김홍준 기자

“물은 귀했지, 똥은 넘쳤지. 다 비탈져서 그런가 싶었어.”

노인은 가게 물건을 계속 정리했다. 부산 대티고개마을. ‘만복슈퍼’를 꾸리는 김현선(74)씨의 얼굴이 잔뜩 상기됐다. “술 안 마셨다니까!” 노인은 이렇게 말하며 기자의 팔을 탁, 가볍게 쳤다. 붉고 거친 그의 볼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한겨울이라 더 귀해진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후다닥 애들 학교 배웅하랴, 일 보러 나가랴 닦을 틈이 없었어. 그래서 얼굴이 이렇게 된 거야. 작은 가게라도 바쁘다 보니, 병원 갈 틈도 없었지.”

다닥다닥 붙은 집 중 하나. 그곳에서 9명이 옹기종기 살았다. 삶의 고단함과 물의 귀함은 그의 붉게 얽은 얼굴에 드러났다.

부산은 고개의 도시다. 150여 개의 고개가 도시 곳곳에 있다. 그 중 대티고개는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잇는, 우뚝 솟은 언덕이자 높다란 고개인 대치(大峙)에서 비롯됐다. 수십 년 전 승학산 자락에 자리잡았던 허름한 집들은 사진에서 보듯 위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비어져 가고 있다. 김홍준 기자

대티고개. 대치(大峙)에서 변한 이름이다. ‘큰’은 물론이고, ‘높은’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모자라지 않다.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잇는 이 고개는 판자촌 화재로 갈 곳을 잃은 한국전쟁 피란민을 껴안았다. 일제강점기 1937년 이곳에 만들어져 1970년대 초반까지 가동된 분뇨처리장은 부산의 모든 변을 받아냈다.

 

이처럼 부산의 고개는 자연의 일부로, 관광형으로 승화한 고개들과는 다르다. 한국전쟁 피란민이 삶을 이어가기 위한 터전이 됐다. 그러면서 고개의 판잣집은 다세대 주택으로, 아파트로 변했다. 힘들게 우물을 팠고, 공동 수도를 썼으며 뒤늦게 개별 수도관이 만들어졌다. 고개 위로 소리소문 없이 도로가 깔렸다. 한국전쟁 직후 고개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고개를 점령했다. 그 아이들은 커서 좀더 살기 좋은 고개 아래로 떠났다. 부산의 고개를 무릇 ‘생계형 고개’라고 부를만하다. 『부산의 고개(출판사 비온후』를 쓴 동길산 시인은 “부산의 고개는 도시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시 개발로 깎이고 틀어졌지만 그나마 남은 고개들이 삶의 원형을 지켜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동길산 시인 “부산 고개, 도시의 원형”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서 명장동으로 이어지는 인생문 고개는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넘어간 이들이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이어갔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김홍준 기자


부산에는 150여개의 고개가 있다. 남북 방향의 낙동정맥과 동서 방향의 낙남정맥이 부산에서 만난다. 고개가 많은 이유다. 가히 부산은 고개의 도시다. 도시의 길흉화복이 고개에서 갈라졌다. 고개에는 생과 사가 오가기도 했다.

인생문고개가 있다. 동 시인은 동래구 칠산동과 명장동을 잇는 이 고개를 칭하며 “부산의 제삿날”이라는 말을 꺼냈다. 제삿날은 음력 4월 15일. 1592년 그날이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3만여 병력으로 동래성을 포위했다. 왜군은 동래성 북문과 동문 사이의 ‘약한고리’인 현재의 인생문을 집중 공격했다. 동래성이 넘어갔고 숱한 희생자가 생겼다. 한데, 이 고개를 먼저 넘어간 사람들은 목숨을 건져 삶을 이어갔으니 인생문고개라고 이름 붙었단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어스름.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혈육이나 혈육 같은 이들의 손을 잡고 장애우가 인생문고개를 넘어간다. 한 쌍, 두 쌍, 세 쌍…. 근처에는 장애우 학교가 있다. 그 학교도 한국전쟁 난리 통에 온 서울의 학교가 남긴 곳. 더 나은 인생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이 인생문고개를 점점이 지나가고 있었다.

초읍고개 밑 한국전쟁 중 전기 들어와

 

한국전쟁 당시 한국은행도 부산에 피란 왔다. 직원들은 살기 좋은 초읍을 선호했다. 그런데, 전기가 안 들어왔다. 초읍에 전기가 들어온 건 1953년 6월. 전쟁 덕이라고 해야 할까. 전쟁의 어두움을 쫓아내려 했을까. 여하튼 초읍고개 아래 초읍동 새마을금고 앞에는 올해 70년을 맞은 전기가설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주민들이 만든 이 비석 옆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특별공로자 한국은행.’

부산 부산진구 초읍동에서 연제구 거제동으로 이어지는 초읍고개는 1970년대에 도로가 생겼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한국은행 직원들은 초읍동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전기가 들어왔다. 초읍동전기가설기념비가 초읍동 새마을금고 앞에 세워져 있다. 김홍준 기자

부산진구 초읍동과 연제구 거제동을 잇는 오솔길. 그게 초읍고개였다. 주민들은 해방 직후 소달구지가 지날 정도로 넓혔다. 고개를 지키던 큰 소나무 한그루는 어떤 집의 기둥이 됐을까, 땔감으로 제 한 몸 불태웠을까. 월드컵대로 8차로로 변신한 고개는 말이 없다.

“따라와 보세요.” 망미고개의 우암사. 금련산(415m)에서 만난 하대윤(63)씨가 절에 들어서자마자 앞장섰다. 굴은 100m 가까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막다른 곳으로 보이는 곳에 작은 기도 터가 있다. 하씨는 “굴은 위로 더 이어지는 데, 지금은 막아놨다”고 말했다.

부산 금련산과 배산을 가로지르고, 수영과 양정, 또는 연산을 잇는 망미고개. 금련산 우암사는 일제강점기에 지었다는 흥미진진한 동굴이 있다. 김홍준 기자

우암사 관계자에 따르면, 굴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단다. 금련산 우암사에 오르면 수영구와 연제구를 잇는 망미고개가 보인다. 하씨는 맞은 편 배산(255m)에 자신의 집이 있다고 했다. 집은 옛 망미고개 마루에 ‘정확히’ 있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집 앞에는 수영구와 연제구를 나누는 푯말이 있다.

그런데 ‘옛 망미고개’라니. 현재의 망미고개는 부산 도시철도 3호선 라인이자, 도로명 연수로지만, 원래 망미고개는 배산 쪽으로 치우친, 그러니까 망미중학교 앞길이었다. 하씨가 “어른들에게서 그렇게 들었다”고 말했고, 동 시인도 “그 길이 옛 망미고개”라고 확인했다. 하씨의 아내는 서울 은평구 출신. 그런데 부산 사투리가 억세다. 그는 “부산에 오면 부산 사람이 되는 거지요”라며 웃었다.

부산 금련산과 배산을 가로지르고, 수영과 양정, 또는 연산을 잇는 망미고개. 배산에서 망미고개 너머 금련산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부산 금련산과 배산을 가로지르고, 수영과 양정, 또는 연산을 잇는 망미고개. 금련산 우암사에서 배산을 바라보면, 중간에 망미고개가 넘어간다.김홍준 기자

“어서 오소.” 만덕고개 병풍암석불사에서 만난 전북 남원 출신의 형창우(63)씨도 억센 부산 사투리로 말했다. 세운 지 100년도 안 된 절. 석불사에서는 고풍미라도 건질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발 한발 다가설수록 신묘함이 크레센도처럼 커진다.

목재를 쓰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과 칠성각이 화강암이다. 이 두 전각 사이 좁은 계단을 짧게 오르면 널따란 공간이 나온다. 바위가 전면과 좌우로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석불 수십 기가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조각가 김석담과 박판암의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망미고개에는

산성고개는 부산의 진산 금정산의 고개다. 금성동에서 장전동 사이의 고갯마루 위 산성으로 한 등산객이 지나가고 있다. 김홍준 기자

부산 갈치고개는 어류 갈치와 관계가 없다. 갈대가 우겨져 갈대고개가 됐다가 갈치, 그리고 갈치고개가 됐다고 한다. 자전거 라이더들이 갈치고개를 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우암사 석굴, 만덕고개에는 석불사 석불. 신묘한 내세 기원의 장소와 도구는, 팍팍한 현세의 반증인지도 모른다. 갈치고개·배고개·산성고개·성북고개…. 어디나 녹진한 삶이 넘어가고 넘어왔다.

피란·재개발 얽힌 '생계형 고개'

전국의 숱한 아리랑고개는 부산에도 두 곳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영도의 청학고개인데, 현재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김홍준 기자

전국의 숱한 아리랑고개는 부산에도 두 곳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영도의 청학고개인데, 현재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김홍준 기자

“어이구, 우리 같은 없는 사람만 남았지 뭘.”

영도 청학고개는 아리랑고개로도 부른다. 노인은 성치 않은 무릎 치료를 위해 시내에 다녀왔단다. 고개를, 다시 고개 위 계단을 오르느라 기껏 치료받은 무릎에 병을 다시 키웠다. 고개는 재개발에 들어갔다. 일명 ‘딱지’를 받은 사람은 이미 다 떠났다고 노인은 말했다. 고갯마루의 포크레인이 노인의 집을 언제 밀어붙일지 알 수 없다. 고개, 그리고 그 계단 위 높다란 곳. 노인은 좀 더 좋은 곳으로 편하게 내려올 수 있을까.

부산은 고개의 도시다. 150여 개의 고개가 도시 곳곳에 있다. 그 중 대티고개는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을 잇는, 우뚝 솟은 언덕이자 높다란 고개인 대치(大峙)에서 비롯됐다. 사진은 괴정동 대티은화맨션에서 바라본 대티고개. 김홍준 기자

다시 대티고개. 변정자(73)씨가 말했다. “원래 저 위 승학산 자락에서 살다가 지금 사는 곳까지 고작 수십 미터 내려오는 데 수십 년이 걸렸지.” 고개의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노인이 많아진다. 좀 더 나은 낮은 곳으로 옮기기 위해, 고개의 마을들은 위에서부터 점점 쇠락해 간다. 이 고개의 A씨는 2008~2010년 벌어진 ‘대티고개 100억원 사기사건’의 피해자다. 그는 “목돈이라도 만지고 싶어 계에 들었는데, 우리 가족이 자그마치 1억을 날렸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동 시인이 말한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가 넘었던’ 부산의 고개. 그곳에는 살자는, 생(生)의 문제가 뚜렷이 박혀 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