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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강원도 칠족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11. 16:19

개가 고개 이름 만들었다…동강 U라인, 뼝대 V라인이 빚은 명승

중앙선데이

입력 2022.12.10 00:01

업데이트 2022.12.10 08:22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20〉 - 강원도 칠족령 

U와 V. 

여기는 모든 게 가파르다. 고개에 올라서면 동강은 360도 U턴하듯 줄기를 숨 가쁘게 틀어버린다. 동강을 낀 절벽은, 강원도 말로 치면 뼝대는, 강 건너 기울기 급한 산비탈과 함께 V자를 그린다. 강원도 백운산 칠족령(漆足嶺)에서 바라보는 U라인과 V라인 비경이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과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을 잇는 백운산 칠족령에서 바라본 동강과 뼝대(절벽). 칠족령은 2021년12월 명승으로 지정됐다. 김홍준 기자

 

물은 강원 정선에서 조양강이 되고 영월 동쪽에서 동강이 된다. 그러면서 지나온 자신의 줄기와 포개질 듯 말 듯, 얼싸안을 듯 말 듯 이어진다. 칠족령 전망대에서만 U자 굽이가 세 곳 펼쳐진다. 고갯길에서 보는 물길은 동강 12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비경은 칠족령을 지난해 12월 명승(名勝·제129호)의 반열에 올린 주역이다.

명승이 뭔가. 채제공(1720~1799)이 『번암집』에서 말한다.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으로 만든다. … 그러나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원호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은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을 명승으로 삼지만, 권력이 있다고 독점해서는 안 되며, 여러 사람과 자연이 교감해야 서로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말”이라고 해석하며 “채제공은 당시 자연유산분야의 전문가”라고 밝혔다.

 

동강 백운산(882m) 칠족령에 가기 위해서는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을 통하거나,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을 들머리로 이용한다. 칠족령 입구 격인 백룡동굴탐방소까지 이어지는 강변도로가 4km 이어진다. 김홍준 기자

 

조선 사대부의 명승에 대한 욕망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도 나온다. 순조 때 대사헌 조득영이 외척 박종경의 행실에 대해 상소했다. ‘동암(東巖)에 있는 명승의 지대(池臺)는 주인이 본디 있는데도 어렵지 않게 빼앗아 친구들과 술 마시는 놀이터로 만들었으니…(순조 12년 11월 7일).’ 영조 때 이언세는 삼정승의 비리를 상소했다. ‘광주(경기도)의 몽촌은 옛날부터 명승이었는데, 권문세가 가운데 선산을 구하는 자들은 누가 이곳에 군침을 흘리지 아니하였겠습니까(영조 20년 10월 14일).’ 명승은, 채제공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서는 이렇게 학문과 수양·유희의 공간이자 죽어서는 무덤이 되기도 하는 곳이지만 권력자가 사유(점령)하는 대신 공유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명승 칠족령은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과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을 잇는다. 개가 고개 이름을 지었다. 어느 선비의 개가 사라졌다. 옻나무 진액을 밟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개의 발자국이 이어져서 더듬더듬 찾아가다 보니, 동강과 뼝대의 장관을 보고 뒤집어질 뻔했단다. 옻칠(漆)과 다리 족(足)이 합쳐 칠족령이라는 이름이 태어났다는 설이다. 지난달 3일, 하나의 고개를 만나기 위해 다른 고개를 먼저 만나야 했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은행나무는 수령 1000년이 넘었다. 높이 29m, 둘레 14.8m이다. 대정사(對井寺)라는 절 앞에 서 있었으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에서 동강 백운산(882m) 칠족령의 북쪽 들머리인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로 향하면 또 다른 고개들을 넘어야 한다. 영월군 북면 분덕재(472m) 근처에서는 2020년 12월 터널공사 중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긴(1.71km) 석회동굴이 발견됐다.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들은 이 동굴이 '천연기념물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S와 I. 

고개들은 S자로 급격하게 꺾인다. 굴곡진 S라인 고개를 일직선 I로 다림질한 듯, 터널이 곳곳에 있다. 영월 하송리 1000년 은행나무의 새벽 배웅을 받아 칠족령의 들머리인 문희마을 백룡동굴탐방안내소로 향하면 소나기재·분덕재·밤재 등을 만난다.

 

2020년 12월, 벼락처럼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1720m)로 긴 석회석 동굴이 드러났다. 분덕재터널 공사 중이었다. 공사는 현재까지 2년째 올스톱. 영월군 관계자는 “내년 하반기에 천연기념물 등록 여부가 결정 난다”며 “천연기념물이 안 되더라도 강원도 지정 기념물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백룡동굴은 길이 1875m로, 백운산의 '백'과 1976년에 동굴을 발견한 정무룡씨의 '룡'을 합쳐 이름을 만들었다.

동강 백운산(882m) 칠족령에 가기 위해서는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을 통하거나,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을 들머리로 이용한다. 제장마을로 가기 위해 지나는 신동읍 고성리의 고성터널은 차 한 대가 간신히 통행할 수 있는 '왕복 1차로 터널'이다. 마주오는 차보다 늦게 들어서면 후진을 해서 양보하는 게 이 터널의 '룰'이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예리리와 고성리를 잇는 고성터널. 길이 596m, 폭 3.5m의 왕복 1차로 터널이다. 조명, 신호등도 없다. 맞은편에 차가 달려오면 나중에 진입한 차가 후진해서 빠져나와야 한다. [중앙포토]

 

영월에서 칠족령의 또 다른 들머리인 제장마을로 향하면 구리기재(고성리재)를 만난다. 이곳 밑으로 고성터널이 뚫렸다. 동강 물을 정선으로 넘기는 수도관이 지나간다. 그런데 터널이 '왕복 1차로'이다. 편도 1차로, 왕복 2차로가 아니다. 차가 마주 보며 달릴 수 있다는 말이다. 터널 앞 산불감시원이 말했다. “나중에 들어선 차가 후진해서 양보해야 한다”고. 조명도 신호등도 없다. 길이 596m, 폭 3.5m의 심장 쫄깃해지는 터널이다.

백운산에 오른 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에 내려선 둔내수요산악회 회원들. 김윤종(79, 왼쪽 두 번째) 회장 일행은 강원도 둔내에 사는 회원의 안내로 매주 수요일 강원도의 산을 찾고 있다. 김홍준 기자

 

과거 기사를 하나 소환해야 한다. ‘동명이산(2019년 11월 16일 자 28면)’이다. 산림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은 4400개. 같은 이름 다른 산(동명이산)이 371곳에 이른다. 봉화산이 47개로 가장 많다. 백운산도 전국 11곳이나 된다. 칠족령은 그중 한 곳, 강원 정선·평창에 걸친 백운산(882m)에 있다. 이름값으로 치면 전남 광양 백운산(1218m)이 더 나간다고도 하지만, 칠족령이 있는 백운산도 어엿한 100대 명산에 든다. 백운산 칠족령에 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백운산(강원 정선·영월, 1426m)을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당시 기사에 이렇게 적었다. ‘동강산장 지기가 “하산 때 길을 주의하라”고 말한 것처럼 등산로를 단단히 익혀놔야 한다. 어느 길은 동강 앞에서 끊긴다. 되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첩첩산중에 갇히지 않으려면.’ 고개가 ‘리(里)와 리’를 잇는다고 표현하고 말면 칠족령에서는 당황스럽다. ‘마을에서 마을’로, 심지어 지번까지 찍어야 할 정도로 물샐 틈 없는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연포마을의 예미초등학교 연포분교는 차승원 주연의 '선생 김봉두(2003년 개봉)'가 촬영된 곳이다. 학교는 이미 영화 촬영 전인 1999년에 폐교됐고 현재는 캠핑장으로 사용 중이다. 김홍준 기자

 

“어휴, 말도 마요. 길 잘못 들어서 뼝대에서 달려 내려와 수영으로 동강을 건너오더라고요.”
덕천리 연포마을의 박옥분(74)씨는 “종종 길을 헷갈려서 잘못 내려서는 사람이 있더라”고 말했다. 문희마을에 주차한 뒤 백운산 산행 뒤 연포마을로 내려서면 차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기사에 쓴 것처럼 산을 되돌아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택시 잡기도 힘들다. 박씨에 따르면 택시는 이틀에 한 번꼴로 이곳에서 운행한다. 설사 택시를 탔더라도 7만~8만원 나온다. 뼝대와 동강은 이렇게 삶과 삶 사이의 빠른 연결을 막아섰다. 들어감과 나감이 헷갈리지만, 고갯길은 순하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C와 Z.

문희마을에서 출발하면 사면을 따라 완만한 C자로, 맞은편 제장마을에서는 역시 사면을 따라 Z자로 접근한다. 사면이 다소 급해서 기울기를 줄여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기 위해 옛 사람들이 Z자로 길을 낸 것이다. 정선 쪽, 평창 쪽 각각 1.5㎞씩 3㎞ 중간의 고갯마루가 얼렁뚱땅 넘어간다. 대부분의 고개처럼 절정이 봉긋하지 않다. 칠족령 고갯길은 애써 정상으로 향하지 않는다. 마을에서 마을로 가장 편하게, 짧게 갈 수 있는 사면으로 길이 났다. 전망대는 비로소 이곳이 고갯마루임을 알려준다.

칠족령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과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을 잇는 백운산의 고개다. 칠족령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안부(鞍部)가 아니라 산의 사면(斜面)에 생긴 길이다. 때문에 길이 좁아 방심할 틈이 없다. 김홍준 기자

언제부터 칠족령이라고 불렀는지는 불분명하다. 1807년 순조의 명으로 만든 『만기요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1872년 지방지도인 ‘평창군오면지도’에도 칠족령이 표시돼 있다. 문희리(문희마을)에서 평창의 곡류를 저장했던 동면내창(동면은 강원도 평창군이었으나 1906년 정선군에 편입)과 동면외창까지 이어진다. 동면내창 앞 동강 건너편에 평안역원이 있었다. 평안역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보안도(保安道) 30개 속역 중 하나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부터 조선 후기 『대동지지』까지 줄곧 등장한다. 1896년 갑오개혁 때 철폐됐다. 내창·외창에 역까지 잇던 칠족령은 그만큼 중요한 동남쪽 통로였다.

칠족령 고갯길은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 뽑혔다. 길은 폭 1m가 채 안 되는 곳도 있어 어깨를 산 한쪽에 비비고 가기도 한다. 여름이면 햇빛 샐 틈이 없을 정도로 숲이 우거진다. 지금은 지난 가을이 만든 낙엽에 다리가 푹푹 빠지는 '낙엽 러셀(russell, 눈을 발로 쳐내며 길을 다지면서 전진)'을 즐길 수도 있다.

칠족령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과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을 잇는 동강 백운산(822m)의 고개다. 2021년 12월 국가지정 명승으로 지정됐다. 칠족령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김홍준 기자

 

그 숲에서 서류와 펜을 손에 든 남성이 나타났다. 박인규(52) 산림청 주무관이 숲길 조사차 나왔단다. 그는 전망대에서 동강과 뼝대의 어울림 앞에 서더니 “아, 이래서 사람들이 그러는구나”라며 혼잣말을 했다. 백운산 정상에 다녀오던 김윤종(79) 둔내수요산악회 회장은 “별천지”라며 칠족령에서의 느낌을 말했으니, 박 주무관의 혼잣말에 대한 답이 될까. 전망대 마루가 부서지고, 고갯마루 표지판이 엎어진 건 명승에 대한 대접치고는 아쉽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에 사는 함복례씨는 근처 어라연에서 나고 자라 결혼을 하며 이곳에 정착했다. 그가 '자급자족을 위해 기른다'는 채소밭 너머의 길이 칠족령으로 향하는 들머리다. 김홍준 기자

칠족령의 남쪽 들머리인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제장마을에서 사과를 따고 있는 주민 이정섭(70)씨. 사과처럼 그의 미소가 싱그럽다. 김홍준 기자

문희마을에서 함복례(56)씨가 밭을 솎는다. 고개 건너편 제장마을에서 이정섭(70)씨가 사과를 거둔다. "이 밭에서 이번 겨울 먹을거리를 해결해요."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사과 풍년은 아니지만, 흉년은 아니라 다행이죠."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웃는다.

칠족령에서 내려와 영월로 되돌아가는 새까만 밤. 칠족령이란 이름을 만든 개의 발바닥처럼 칠흑(漆黑)의 시각이었다. 뼝대를 둘러가는 동강은 위태위태한 U자를 그리지만 끊기지 않는다. 칠족령을 끊임없이 넘나든 옛 삶을 되짚듯, 다시 하송리 1000년 은행나무다.

 

김홍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