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 없이 단숨에 닿은 雪山… 구름다리 아래 아찔한 ‘눈꽃 세상’
[박경일기자의 여행]
눈꽃에다 상고대까지 피어난 날의 대둔산 풍경. 온통 순백의 풍경 속에서 사다리처럼 가파르게 놓인 삼선계단을 타고 왕관바위에 오른 등산객의 모습이 마치 수묵화에 점 하나를 찍은 듯하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겨울이라서’ 좋은 전북 완주
케이블카로 대둔산 쉽게 올라
상고대 본 뒤 온천서 추위 풀어
병풍바위에 만든 인공 얼음벽
눈 속 푹 파묻힌 ‘화암사’ 비경
사람들 떠나고 쇠락한 삼례읍
양곡 창고는 문화예술촌 변신
천지창조 패러디作 ‘천지차이’
결혼 전후 여성 삶에 웃음 팍!
삼례 북하우스엔 헌책들 빼곡
유휴열미술관은 詩·그림 엮어
누에 단지·그림책 미술관 등
어린 자녀와 둘러보기에 좋아
전국 최초의 ‘로컬푸드 마켓’
그 날 아침에 딴 잘익은 딸기
품질·香 남다른 ‘봉동생강’등
100여 종 특산품 장보는 재미
완주=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겨울 여행지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겨울이라서’ 좋은 곳과 ‘겨울이라도’ 좋은 곳. 그렇다면 전자에 한 표입니다.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진 매력을 흠뻑 느껴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전북 완주에서 그런 곳들을 찾아봤습니다. 익히 알려진 공기마을 편백숲이나 떠오르는 명소인 아원고택을 덜어내기 했던 건, 거기가 겨울과 잘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삼례문화예술촌과 북하우스, 그리고 오래된 누에농장을 다듬어낸 복합문화공간 누에, 그리고 몇 곳의 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다른 계절에는 초록의 풍경에 눈이 팔려 잘 들여다보지 않을 곳들이지만, 혹한의 겨울이라면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는 곳들입니다. 겨울이라 가보게 되는 곳, 그래서 그 매력을 비로소 알게 되는 곳들을 모아 봤습니다.
# 눈꽃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대둔산
눈 내린 직후에 피는 눈꽃이나 가지마다 서리가 얼어붙은 상고대가 화려하기로 이름난 산은 많다. 그런데 실제로 눈꽃이나 상고대가 핀 모습을 보는 건 쉽잖은 일이다. 눈발이 날리거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산행을 감수해야 하는 까닭이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아이젠과 스패츠, 스틱과 보온 의류까지, 겨울철 설산 등반을 위해 갖춰야 할 장비는 좀 많은가.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눈꽃과 상고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등산에 별 취미가 없고 장비를 갖추지 않았어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단숨에 산으로 올라붙으면 된다. 케이블카나 곤돌라가 설치된 강원 지역의 스키리조트나 덕유산 같은 해발고도가 높고 큰 산은, 그렇게 오른다 해도 동절기 등산 장비를 다 챙기고 방한복도 든든하게 갖춰 입어야 한다. 아무리 산행이 쉽다 해도 엄동의 혹한에 피어나는 눈꽃이나 상고대를 보고 오려면 산책하듯 다녀올 수는 없는 노릇이란 얘기다.
그런데 여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전북 완주의 대둔산. 대둔산에서는 단숨에 설경이나 상고대를 보고 올 수 있다. 대둔산 칠분 능선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가서 거기서 급경사의 철계단을 딛고서 숨이 좀 차다 싶을 만큼만 올라서면, 금강구름다리 앞에 닿게 된다. 대둔산을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눈꽃과 상고대를 볼 수 있는 자리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여기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린다.
지금이야 영 예전만 못하지만 대둔산은 과거 ‘남한의 소금강’이라고 불렸을 만큼 명성을 자랑했다. 대둔산의 명물은 단연 두 개의 구름다리다. 하나는 임금바위와 입석대 사이에다 놓은 금강구름다리이고, 다른 하나는 왕관바위를 오르는 삼선구름다리다. 금강구름다리는 1975년 국내 최초로 놓인 구름다리다. 신공법의 다리를 처음 놓았을 만큼 대둔산이 유명했다는 얘기다. 구름다리는 1985년에 주탑을 세운 현수교로 다시 지어졌는데, 이것도 국내 최초였다. 지금 구름다리는 2021년 7월에 다시 지은 것이다.
# 구름다리와 계단, 그리고 온천
81m 높이의 협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금강구름다리도 아찔하지만, 더 강렬한 건 삼선구름다리다. 삼선구름다리는 왕관바위의 수직 직벽에다 걸쳐놓은 아찔한 사다리처럼 보인다. 구름다리가 아니라 ‘삼선계단’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이유다. 계단 경사가 어찌나 가파른지 난간을 붙잡고 올라서는 내내 가슴이 두방망이질 친다. 만만하게 봤다가 중간쯤에서 오금이 저려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1975년 금강구름다리와 함께 만들어진 삼선구름다리는 1985년에 같이 고쳐 지어졌다.
대둔산 케이블카는 구름다리에 비하면 늦게 만들어졌다. 1988년 5월 착공해 1990년 11월에 완공됐다. 운행 구간은 927m, 경사도는 28도, 두 대가 교행하며 운행하는 케이블카의 정원은 51명이다. 눈꽃이나 상고대를 보려면 되도록 이른 시간에 올라가는 게 좋다. 케이블카는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첫 운행 시간은 오전 9시부터다.
체력과 함께 겨울 산행 장비까지 갖췄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두 개의 구름다리를 지나 정상 마천대를 찍고 내려오는 걸 권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금강구름다리 앞까지만 다녀와도 좋다. 온 산 가득 화려하게 피어나는 눈꽃과 상고대를 만나는 게 목적이라면 거기까지만 가도 충분하다. 염두에 둬야 할 것은 눈 내린 직후거나 혹한의 날씨를 겨눠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 그래야 눈꽃이나 상고대를 볼 수 있다. 케이블카 하부 정류장이 있는 느새골에는 관광호텔에 딸린 대둔산온천이 있다. 지하 620m에서 끌어올리는 약알칼리성 유황온천이다. 용출온도는 법적 온천 기준 25도를 살짝 뛰어넘는 26도. 데워서 써야 하는 물이지만 그래도 온천은 온천이다. 대둔산에서 눈꽃을 보고 와서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진다. 대둔산은 해마다 가을 단풍철이면 행락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이즈음은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온천도 썰렁하다고 느껴질 만큼 한가하니 고즈넉하게 막바지 겨울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완주 병풍바위에 조성한 거대한 인공 빙벽에서 산악회원들이 훈련하고 있다.
# 수직의 병벽, 그리고 눈 속의 절집
눈꽃이나 상고대 못잖은 겨울의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 운주면 고당리 선녀봉 아래 ‘병풍바위’다. 병풍바위는 물길을 끼고 펼쳐놓은 병풍처럼 수직의 벼랑이 우뚝한 곳에 들어선 휴게소 겸 캠핑장의 이름. 빙벽 등반을 주로 해온 지역 산악회가 이곳에서 겨울 훈련을 하기 위해 캠핑장 대표와 의기투합해 2021년부터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얼음을 얼려 인공 빙벽을 만들었다. 산악회원과 동호인들 사이에서 인공 빙벽이 알음알음 알려지다가 거대한 얼음벽의 경관에 반한 여행자들이 하나둘 몰려들면서 병풍바위는 불과 2년 만에 완주 겨울 여행의 명소가 됐다.
폭포의 물줄기가 덧대지면서 얼어붙어 만들어진 거대한 빙벽은 석회동굴의 종유석을 닮았다. 커튼처럼, 화려한 레이스처럼, 다양한 형상으로 얼어붙은 얼음벽은 마치 예술 작품을 방불케 한다. 빙벽의 모습도 근사하지만, 수직의 까마득한 빙벽에 붙어서 등반하는 이들도 장관이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빙벽 등반을 해볼 수도 없고, 수시로 떨어지는 얼음이 위험해서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겨울왕국’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이다. 지금은 훈련된 산악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빙벽뿐이지만, 바위 아래 천변의 빙판에서 얼음을 지치거나 썰매를 타는 공간까지 만들어 놓는다면 제법 알찬 겨울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안도현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잘 늙은 절’이라고 한 화암사. 산중의 절집에 눈이 내려 쌓였다.
또 한 곳 겨울에 추천할 곳이 완주 북쪽 불명산 골짜기의 절집 화암사다. 변변히 내세울 것 없는 작은 절집이었는데, 안도현 시인의 시(詩) ‘화암사, 내 사랑’으로 유명해졌다. 시인은 고즈넉한 절집 화암사를 시에서 ‘구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라고 표현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절집 안에서는 오래된 시간이 편하게 느껴진다. 화암사에 가본다면 절집보다 시인에게 더 감탄하게 될지도 모른다. ‘잘 늙은 절집’이란 적확한 표현의 절묘함 때문이다. 유명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암사가 사람들의 발길로 번잡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에는 더 그렇다. 절도 절이지만, 진공 같은 침묵의 겨울 숲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오솔길이 더 좋다. 특히 눈 내린 다음 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다면, 그래서 눈 속에 푹 파묻힌 화암사를 보게 된다면, 그 풍경이 오래 가슴에 남아 두고두고 꺼내 보게 될 게 틀림없다.
# 쇠락해가는 삼례읍의 헐렁한 매력
완주는 정부로부터 공식 지정을 받은 ‘문화도시’다.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된 건 지난 2021년의 일. 하지만 정부가 지정하건 말건 그 이전부터 완주는 명실상부한 문화도시였다. 완주에는 문화를 누리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있다. 대표적인 곳이 삼례읍의 삼례문화예술촌과 삼례책마을이다. 여기다가 2021년 개관한 어린이책 박물관도 있다.
완주의 삼례읍은 들여다볼수록 흥미로운 곳이다. 곳곳에 오래되고 낡은 풍경이 있고, 그걸 재생사업으로 다시 꾸며낸 감각적인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이게 본래 그런 건지, 아니면 다듬어 낸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공간까지 뒤섞여 있다. 삼례읍에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건 진작 개발에 소외된 탓에 다른 도시와는 달리 적당히 이격(離隔)한 건물과 집들이 헐렁하면서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먼저 ‘삼례’란 지명에 얽힌 이야기부터. 삼례읍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동생 이방원과 권력 다툼을 벌였다가 패한 이성계의 넷째 아들 이방간이 귀양 와서 칩거했던 곳이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왕족에 대한 예의로 이방간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세 번 절하는 삼배의 예를 올렸다. ‘삼례(三禮)’란 지명은 그때 붙여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삼례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 시대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호남 최대의 ‘역참(驛站)’이 삼례에 있었다. 역참이란 공공물자 운송을 위해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이다. 일제 때는 만경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보관하는 양곡 창고와 쌀을 군산으로 실어내가는 철도역사가 있었다. 편리한 교통을 따라 조선인 대지주와 일본인의 대농장이 들어서고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경찰서, 보건소, 금융조합, 정미소 등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러다 198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민들이 인근 전주로 빠져나갔다. 완주산업단지 조성과 봉동 둔산리 신도시 조성 사업 등이 시작되면서 도심공동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순식간에 어디서도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없는 쇠락한 도시가 돼 버린 것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문화였다. 문화예술이 중심이 되는 지역관광명소. 그걸 목표로 삼은 도심재생사업의 결과가 삼례문화예술촌이었다.
삼례책마을 북하우스 헌책방에서는 추억을 뒤지듯 오래된 책을 뒤져보는 재미가 있다.
# 양곡 창고에 걸린 그림과 쌓인 책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지어진 양곡 창고 6동과 부지를 활용해 만든 문화공간이다. 문화예술촌 안에는 미술관 카페, 책 공방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런 도시재생 공간이 막 만들어졌을 때는 관심을 받다가 콘텐츠 부족과 운영 부실 등으로 이내 외면받는 사례가 적잖은데,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이곳은 꾸준한 전시와 사업 등으로 여전히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제1전시관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한국화가 김현정 작가의 ‘계란 한 판, 결혼할 나이’전(展)이 열리고 있다. 한복 입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현대 풍속화’ 시리즈로 알려진 김 작가는 풍자 넘치는 유쾌한 그림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인기 있다.
원본이 아니라는 점이 좀 아쉽긴 하지만, 전시 작품은 유쾌한 풍자로 그간 주목받았던 작가의 작품을 망라하고 있다. 그림과 작품 제목을 읽다 보면 웃음이 터지는 작품이 하나둘이 아니다. 가령 신과 아담이 손가락 끝을 맞대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패러디해 한복을 입은 여성을 배치한 작품의 제목은 ‘천지 차이’다. 손가락을 마주 대고 있는 한쪽은 샤넬 백에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있는 미혼 여성이고, 다른 한쪽은 결혼해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시동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기혼 여성이다. 뭉크의 ‘절규’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을 패러디한 작품도 재미있고, 화려한 한복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누추한 일상을 담아낸 ‘내숭’ 시리즈 작품도 눈길을 끈다.
삼례문화예술촌 인근에 삼례책마을이 있다. 역시 옛 양곡 창고를 개조해 만든 북하우스와 북갤러리 등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북하우스는 서울 인사동에서 ‘호산방’이란 고서점을 운영하던 박대헌 관장이 2018년 설립한 곳이다. 북 하우스의 삼례 헌책방에서는 오래된 헌책이 빽빽하게 꽂힌 책장에서 책을 뽑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서가 한쪽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북갤러리 무인 서점에서 책을 살 수도 있으며, 다양한 전시도 감상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은 헌책방. 오래된 헌책을 뒤적여가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다.
삼례문화예술촌 전시장에 걸린 김현정 작가의 작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패러디해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이 손끝을 맞대고 있는 그림을 그려놓고 ‘천지 차이’란 제목을 달았다.
# 아내의 시를 그림으로…유휴열미술관
삼례책마을이 2021년 5월 인근에 새로 문을 연 ‘그림책미술관’은 어린 자녀와 함께 가면 딱 좋을 곳이다. 미술관 1층에서는 영국 작가 질 만의 그림책 ‘요정과 마법 지팡이’의 출판 원고와 원본 삽화 25점을 전시하고 있다. 주인공 테디가 크리스마스에 친구를 초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그림책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출판되지 못하다가 80여 년 뒤에 당시의 원고와 삽화를 입수한 그림책미술관에서 한국어판으로 처음 출간됐다. 2층에서는 상설 전시로 ‘빅토리아 시대 그림책 3대 거장전’을 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가보면 좋을 또 다른 문화공간이 ‘복합문화지구 누에’다. 이곳은 누에를 키우던 호남 잠종장을 문화예술복합단지로 탈바꿈시킨 공간이다. 복합문화지구 누에의 캐치프레이즈는 ‘누구나 예술’이다. 지역 작가나 주민들의 참여 프로그램이 많은 이유다. 전북 잠업시험장을 리뉴얼해 만든 누에 아트홀에서는 지역 작가가 완주 풍경을 그린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미디어아트 전시 ‘사파리탐험대’를 비롯해 누에놀이터 등 어린이들 대상 전시나 체험 프로그램이 특히 충실하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전주가 아니라 구이저수지를 내려다보는 모악산 아래 완주 땅에 있다. 미술관에서는 ‘마중시루’전이 열리고 있다. 지역 작가들의 산을 주제로 한 그림을 모은 전시인데, 산이 가진 성스럽고 거룩한 장소를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산의 정령을 마주하며 맞이하는 의례’로 해석했다. ‘마중시루’란 기원이나 제의를 의미하는 떡을 찌는 ‘시루’를 앞에 놓고 산의 정령을 ‘마중’한다는 의미다. 전시 작품 중에서 김범석 작가의 가로 7m 세로 2.8m의 대작 ‘모악별곡’이 특히 인상적이다. 화면 가득 출렁이는 산줄기와 그 안에 그려낸 마을과 집과 사람들이 거대하게 모여서 관람객을 압도한다.
도립미술관 아래에는 유휴열미술관이 있다. 유 작가가 여기 자리 잡은 건 올해로 자그마치 36년째. 오랜 시간 동안 넓은 부지를 작업 공간으로만 쓰다가 미술관 간판을 내건 지 3년째다. 미술관과 함께 카페 ‘르 모악’도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 전시장에서는 지난해 시집 ‘물 속에 감추어둔 말들’을 펴낸 아내 최명순 시인의 시 한 편 한 편을 그림으로 담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화가 남편이 시인 아내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낸 전시인데, 시도 그림도 푸근하고 따뜻해서 읽고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잘 익은 딸기, 알싸한 생강…로컬푸드
언제든 완주에 갔다면 열 일 제쳐 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로컬푸드 마켓’이다. 제 땅에서 난 것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 생산자와 소비자의 물리적, 사회적 이동 거리를 최소화하는 게 로컬푸드다. 알고 계셨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로컬푸드 운동을 시작한 곳이 완주였다. 2008년에 완주에서 시작한 ‘농업농촌 약속 프로젝트’가 출발이었다. 완주군은 다품목, 소량생산, 직거래를 기치로 내걸고 2012년 처음 로컬푸드 직매장을 열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완주군이 운영하는 로컬푸드 직매장은 12곳으로 늘었다. 완주에 7곳, 이웃 전주에 5곳이다.
로컬푸드 마켓을 권하는 건 그런 역사나 성공담을 목격하자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장 구경’을 위해서다. 그리 크지 않은 로컬푸드 마켓에는 200여 농가에서 생산한 100여 종의 농축산물과 가공식품들이 갖춰져 있다. 하나하나 상품의 양은 적은 편이지만, 종류는 매대를 가득 채울 만큼 다양하다. 가격도 저렴하고, 재배 농민의 이름이나 얼굴을 드러낸 상품은 무엇보다 품질이 월등하다.
요즘 완주 로컬푸드에서 눈에 띄는 품목이 딸기다. ‘삼례딸기’의 명성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건 딸기를 먹어보면 안다. 탐스러운 딸기의 과육이 향이 짙고 달다. 딸기 가격이 시중보다 30% 가까이 싼 것도 싼 것이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여기서 파는 딸기는 ‘그날 아침’에 딴 잘 익은 싱싱한 딸기라는 것. 덜 익은 걸 미리 따서 유통 과정에서 후숙이 되는 대형 마트의 대량 유통 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완주 로컬푸드 마켓에서 하나 더 권하는 게 생강이다. 생강은 완주 봉동의 특산물. ‘생강이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곳에서 파는 생강은 ‘봉동생강’이란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품질과 향이 특별하다. 그중에서도 썰어낸 생강을 설탕을 넣고 졸여낸 ‘편강(片薑)’이 훌륭하다. 간식이 드물었던 시절, 추억의 간식이다. 봉동 편강을 사용한 여러 브랜드가 있는데, 어떤 것이든 설탕으로 뒤덮인 두툼하고 촉촉한 생강의 아린 맛이 일품이다. 딸기나 생강 외에도 완주 로컬푸드 매장에는 저절로 손이 먼저 나가는 신선한 농산물들로 꽉 차 있다. 건강하고 신선한 데다 가격까지 저렴하니 저절로 완주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 완주 명물 로컬푸드 뷔페
완주에는 로컬푸드로 차려내는 뷔페식당이 곳곳에 있다. 용진면 로컬푸드 직매장 2층의 ‘황금연못’, 구이면 로컬푸드 매장의 ‘행복정거장’, 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삼례읍의 ‘새참수레’는 완주에서 수확한 로컬푸드 농산물로 차려낸 음식을 정갈하게 펼쳐놓는다. 반찬 하나하나가 식당에서 허투루 내는 식당 음식과는 격이 다르다. 가격이 그리 싸지 않은 데다 이른바 ‘메인 음식’이랄 것도 딱히 없지만, 음식 하나하나가 좋은 식재료로 제대로 만든 건강한 음식이어서 만족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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