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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 2008

인고의 세월 속에 풍화된 기다림과 성찰의 시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28. 15:42

 

 

인고의 세월 속에 풍화된 기다림과 성찰의 시학 

 

                              박영우 (시인, 경기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우리들의 삶이란 사막에서 길을 찾고 또한 길이 없으면 새로운 길을 만들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찾고 만들어가는 일이란 어쩌면 수행의 길이요, 고행과도 같은 길이다. 더군다나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목적지가 없는 길을 평생토록 묵묵히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는 왕도가 없다. 오직 온갖 번뇌와 외로움만이 황량한 사막의 모래 언덕처럼 가득할 뿐이다.

 

나는 어느 날 그 모래언덕 어디쯤에서 나호열 시인을 만났다. 사실 만난 지는 꽤 오래되었다. 한 이십여 년쯤 되었을까. 어쩌면 더 오래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시 해설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저 간간히 모래바람에 실려오는 소문으로 가끔 소식을 들었을 뿐이고, 지면을 통해서 또는 그를 아는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통해서  열심히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같이 시를 쓰는 동업자 입장에서 시평을 한다는 사실이 왠지 어색하여 사양하려 했지만, 시집 원고를 보면서 작품마다에 배인 시적 성취와 진정성이 느껴져 반가운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점은 세월의 무게를 버텨오면서 가슴 속 깊이 간직해둔 시적 체험들이 시인의 예리한 혜안을 통해 한 편의 시로 투사되고 정제되어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 시는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시인의 메시지를 응결시켜 보여주고 있다.

 

  저녁이었다

  배롱나무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지만

  어느 새 기지개를 펴고 주먹을 내지를 것이다

  가지를 단단히 움켜 쥔 새가 호르륵 호르륵

  앞산 뒷산을 넘고 넘기는 기억의 씨는 더 깊게

  무덤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가 구비 치며 걸어 올라왔을 길이 

  이제는 혼자 휘적이며 내려가는 시간

  북 앞에 선 그의 뒷모습

  가죽을 남기고 간 짐승의 혼 같다

  지금은 일주문 같은 나무들이 모여들어

  안팎을 알 수 없는 내력을 더듬을 때 

  피 묻은 소리들은 고요히 어둠 속에 몸을 섞었다

  꽃이 피고 나비들이 찾아올 것이다

  나그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않는 법이다 

                 

                                      -   「법고 치는 사내」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법고 치는 사내’를 바라보며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 ‘사내’는 시인의 내면이 투사된 또 다른 시인의 모습이다. 1행의 “저녁이었다”는 시간적 공간은 삶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분위기를 유도하면서 5, 6행의 “앞산 뒷산을 넘고 넘기는 기억의 씨는 더 깊게 / 무덤으로 파고들 것이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또한 6행까지의 전경화된 심상은 다시 온갖 풍상을 겪으며 격정의 시간을 살아왔을 “북 앞에 선 그의 뒷모습”에 초점을 모아지게 함으로써 이 시의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사내가 치는 북소리는 단순히 저녁 무렵의 단편적인 서경이 아닌 ‘가죽을 남긴 짐승의 혼’ 이 실린, 피 묻은 세월의 어둠을 섞은 가슴 아픈 생의 그림자 같은 소리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요 속을 격렬하게 울려 퍼졌을 그 북소리는 마지막 행의 법문 같은 시행으로 전이되면서 시적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다.

 거기에 비하면 다음 시는 한결 정화되고 서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    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    랜 해후처럼 부둥켜 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    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    「긴 편지」전문

 

 일단은 첫 행의  “風磬을 걸었습니다”라는 시적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실은 “풍경이 울리는 산사를 걸었습니다” 정도로 해야 옳은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런 표현으로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절실한 삶의 체험들이 숙성되고 육화되어 시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또한  ‘풍경’이 갖는 이미지가 ‘바람’, ‘눈물’,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다시 ‘풍경’으로 이어지면서 물이 흐르듯 시상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면서, 시적 의미를 압축된 한 편의 시 안에 적절하게 가두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 길지 않은 산문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많은 사연들이 함축되어 있는 풍경風磬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風景이 있는 시이다.

 

 하지만 나호열 시인의 시속 풍경은 결코 한 군데 멈춰서기를 거부한다. 시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앵글을 닮아있다. 항상 새로운 삶과 사랑의 대상을 찾아가는 유목민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

  낮게 깔려있는 하늘은 늘 푸르렀고

  상형문자의 구름은 천천히 자막으로 흘러갔던 것인데

  하늘이 펄럭일 때 마다

  먼 곳에서 들리는 양떼 울음을 들었던 것이다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

  아마도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

  유목을 배우고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으니

  하늘이 바다이고 바다가 하늘인 것 또한 알 수 없는 일

  내가 잠깐 이 생의 언덕 위에 올라 발 밑을 내려다 볼 때

  울컥 목젖이 떨리면서

  깊게 소금에 절여 있던 낱말을 뱉어낼 수 있었던 것

  여기에 없는,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믿어버린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강열한 햇볕 속에 태어나 그 햇볕으로 사라져가는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

                 

                                        -    「너에게 묻는다」전문

 

 시인에게 있어 떠남과 유목의 삶은 어쩌면 숙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대개 문학작품에서의 떠남의 의미는 혼돈과 성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화해나 성취, 또는 인격적 성장을 위한 통과제의적인 성격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데, 시인은 결코 그가 가는 길에 대한 해석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나그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않는 법이다” 「법고 치는 사내」라고 말하거나, 이 시의 마지막 행처럼 “소금 등짐을 지고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나”라고 미지칭의 의문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이 시의 2연을 보면 떠남과 유목을 배운 이유가 “목동이었던 내가 먼저 집을 잃었던 모양이다 /잃었거나 잊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도망쳤던 그 집”이라고 말하면서, “그 집은 소금이 가득했던 창고/ 아버지는 비와 눈을 가두어 놓고 바다를 꿈꾸었던 것인지/ 밤새 매질하는 소리 들리고/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봉한 소금처럼 우리는 태어났던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서 ‘유목’과 ‘구름의 상형문자’를 배웠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쩌면 시적 화자를 통해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로하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시에서의 ‘떠남’은 자기 의지에 의한 떠남이라기보다는 타자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떠남’의 의미가 강하고, 자의에 의한 떠남이 아니기에 자유의지를 향한 유랑하는 삶이 아닌 생계를 위한 유목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 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1연의 “유목의 하늘에 양떼를 풀어 놓았다/ 그리움을 갖기 전의 일이다”라는 전제가 가능하다 할 것이다. 결국 양떼를 풀어놓고 싶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그것은 ‘구름의 상형문자’로 상징화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은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다음 시는 시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시를 쓰는 시의식의 바탕이 어디에 맞닿아 있는 지를 가늠하게 한다.

 

  태어날 때 어머니가 일러주신 길은

  좁고 어두운 길이었다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송곳이 아니었다면

  어머니의 울음은 그렇게 푸르지 않았을 것이다.

  몸에 남아있는 푸른 얼룩은 고통의 살점

  알 수 없는 적의는 죄와 길이 통하고

  먼저 내 살점을 뚫고 나서야

  허공을 겨눈다

  이른 봄 벌써 목련이 지기 시작하는 때

  저만큼 새가 날아가고 난 뒤에

  그림자는 하얀 발자국으로 남는다

  그 발자국 따라

  좁고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

  세상의 발밑이지만 허리를 꺾지 않는 까닭은

  굽지 않고 나를 적중하는 햇화살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푸른 울음 끝에

  나의 몸은 아주 작게 균열되었다

  알을 슬기 위하여 수천 리를 날아가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수 만 마리로 깨어지는 꿈을

  긴 편지를 쓰기에는 봄이 너무 짧다  

                                                    -    「음지식물」전문

 

  이 시에 의하면 태생적으로 그가 가야할 길은 ‘어머니가 일러주신 좁고 어두운 길’이었다. ‘어머니’의 이미지는 자궁으로 상징되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근원으로서의 공간이 아니다. 그 이미지는 ‘울음’, ‘얼룩’, ‘고통의 살점’, ‘죄’, ‘허공’ 등 온통 부정적이고 힘든 삶의 애환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고, 그처럼 힘들게 달려온 삶의 이유는 “굽지 않고 나를 적중하는 햇화살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라고 밝힘으로써, 시인의 굳은 의지를 명백히 하고 있다. 결국 시인은 수없는 고통 속에서도 ‘알을 슬기 위해 수천 리를 날아가는’ 봄을 닮은 꿈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다음 시에서처럼 시적 대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기저는 뜨거운 의식의 공간들로 가득 채워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천만 근의 고요 속에서

  스스로 칼금을 긋고 내미는

  새 순과 꽃들의 아픔을 보았는가

  바위에 온몸을 부딪고

  천 만 개의 꽃잎으로 산화하는

  파도의 가슴을 보았는가

  벅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용암처럼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기꺼이 온 몸을 내던지는

 

  멈춤

  그 찰나의 틈을 보여주기 위하여

  바람을 불러 모으는

  혼신의 집중

  보이면서 사라지는

  사라지기 위하여 허공에 돋을새김을 하는

  묵언의 釘 소리

  들판에 내려앉는

  노을이 뜨겁다

             

                       -      「춤」부분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결국 시인이 열망하는 의식의 지향점은  끝내 바위가 되기 위하여 ‘용암’처럼 온몸을 내던지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뜨거운 ‘춤’사위인 것이다. 또한 다음 시에서처럼 세상을 향해 ‘그 검을 찾아라, 내어 놓아라!’라고 외치기도 한다. 세상을 향해 던진 그 ‘검’은 다시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 날아오는 ‘검’이기도 하다. 그 ‘검’의 정체는 세상이 나를 향해, 내가 세상을 향해 내뱉은 의식의 검이요, 도道의 검들이다.

 

  미간 사이로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주름살이 깊이 패여 있다

  웃어도 지워지지 않고 눈을 감아도 흐려지지 않는다

  메리고라운드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탄

  웃을 때마다 꽃무더기 무너져 내리던 주인공

  아프지 않게 시간이 할퀴고 간 흔적이다

  그 검을 찾아라, 내어 놓아라!

  몽환 속을 들락거리는 혀가 낼름 검을 받아먹는다

  검이 뭔지 도가 뭔지도 모르는 혀가

  단물을 빨아 먹고 난 뒤 이빨들은 혀를 씹기 시작했다

  언제 이 검을, 이 도를 뱉어내야 할까

  미간 사이의 주름살이 생각 속으로 깊이 파들어 가기 시작했다.

                       

                                                                      -  「검」전문

 

이 시에서처럼 시인으로 대변되는 시적 화자의 삶은 오늘도 평탄치가 않다. “언제 이 검을, 이 도를 뱉어내야 할까”하고 갈등과 고민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검은 언제나 미간 사이로 날아 들어와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간다. 세상은 이미 도를 상실한 도가 통하지 않는 삭막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마지막 행의 표현처럼 삶의 진정성을 회복한 온전한 모습의 ‘검’과 ‘도’를 언제쯤 세상을 향해 뱉어낼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호열 시인은 사막 같은 세상에 길을 내고 또 그 길들을 걸으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다음 시에서처럼 아직도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낯선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 길의 끝은 언제나 상처로 가득하다. 그 상처 난 길들을 수행하듯 걸으며 시인은 또한 그 상처를 시로 치유하고 아물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상처가 없는 새로운 길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시인과 우리 앞에 놓인 숙명이기에. 나호열 시인의 시편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명시들로 남기를 기대해본다.

 

  옷고름 여미듯이 문을 하나씩 닫으며

  내가 들어선 곳은 어디인가

  은밀하게 노을이 내려앉던 들판 어디쯤인가

  꿈 밖에 떨어져 있던 날개의 털

  길모퉁이를 돌아 더러운 벤치에

  어제의 신문을 깔고 누운 사람이여

  어두운 계단을 점자를 읽듯이 내려가며

  세상 밖으로 쫓기듯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 밖에도 세상이 있으니 이 얼마나 낯선 풍경인가

 

  그저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

  응달진 숲의 낮은 곳을 익숙하게 오가는 다람쥐들

  맹목의 긴 행렬을 이루며 땅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말없음표의 개미들

  한 번도 똑 같은 길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들과의 짧은 눈맞춤 

  그들과 눈 맞춘 그 길 일장춘몽이다

  길은 아무는 상처와도 같다 아물면서 기억을 남기는 길

  상처가 없는 그들은 매일 새로운 길을 만들고 버린다

 

  저, 비어 있는 유모차

  물끄러미

          

                                       -  「길을 찾아서」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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