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11] 입춘대길
현실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게 사진의 매력이다. 현실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걸 보여주는 사진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더라도 그런 사진이 현실보다 더 매력적일 순 없었을 것이다. 꽃을 찍은 사진이 실물 꽃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찍은 사람이 찾아낸 아름다움이 사진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게 현실의 전부라면, 그래서 궁금할 것도 이해할 일도 상상할 거리도 없다면, 세상살이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게다. 지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이, 사진은 자주 보이는 것 너머를 추구한다.
정경자 작가는 ‘지금에 관하여(Speaking of Now·2013~2014)’ 연작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며 생명의 불씨를 살리려는 친구의 모습과 그녀의 회복을 간절히 비는 마음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에 담긴 ‘지금’은 독한 약물이 암세포를 죽여주길 바라면서 머리카락을 완전히 잃게 된 친구의 뒤통수만큼 처연하다. 다리 밑 교각을 빼곡히 둘러싼, 가는 줄기들은 언뜻 보기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모습이다. 푸른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워 올린 나무는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다.
이렇게 춥고 바람이 시린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하고 의심을 품어 보지만 사진은 마치 봄의 전령처럼 생명을 이야기한다.
처음 이 사진을 보았을 때, 당연히 흑백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연작에 속한 다른 사진들은 다 컬러인데 왜 이 사진만 흑백으로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한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진에서 색이 보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봄의 기운이 아직은 그늘져 차가운 무채색의 배경을 뚫고 서서히 번지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듯 흐려진 꽃잎 주위로 아주 천천히 여린 초록의 생명이 꿈틀거린다. 찬찬히 바라보고 렌즈를 통해 곱씹어본 세상이 사각 틀에 단정하게 들어앉았다. 카메라는 세상을 향하였지만, 작가의 눈은 언제나처럼 잘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했다. 다가오는 봄이, 그 생명의 기운이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길하길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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