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읽기]
[4] 초록이 좋아
살다 보면 법보다 가깝고도 강력한 규제력을 갖는 규칙들을 쉽게 마주하게 된다. 하필 딱 내 앞에 앉은 상사의 ‘부먹’ 탕수육 취향처럼 일시적으로 동조 가능한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하다. 여자니까 화장해야 한다거나, 남자니까 운동을 잘해야 한다는 식의 편견에 가득 찬 잣대는 절대 강요하거나 강요받고 싶지 않다. 상식이나 관습을 따르는 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예의라면, 강요된 규칙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우리는 감수성과 취향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별⋅연령⋅인종 등 타고난 요인은 누군가를 설명하고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해졌다. 성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만으로 한 사람의 성적 정체성(젠더 아이덴티티)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일례로 미국의 뉴스쿨 대학교가 올해 재학생 정보 기입란에 제시하고 있는 성별 영역은 무려 14개에 달한다. 선택지가 많다는 건 그 자체로 타인과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윤정미는 딸을 키우면서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분홍을 자신의 색이라고 규정하는 아이의 사회화 과정을 눈여겨보았다. 전 세계 어딜 가나 분홍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과 파랑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핑크 블루 프로젝트(2005~)’는 아이가 실제로 소유한 분홍이나 파랑 물건들을 방 안 가득 진열하고 주인공과 함께 촬영함으로써 젠더와 소비의 역학 관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이 연작은 수많은 평론가와 애호가의 찬사를 받았고, 작가 윤정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작가는 전혀 다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동료 작가인 구성연은 기꺼이 자신의 초록 애장품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이분법이 깨지는 통쾌한 순간에 파랑과 빨강 사이 중간 파장 색인 초록은 안성맞춤이다. 이 사진에서 초록은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취향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분화된 감수성을 상징한다. 초록이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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