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절대 고독과 절대 고통의 시간
눈이 많이 내렸다. 병원 앞 대로에도 눈이 쌓였다. 하얗게 물든 가로수가 왠지 포근해보였다. 문득 응급실 전화기가 울렸다. 몸이 너무 아프다고 직접 신고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구급대원은 그가 좁은 집에 혼자 살고 있었으며 노숙자의 몰골과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위해 격리실을 비웠다.
그는 때묻은 티셔츠와 남루한 운동복 차림으로 실려왔다. 이발과 면도 따위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듯했다. 발바닥은 재를 밟고 지나온 것처럼 검었다. 정돈되지 않은 인간의 오래된 악취가 풍겨왔다. 배는 풍선처럼 부풀었고 전신이 노랬다. 구급대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좁은 집에 엄청난 술병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환자가 간신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기괴할 정도로 많은 양의 술병이었다. 정상적인 보행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였다.
다행히 그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의식이 명료했다. “평소 앓던 병이 있었습니까?” “병원에 가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어디가 아픕니까?” “전신이 다 아픕니다.” 기저질환 불상, 복수, 황달, 독거, 쌓여있는 술병.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집 한 칸만 남은, 우리가 흔히 ‘노숙자’라고 부르는 사람의 생활이었다. 인생의 종착지에 아무것도 없이 도달해, 술로 마지막 남은 건강까지 잃어버리는 전형적인 환자였다. 격리실을 나와 검사를 진행했다. 적어도 간경화 말기, 나쁘면 간암이었다.
한동안 다른 환자를 보고 있었다. 그는 내 자리 뒤편의 커다란 유리창 안쪽에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예견한 대로 결과는 대단히 나빴다. 간경화가 심각했다. 문헌상 1년 이내로 절반 이상이 사망하지만, 그의 여생은 그보다도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상황을 전달하고 치료를 의논하기 위해 환자에게로 갔다.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해야 했다. 환자는 움직이는 게 귀찮다는 듯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다. 어떤 정물 같아 보였다.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상태가 안 좋습니다. 연락할 가족이나 보호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모님은 안 계십니까?” “전부 돌아가셨습니다.” “아내분은 계십니까?” “오래전에 이혼했습니다.” “자녀는 없습니까?” “연락 끊긴 지 십 년은 되었습니다.” “다른 아는 사람 없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공사장에서 운전을 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일 년 전에 그만뒀습니다.” “어떻게 살았는데요?” “생계지원금 받아서 술을 마셨습니다. 하루에 한 병 반 정도 먹었어요. 통장에 몇 만 원쯤 남아 있을 겁니다.”
느릿한 대화에 마음이 화끈해졌다. 나는 갑자기 복받치듯 그에게 물었다. 애정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환자분 말씀대로라면 가족도, 대화할 사람도 없이 1년을 집에만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뭘 했습니까. 지루하지 않았어요? 무엇인가 해야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던 그는 느리게 눈만 돌려 나를 보았다. “선생님. 저는 아팠습니다. 그냥 누워있는 거예요. 아프니까. 아픈 사람이 뭘 하겠습니까.” 마음속에서 탄식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저 자세로만 일 년을 지탱했던 것이다. “…네, 환자분. 간경화 말기입니다. 입원하세요. 다만 이제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환자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다. 아마 그도 어림하던 사실일 것이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창을 건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입하던 순간 세상과 단절된 아찔한 고립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파보지 않은 인간의 한심한 한탄이었다. 그나마 명료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반드시 무언가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절대적인 고독과 고통의 시간. 일 년간 매일 바라보던 천장. 죽음을 달성하는 것처럼 방 안에 쌓여가던 술병. 그 시간들을 몸이 온전한 자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몰이해를 증명하고야 말았다. 모든 세상의 질서가 나와 같다는 생각은 절대적인 착각이자 오만이다. 지금도 세상의 누군가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순간들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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