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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선 시집『바위의 꿈』:잊음과 잃음 사이의 섬을 이야기 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3. 22. 23:16

잊음과 잃음 사이의 섬을 이야기 하다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1.

 

음계의 낮은 도 음音과 솔쯤 그 사이를 흐르는 진양조의 강물, 스물스물 코끝을 스치는 솥밥 익는 냄새, 나뭇가지 끝에서 빗방울 하나가 마악 떨어지려는 그 순간, 손닿을 듯해도 끝내 잡히지 않는 무지개...... 이 단상들은 모두 김미선 시인의 시집 『바위의 꿈』을 일별하고 난 후에 남는 조각조각의 인상들이다. 그의 시편들은 무거운 듯 가볍고, 웃음인가 했더니 어느새 슬픔이 배어있는 미소를 보여준다. 이렇게 『섬으로 가는 길』(2007),『닻을 내린 그 후』(2016)에 이어 6년 만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인 『바위의 꿈』이 펼쳐놓은 시간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이윽고 우리는 저녁 어스름, 길이 끝나는 곳의 외딴 집에 다다르게 된다.

 

시의 집에는 외로워서 슬프고, 그림자만 길어진 그리움을 나지막히 읖조리는 사람이 있고 지나칠 정도로 친숙한 정한情恨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갈 참이다. 자칫하면 성급히 귀를 닫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인이 질펀하게 펼쳐놓은 외로움과 그리움의 길을 끝끝내 따라간다면 지친 삶의 어깨에 내려앉는 따스한 햇살과 같은 위로와 평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고 끝내 잃어버린 순수한 삶의 원형과 마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말과 같다.

 

한 마디로 시인 김미선은, 아니 시집『바위의 꿈』은 우리에게 외로움과 그리움이 사라져버린 유목遊牧의 정체에 대해 답을 내려주는 대신에 “유목 이전의 우리의 삶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진다. 유목과 정주定住의 갈림길에서『바위의 꿈』을 읽는다는 것은 정답이 없는 질문에 끊임없이 모래로 흩어지는 답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엄밀히 말해서 시집『바위의 꿈』은 새로운 발상이나 어법의 구사에 있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일군一群의 시인들이 즐겨 노래하는 자연에 대한 완상玩賞은 이 부조리하고 하나로 묶어 규명하기 다양함으로 말미암아 경계 지을 수 없는 어려운 세계의 속살을 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행行과 연聯이라는 도식적 구조에 얹혀 휴지休止를 강요(?)하는 느린 시법詩法은 속도에 민감한 세인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일군의 또 다른 시인들은 내면의 불연속적인 의식을 끌어올려 돌발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그려내기에 골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예술은 전위적前衛的이고 – 전인미답의 길을 만들어가는 – 독창적이어야 하는 까닭에 자신의 시업을 꼼꼼하게 되돌아보지 않는 무모한 도전이 계속되어 가고 있는 세태에 놓여있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국면을 세세히 되짚어보면 한 때의 경향傾向이나 조류潮流에 휩싸이지 않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꿋꿋이 견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 김미선이 보여주는 시편들은 오래되었으나 낡지 않았고, 치밀하고 감각적 언술을 참아내는 대신에 시집의 기승전결의 논리가 상통할 뿐만 아니라 검이불루儉而不陋의 자존의 경지를 오롯이 펼쳐보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의 과문으로 아쉽게도 첫 시집『섬으로 가는 길』, 두 번째 시집 『닻을 내린 그 후』을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미선 시인의 첫 시집 발간 이후 15년 동안의 시적 변모를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으나 ‘섬’이라는 오브제는 시인의 사유를 떠받치는 세계관으로 이번 시집에서도 중요한 심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상상과 연상력을 토대로 하는 개연성의 원리가 시작법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 시가 추구하는 허구성 -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섬’은 시인의 실제 체험 공간으로서 강력한 시의 텃밭이 되고 있음을 추측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어린 그때

우주만큼

큰 몸집이었지

 

이제는 갈수록 작아져서

손바닥으로 가려도 되는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섬 아닌 섬

 

푸르고 넓은 바다는 사라지고

내 가슴속에 가시로 남아

지나간 세월을 찔러대는

잃어버린 첫사랑의 이름

함박도

 

- 「함박이라는 섬」 전문

 

함박도라는 섬은 경상남도 통영 앞바다 섬으로서 지금은 연육連陸되어 있는 곳인가 보다. 그렇게 지도상에서 사라진 섬 함박도는 시인의 고향으로서 섬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고장인 것이다.「함박이라는 섬」이외에도 그 섬을 회고하는 시가 다수 보여주는데 그 주에서 몇 편을 살펴보기로 한다.

시「그 섬」에서 “물고기들이 얕은 수면 위에서 나를 홀리고 게 고둥도 참고둥도 몸을 떨면서 숨 쉬던 곳” 으로 술회한 아름다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낭만적 추억이나「늙은 섬」에서 보이는 “집 밖으로 유모차를 밀고 나오는 / 등 굽은 어른들만/ 삐거덕거리며 느리게 걷고 있는”, 풍요가 사라진 풍경을 바라보는 애틋한 슬픔의 고백은 오늘날 여행이 일상화되고 농어촌의 공동화가 빠르게 진행되어가는 정보의 공유로 인해 보편적 정서 이상의 공감 효과를 거두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하루도 비린 것 먹지 않으면 / 심신이 허기가 지는” (「비린 단맛」)비린 단맛에 각인된 시인의 독특한 몸의 반응에 있다. 그 각인은 어떤 훈화訓話에 길들여지지 않고 음식문화의 풍요로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의 틈입을 허락하지 않는 몸으로 체득한 본연의 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 년 만 년 흘러도 // 내 가슴에 남는// 그리움이라는// 방부제”(「방부제」)로 인식되는 그리움은 “저 깊은 심心에서 / 자꾸 마른 내 눈물만 짜내고 있는 / 저 꽃들”( 「심줄 뽑기」)의 빈 자리로 변함없이 존재하게 되는 본능적인 것이다.

 

3.

 

그럼에도 우리는 섬에 대한 시인의 궁극적 사유의 내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더 추적해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생각해 보면 섬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 장소이다. 섬은 바다에 둘러싸인 격절된 소외의 장소이며, 그 반대로 그 격절로 인하여 온갖 사회적 사슬에서 벗어난 해방과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사람들은 애써 섬을 떠나려 하고, 또 어느 사람들은 굳이 섬으로 찾아들기도 하는 것이다.

 

현재의 함박도는 섬이 아니지만 시인이 그리워하는 함박도는 공동체의 삶과 절욕의 삶과 기다림의 삶이 얼키고 설키면서 “소중한 것은 숨바꼭질 하듯 / 어딘가 꼭꼭 숨어서 냄새를 풍기는”(「미역꼬투리」) 불변의 섬이다. 다시 말해 어촌 함박도는 두레의 풍습과 익명이 발붙일 수 없는 투명한 관계로 얽힌 곳이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일이 그 때 그때의 물때에 따라 예측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바다가 주는 대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는 절욕節欲을 배우는 곳이며, 거센 파도에 일엽편주, 항상 위험이 뒤따름에 뭍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졸이는 기다림의 기도처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함박도라는 공간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으로 살겨운 공동체, 바다는 도전과 절욕을 가르치는 아버지, 그 끝머리에 가녀리게 서 있는 기다림은 어머니의 상징으로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리하여 시「슬쩍」에 보이는 “육지에 살면서 아무리 버무려도 맛 들지 않는 / 맹물 같은 싱거운 삶! 스며들지 않는 짭짤한 맛의 허기!” 라는 토로는 시인 김미선에게는 버릴 수 없는 삶의 덕목이 된다. 더 나아가서 함박도는 이 모든 정서의 융합체로서 지울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원천이면서 외로움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봄이 와도 / 그 집엔 아무도 없”음(「그리운 가슴팍」)으로 바다로 표상되는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함박도는 섬의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오직 기다림의 돌부처로 어머니만 멀리 살아 있어 「목소리 마스크」,「풀과의 전쟁」,「고향집 시계」,「엄마 찾아 가는 길」,「시금치가 웃었다」와 같은 시편으로 남아 간절한 기다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단지 어머니를 향한 것만은 아니며 섬으로 표징되는 모든 공간과 이미 되돌릴 수 없이 지나가버린 시간마저 잊지 않으려는 안간힘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것이다. 김미선 시인은 ‘잃어버림’이 ‘잊음’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서, “기다림을 ‘잊음’과 ‘잃음’이라는 의식의 와해를 막는 주는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시 「그때」는 아이러닉하게도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기다림의 의미망을 한층 더 높이는 시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고기 잡으러 바다로 떠난 아버지 돌아오실 때를

 

어머니가 통 영장에 가서 왕눈깔사탕 사 오실 때를

 

내 형제들이 한집에 다 모일 때를

 

내가 먼 고향집으로 갈 때를

 

순하디 순하게 기다려봅니다

 

하루가 가고 또 밝은 하루가 올 때

 

조용히 오십 년째

 

그때를 기다립니다

 

- 「그때」 전문

 

그리하여 함박도라는 섬은 기다림의 대상이면서 기다림을 체화한 어머니의 분신이다. 아니 그 자체로 잊어서도 안 되고 잃어버려서도 안 되는 어머니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속담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헌신과 무한의 사랑을 베푸는 존재로서의 어머니를 넘어서서 분노와 증오까지도 품어 안는 존재는 “추억은 영원한 순간 / 지금부터 그리움이 시작될 그곳”(「꽃 피고 지는 사이」에 무량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와 같은 것은 아닐까.

 

4.

 

김미선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원형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선僞善이 없는 생명의 땅, 섬에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필사적인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경쟁을 넘어서는 광활한 바다에 기대어 살면서 자연에 감사하고 절로 무욕을 몸에 지니게 되는 삶. 서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익명성이 허락되지 않는 삶!

 

시집『바위의 꿈』에 집요하게 투사된 전통적 서정은 이미 세간에 널리 퍼져있는 자연에 귀의하거나 탐미耽美하는 시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시인이 노래하는 섬과 그 섬에 의해 파생되는 그리움과 기다림은 핍진逼眞하지 못한 삶의 불구不具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매우 치열한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립과 험난한 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섬을 벗어나고자 하고 있음에도 – 보편적 상식으로 보아 – 섬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행위는 도시화된 오늘의 삶이 시인이 꿈꾸는 세계와 절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질긴 고무줄처럼 길게 흘러가고

눈 코 볼 사유 없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하루

 

- 「시간의 집」 첫 연

 

시인은 기억한다. 사리와 조금을 헤아리며 물때를 기다리고 바다가 내어주는 대로 물고기를 선물로 받아오는 느린 시간은 오늘날에는 조급한 경쟁으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다툼으로 바뀌어 버렸다. 머리는 쉬엄쉬엄 걸어가고 싶은데 횡단보도의 파란불은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눈을 껌뻑거리며 걸음을 재촉하는 도시에서는 자연스럽게 생활화된 나눔과 배려가 존재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얼룩지는 일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얼룩이 묻고

백수를 누려도 얼룩이 남는다

 

- 「얼룩」첫 연

 

이 얼룩은 불가피하게 사람과 사이에서 파생되는 아픔이다. 섬을 떠나온 시인은 이런 건강하지 못한 일상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풍자의 필법으로 냉소한다. 부부관계를 월급 받는 날로 설정하고 “그날만 빤히 기다리는 남자 그날만 기다리는 여자 // 우리는 절대적 사무적인 관계”(「지극히 사무적」)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뒷 여자가 거울 보러가는 길에 앞 여자의 옷장을 살짝 닫았다고 육탄전을 벌이는 목욕탕의 스냅을 통해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일 센티의 간격’으로 풍자하거나, 절대 손해 보지 않으면서도 반값을 외치는 마트에서 들려오는 ‘미친 데이!’, 지척에 살면서도 제대로 문안을 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며 “오지 않아도 올 것 같은 / 올 것 같아도 오지 않는 / 아들아 / 지척이 / 십리 길보다 더 멀” (「기다림」마지막 연)다고 푸념하는 넋두리에서 시인이 꿈꾸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일그러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통의 부재는 시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외로움과 소외의 아픔을 가져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개인과 집단 사회 사이에 가로 놓인 벽은 “내 생애 이런 벽 없었더라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을까 ”(「도배」)라는 탄식의 장소로, 마음의 얼룩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5.

이와 같이 공동체의 미덕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찾아오는 고독은 그만큼 앞에서 언급한 그리움과 기다림과 길항하면서 또 다른 세계로 시인의 서정을 이끌어간다. 아마도 그 서정은 나이 듦에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김미선 시인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자연의 순환을 자신의 삶을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킬 때 슬픔이 증폭된다.「나무들」이나「나무도 귀가 있다」,「소나무의 위로」와 같은 시들은 부동不動과 직립의 모양새로 많은 시인들의 서정을 돋우는 모티브로 인용되었기 때문에 김미선 시인이 의도한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대상 이상의 신선한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례로 시「도배」에서 보이는 ‘벽’이나 “나는 안다 / 그들도 얼마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지”라고 되내이는「소나무의 위로」와 같이 대상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태도가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나무」는 아마도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바위의 꿈」과 짝을 이루면서 김미선 시인이 새롭게 걸어가야 할 길을 예감하게 하는 시로서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읻다.

 

하늘을 이고

아무 기다림 없이 한 곳에서만 산다

 

침묵으로 밥을 먹고

새들은 지저귀다 날아가고 또 다른 새가 찾아오고

찾아가지 않아도

세상 이야기는

바람이 와서 들려주었다

 

어느덧 신목이 되었는지

그믐밤 캄캄한 어둠을 붙잡고

누군가 절을 하고 가는데

이름은 묻지 않았다

 

세월을 경으로 읽으며

오늘도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탓하지 않으며

하늘을 뻗어 올라가는 것에

힘을 기울일 뿐이다

 

- 「나무」전문

 

나무의 속성을 진솔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고향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섬으로서 솟대와 같은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내 마음에도 몇 마지기

다랭이논 있다

 

- 「다랭이 마을에서」마지막 연

 

다랭이논은 남해도 산비탈에 일군 천수답 논이었다. 지금은 용수用水 기술의 발전으로 농사짓기가 편해졌는지 모르지만 청산도의 구들장논과 마찬가지로 식량을 얻기 위한 눈물겨운 분투의 생활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곳이다. 김미선 시인의 다랭이 논은 자신의 삶의 이력을 단 한 줄로 요약한 것으로서 “벗는다고 벗어던져지지 않는 / 평생 끼고 살아가는 / 가슴속 파여 고인 한 우물”(「우물」)의 척박한 우울과도 맥락이 닿는다. 그 다랭이 논 한 가운데, 우물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나무는 시인을 위무하는 솟대이며 사라져서는 안 되는 함박도이다.

 

잊지 않으면 잃어지지 않는다는 시인의 조용한 절규는 쉽게 사라지고 잊혀지는 디지털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할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깊이 알 수는 없으나 김미선 시인도 과거를 반추하면서 세월 따라 성숙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애써 비유를 빌리지 않고 툭툭 던지는 독백 속에 쓴 맛을 지닌 씨앗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은 매력적이지만 시에서는 자칫 독이 될 수 있는 말놀이기도 하다. 김미선 시인의 시편 속의 몇 구절을 정확히 아포리즘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어도 그럼에도 필자의 뇌리에 들어오는 몇 구절을 옮겨 보는 이유는 직관에 가까운 김미선 시인의 사유가 한껏 농익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유의 농익음이 사변思辨과 추리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나서 얻어 들인, 체념과는 변별되는 진정성을 함유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더듬어 인상깊은 몇 문장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몸을 낮춰야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사랑」 첫 연

꽃도

살짝 훔쳐보아야 하나 보다

 

- 「눈 찔리다」 2연

 

우리의 삶이 지나고 보면

작은 속삭임이겠다 싶다

 

- 「어쩌면」 1연

 

밤을 태운 흔적만

헝클어져 밟히더라

 

- 「춘몽이라 생각하자」 마지막 연

 

이런 독백들은 김미선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가 시인으로서 최고의 경지라 이를 수 있는 관조 觀照의 세계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얼마든지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시를 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의 두려움을 아는 가외자언可畏者言이야말로 오늘날의 많은 시인들이 아로새겨야 할 금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김미선 시인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갈고 닦는데 힘을 기울이는 시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제 길지 않은 이 글을 마칠 때가 되어 시집의 첫 머리에 놓인「바위의 꿈」을 살펴보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시는 시집에 수록된 시 전편을 압축한 시로 주장하고 싶을 만큼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바위도 시간을 먹고

물들고

깎이고 또 깎이어

천년을 참아내면

스스로 이끼를 옷으로 지어 입고

초록의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고

바람은 또 쉼 없이

오고 가고

- 「바위의 꿈」 전문

 

「바위의 꿈」이 앞서 언급한 시「나무」와 짝을 이루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한 걸음 더 나가본다면 부동과 고독의 상징을 넘어서서 불멸의 자아를 염원하는 구도求道의 시로 읽고 싶었던 까닭에서이었다. 생멸生滅은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순환의 운명이지만 바위는 수수만년을 지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불멸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불현듯 바위를 생물화生物化시켜 바위에 꿈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바위의 꿈』전편을 살펴보면서 시인에게 있어서 섬은 현실계에서는 사라질 수 있으나 그 사라짐은 찰라의 현상일 뿐이며 자아(시인)가 그 섬을 잊지 않는다면 – 기다림이나 그리움과 같은 의식활동을 통해서– 그 섬은 결코 잃어지지 않음을 다수의 시를 통해 확인했다.

 

이런 사유를 거쳐 시인은 이제 스스로 바위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꾼다. “삶의 역경을 전복顚覆시켜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는 생명에의 의지를, 억겁의 시간과 실체 없는 바람을 인고하는 기다림을 지닌 바위로 탈바꿈 시킬 때 우리는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시인은 묻는다. 현상에 대응하는 감각을 넘어서서 자아 스스로를 사물화하는 이러한 관조觀照의 시가 시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말을 기억한다. 스스로 바위가 되어 꿈을 꾸겠다는 시인의 발언은 숱한 간난 艱難의 시간과 역경을 거치고 난 후에 이뤄낸 것으로서,『바위의 꿈』이후의 행보를 궁금하게 만드는 첫걸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