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소통으로 가는 서정抒情의 길
나호열 시인∙문화평론가
시인의 길
예술가의 재능이 천부적天賦的이라는 주장은, 범인凡人이 미처 가닿지 못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보일 때 예술의 위의威儀가 빛나는 것이라는 말과 뜻이 닿는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의 정의는 문화의 발전에 따라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다. 혼성모방이라 일컬어지는 장르 간의 혼융, 더 나아가서 창작자의 경계 또한 모호해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향수享受의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시 보고 마음에 닿아도 놓치는 것이 있다, 그것을 찾아가는 여행길’이라고 자신의 시 쓰기를 피력한 김정희 시인의 말은 굳이 상상력에 기반한 독특하고 강열한 창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너는 봄꽃이다』(2015), 『고래에게 말을 걸다』(2017), 『혼자가 아니라서 더 예쁘다』(2019)에 이어 내놓는 이번 시집 『비켜 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에둘러 인식의 변화나 자기 쇄신의 방도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상의 신고辛苦를 꿋꿋한 심성心性으로 순화시키려는 시도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정희 시인의 각각의 시집의 표제에서 뽑아 본 ‘봄꽃’, ‘고래’, ‘혼자가 아님’, ‘비켜 선 너’에서 추출할 수 있는 희망(봄꽃)과 자유(고래), 어울림(혼자가 아님과 비켜 선 너)에 대한 관념은 그 관념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정언명령定言命令, 즉 비켜선 너에게 ‘예쁘다’라고 말을 걸고, 그 무엿에든 안부를 묻는 적극적 행위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정희 시인이 꿈꾸는 시는 이렇듯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상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며, 언어의 조탁彫琢을 통한 미학적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다가온 변화의 일상 속에서 함몰되기 쉬운 서정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 힘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속뜻이 김정희 시인에게 있어서는 타고난 순수한 품성이 각박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훼손되지 않게 하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즉, 등단한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인의 시작詩作은 시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관詩觀을 견지하는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의 삶에 천착하지 못하는 현란한 시풍詩風에 휩싸이고, 타인들의 세평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보면 알게 모르게 시를 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허수아비의 함정에 빠진다. 어째든 분명한 것은 시는 표현의 도구이며, 시인(인간일반)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주체가 사라진 시는 사탕처럼 달콤하기는 하나 시인의 정체성이나 삶의 진정성을 구현하지 못하는 껍데기만이 남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정희 시인은 시를 통해 부조리하고 헤쳐 나가기 힘든 삶에 구호口號를 앞세워 사납게 맞서는 것도 아니고, 또한 달관으로 오해하기 쉬운 체념으로 미화하는 것도 아닌 극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가는 지금까지 펴낸 시집들을 관통하는 것이어서 전혀 새로운 언급이 아니다.
글쓰기는 말걸기이다
‘글쓰기는 말 걸기이다’라는 이 명제는 이문재 시인이 시 쓰기를 풀이한 글의 제목이다. 시인은 시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마지막 개인’으로서의 나를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시(쓰기)가 필요하다. 시(쓰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단독자가 아니다. 완전한 포로다. 나는 이 거대 도시가 요구하는 온갖 제도와 가치로부터 이탈해 자립, 자존, 자족 할 수 없다. 나는 이 반인간적인 문명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말해 늘 깨어 있기 위해 시(쓰기)를 필요로 한다.
- 「글쓰기는 말걸기이다」 일부 발췌
위와 같은 언명은 시를 쓰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나’는 제도와 가치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 없다. 이 제도와 가치가 주는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 즉, 무애無碍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단독자로서의 ‘나’는 자유- 존재에 대한 완고한 신념-를 획득하는 대신 어찌 할 수 없는 또다른 고독이라는 포로에 갇힐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김정희 시인은 ‘혼자가 아닌 여럿’(『혼자가 아니라서 더 예쁘다』참조)을 향해 가고자 열망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김정희 시인은 자신의 완강한 자아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 앞에 놓여진 사람, 사물, 현상- 이를테면 계절로 말미암은 감상 등– 에 말을 거는 것이다.
서정抒情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대화에서 출발한다. 시인에게 시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언제나 1:1로 시인의 자아와 대응한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마음에 닿아도 놓치는’ 무심한 대상들은 시인 자신을 되비춰 주는 거울인 셈이다.
휘몰던 흙탕물 흘러가고
고요하게 앉은 맑은 물
마주 보고 있다
물 아래 비친 세모
물에 뜬 네모
그 안에 둥그런 세상
- 「거울」 전문
세파에 시달린 자아는 흙탕물과 같다. 바로 그 때,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할 때 ‘세모’가 표징하는 날카로움과 ‘네모’가 주는 규격화된 삶은 비로소 둥글게 보여지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다가오는 이 세계의 온갖 자연물과 사건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거울에 비친 자아를 세모도 아니며 네모도 아닌 원융圓融으로 둥글어지게 만드는 수련修練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수련은 기쁠 수만은 없다. 젊은 아들(?)이 수없이 떨어지는 직장 면접에 다시 나가는 풍경을 그린 「내일로 가는 별이 뜨고 있다」.「날개에 쏟아지는 햇살」과 같은 시들은 이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암울함을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모두 알다시피 급격하게 다가온 디지털 문명의 탈 인간화, 다시 말해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를 예견하지 못한 전 인류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은 시대의 조류에 따라가지 못한 위정자들의 잘못 때문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금씩 느려지는
시간에 쫓긴 바쁜 걸음
면접실 질문과 마주 보고 있다
등허리로 흐르는 땀
조용히 속옷에 스며든다
사무실 천장을 돌아
창문 밖 공기를 찾던
다시 만나길 바란다며
따라오는 건조한 목소리
얇은 명함 속에 집어넣는다
파도에 밀려 다시 돌아온 섬
늘어선 등대마다
하나둘 불 밝히는 가로등
너의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잔별
내일로 가는 발길에 쏟아지고 있다
- 「내일로 가는 별이 뜨고 있다」 전문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세상의 문 밖에 서 있는 젊은이들에게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이른바 희망고문일 뿐이다. 시인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세심하게 시집을 살펴보면 김정희 시편의 한 특징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 판단이나 신념을 배제한 채로, 객관적 정황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음판에서 미끄럼 타던 하고 싶은 일이
세상을 향해 긴 호흡을 날린다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덮으며
다가오는 햇살
움츠러진 날개에 쏟아지고 있다
- 「날개에 쏟아지는 햇살」 마지막 연
「가로등 꺼진 푸른 바다로 가는 너」,「날개에 쏟아지는 햇살」와 같은 시에서도 또한 구직求職에 나서지만 번번이 낙방하는, 피붙이 아들일지도 모를 젊은이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으나 번번이 미끄럼을 타는 아쉬움을 그리면서 그래도 새 날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무심히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무심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절망은 희망에서 태어난다!
우리는 어떤 사유에 의해 행동을 하게 될 때 타인에게 용납되지 않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 때 행동의 당사자는 성격이 그렇다고 습관적인 변명 아닌 변명을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성격性格은 말 그대로 마음이 습관화된 틀에 갇혀 있음을 말한다. 오래 전 공자 孔子는 인간은 평생 교육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설파했다. 말하자면 고착된 신념(객관화 되지 않은)이나 판단의 오류에서 빚어지는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유연성을 배양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생각해 볼 때, 태어날 때부터 구유하고 있는 품성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품성의 호불호를 떠나서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향性向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겸손이 지나치면 비굴이 되고 자신만만함이 과하면 교만이 되듯이 인간다움이란 끝없이 자신을 무두질하는 일에 다름 아니며 시 쓰기 또한 그러한 무두질의 일종인 것이다.
김정희 시인의 무심함은 앞 서 말했듯이 현실에 굴복한 체념도 아니고 위장된 달관도 아니다. 한 때 한 몸을 이루었던 가로수의 껍질이 떨어져 길가에 뒹구는 모습을 보며 ‘부석부석 남겨진 몸뚱이 / 담담히 걸어가 길 끝에 서 있다 / 저기 앞에 출렁이는 / 푸른 바다’ (「껍데기3」)라고 인식하거나, 떨어져 내리기는 하나 –태어나기는 했으나- 속절없이 쌓이고 녹아버리는 눈처럼 수동적 난관에 봉착한 사람에게 ‘그래도 / 겨울비가 아니어서 / 여름눈이 아니어서 // 그만 아파’(「겨울비가 아니어서 여름눈이 아니어서」2,연 3연)하라고 위로하는 독백이 살겨운 것은 비명도 없이 스러져 가는 앞길에 출렁이는 바다가 있음을 예감하는 서정의 힘이 없다면 다가갈 수 없는 경지이리라.
부서져 내린 나무껍질과 안착할 곳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눈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투사하면서도 출렁이는 푸른 바다를 꿈꾸고 여름에 내리는 눈이 아니고 겨울에 쓸모없이 내리는 비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는 그 마음은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잊지 않고, 잃지 않았던 거울의 힘이었으리라. 거울은 앞에 서 있는 그대로를 반영한다. 거울 앞에서 비춰진 허상을 가감 없이 바라볼 때 서정시는 감상感賞도 아니고 감상感傷도 아닌 무념의 경지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미 달팽이에게 한 잎 다른 잎으론 애벌레 품고
아물지 않은 상처 그대로 꽃을 피운 장다리꽃
달려든 벌떼 꿀 따간 뒤 꽃 지는 날 찾아오면
위로 없는 아픔 발끝까지
풋내 나는 여린 알맹이 가슴 시리게 하는 누런 깍지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다 내어주고 남은 빈 주머니
걸어온 그 길에 분명 어여쁜 꽃 있었지만
자식꽃 부모꽃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수수한 꽃
가는 허리 헐렁한 그 꽃 빈집에 활짝 피어 있다
- 「빈집에 활짝 핀 그 꽃」전문
장다리꽃은 배추나 무에 피는 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장다리꽃은 쓸모가 없다. 식탁에 오르는 배추나 무의 튼실한 수확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 장다리꽃은 중의적 표현重義的表現 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들, 그럼에도 생명에의 의지를 지닌 것들, 배추와 무로 연상되는 어머니의 양분을 소모시키는 자식들로 비유할 수도 있다. 자신을 버리면서도 다른 생명을 키우는 힘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집이 상징하는 절망이야말로 희망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임을 시인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은 ‘새벽이슬에 눈을 틔어 / 가장 예쁘게 활짝 피운 꽃 / 기껍게 저녁을 맞이’(「산다는 것」) 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의 원천은 김정희 시인에게 품수된 타고난 성품에서 출발하여 어쩌면 이순耳順을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바라보는 지난 세월에 대한 반추로부터 싹튼 것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추억을 소환하다
시집『비켜 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에는 시인의 유년을 회상하는 시편들이 다수 보이고 있다.「삼패동 연가1」,「삼패동 연가2」,「한강」,「엄마 앞치마」,「중앙선」,「외상」,「 바래길」 등의 시편이 그러한 시들이다. 오늘날과 같이 ‘눈도 뜨기 전에 / 스마트폰이 날개를 펼치는’(「비켜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가상 假想과 환영이 범람하는 삶에서 아득하게 멀어져 갔으나 잊혀지지 않는 불변의 유년은 나이듦에 찾아온 소중한 선물이다. 고향을 상실한 유목민의 삶에서 김정희 시인은 행복하게도 유년의 그 장소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어디론가 달려가는 중앙선 기차와 느릿느릿 다가온 도시화의 물결이 오버 랩되는 고향의 정취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시인의 부드러운 심성을 다독이는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막걸리 수발을 위해 투덜거리며 걸어갔던 그 길(「외상」참조)은 또한 어머니가 힘들게 오르내렸던 바래길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바래길 있었더랬지
경동시장에 내다 팔 산나물 들깻잎
머리에 인 어머니
첫차 타러 비탈길 걸어가던 길이었지
자갈 튀는
버스 길에 다다르면 숨이 턱에 차올라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지
돌아올 때는 내가 좋아하는
물오징어 서너 마리 간 고등어 한 손
흰색 운동화 든 보자기 가방 있었지
수없이 다니던 바래길에서
뼈마디 툭툭 튀어나온 다리에 기댄 어머니
오래도록 서 있었지
우리 마을에도 파도치는 삶 속으로
새벽 별 따러 가는 바래길 있었더랬지
- 「바래길」 전문
원래 바래길은 남녘 바닷가 어머니들이 물때에 맞춰 소쿠리를 들고 나가 해초류와 조개 등을 담아 오던 길을 말한다. 사시사철 끼니를 넘기기 위해 힘든 길을 오가던 어머니를 추억하는「바래길」은 서울과 가까운 듯 멀었던 남양주 삼패동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그 길은 이제 전철이 달리고, 좁고 울퉁불퉁한 흙길은 넓게 곱게 펴져서 반 시간이면 청량리에 닿는다. 시인은 평생을 고향에 머물면서 상전벽해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만 영영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맹꽁이가 찾아와 ‘이제는 / 콘크리트 창고 즐비한 곳 / 아주 작은 웅덩이를/ 고향이라 찾아와 / 맹꽁맹꽁 맹꽁맹꽁’ (「듣고 싶은 노래」부분)울어대는 상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주기도 한다. 나이 듦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는 생명들이 함께 숨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시집『비켜 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에 드러난 주제를 요약한다면 김정희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서정이 깃들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여기에서 말하는 서정은 책머리에서 술회했듯이 스치듯 잠시 만나도 오래 본 듯, 쉽게 잊혀지지 않고, 보고 싶어도 쉬이 만날 수 없는 시간을 향한 그리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절單節로 이루어진 시편들은 성급한 비유를 비껴서서 검이불루儉而不陋의 화법을 구사하면서 과거와 화해하고 오늘과 소통하는 절실함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싸리나무」는 그런 삶의 진정성을 체득한 시인의 자화상으로서 자리매김하면서 동시에 시인 자신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생명에 대한 외경 畏敬을 고백하고 있는 명편으로 각인된다.
가로수 뒤에 서서 꽃을 피운 싸리나무
너무도 조용히 서 있다
한때는 정겨운 우리 집 대문이었고
겨울 눈꽃 피는 울타리였다
숨 막히는 복더위 뚫고
잎 사이 가는 줄기마다 꽃을 피운
여리고 여린 싸리나무
어린 손에 맞게 아버지가 만든
장난감 싸리 빗자루
온종일 쓸고 쓸어 이마가 벗겨진 마당
환하게 스쳐 간다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8월과 호흡 맞추며
진분홍으로 물들어가는 그 모습
오늘에야 보고 있다
- 「싸리나무」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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