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남루襤褸를 풀어내는 무위無爲의 시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1.
곽성숙 시인의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 원고가 도착할 즈음, 우연하게도 두 편의 평론을 읽고 있었다.「이제 시론을 갱신할 때가 되었다」『예술가』, 김유중 202년 봄호와 「한국시의 미래를 묻다」『시와 문화』, 박명순 2022년 봄호가 그것들인데, 다행스럽게도 그 글들은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의 전모全貌와 의의意義를 살펴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두 편의 글은 오늘의 한국 현대시의 양상을 살펴보고, 앞으로 바람직한 시의 진로를 진단하는 것으로서 마침 곽성숙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지형을 견주어보고 시집이 지니고 있는 독창성을 쉽게 찾아내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두 편의 주장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시론을 갱신 할 때가 되었다」에서 시의 기본적 정의는 “시란 민족어, 모국어의 미학적 자질을 발굴하고 포착하여 그 숨겨진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으로서 전통적 서정시의 개념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시는 파편화된 시대현실의 반영이자 위기에 처한 자아내면의 비명일 뿐”이라는 최근의 탈 이성적, 해체적 문법에 기울어진 난해시를 대척점에 놓는다. 보편적 인간 정서의 불변不變함과 예술의 숙명이 새로움의 창조에 있음을 자각하는 그 사이에 놓여진 시대적 정황이 시의 정의를 되묻게 하는 단초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전통적 서정시의 핵심이 서구로부터 유입된 근대近代이념의 산물이라면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탈 경계의 시대에 돌입한 바로 지금의 상황을 ‘시인이 애매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인생사가 복합적이고 애매하기 때문이다.’엄경희, 「시인은 왜 애매하게 말하나」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서구西歐보다 더 서구화된 우리의 생활양식과 충돌하는 전통적 의식意識 - 유교문화나 농경사회의 공동체의 의식- 과의 괴리와 혼란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엄중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본래부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서정적 자아가 오늘날의 파편화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듯이 복잡하고 애매한 우리의 삶을 그려내는 시를 ‘자아내면의 비명’으로 치부하고 만다면 앞날을 예언하고, 오늘을 진단하며 관성을 깨뜨려야 하는 시인의 존재이유가 약화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 감동과 공동체적 설득이 일치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가치의 기준이 모호해지고 개별적 자아의 충돌이 빚어내는 혼란한 국면을 타개해 나가는 한국 현대시가 모색해 나가야 함”을 주장하는 「한국시의 미래를 묻다」의 논조는 전통 서정시의 정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의 현대시의 외연을 확장하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작금의 시를 둘러싼 개괄적 고민이 곽성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에서는 어떻게 포용, 변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의 특이함을 한자성어로 요약하면 시법詩法은 문장의 난삽한 비유를 배격하면서도 삶이 핵심을 겨누는 대교약졸大巧若拙 『노자도덕경』 45장 참조을 취하면서 주제를 아우르는 소재가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의 풍경이나 사물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에서 검이불루儉而不陋 『삼국사기 백제본기』 참조를 지향하며, 이로부터 출발한 시인의 세계관은 스스로 생겨나고 스스로 무너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도덕경』 48장 참조)을 지나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즉, 소요유逍遙遊 (『장자 내편』 참조)를 향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인 곽성숙 시의 내면에는 가히 우주적 사랑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천성적 바탕이 – 회사후소繪事後素 (『논어 「팔일편八佾篇」 참조) –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곽성숙 시인의 눈길은 무의식적으로 쓸모가 없어져서 잊혀지거나 사라져가는 풍경에 가닿는다. 시집의 표제시 이기도 한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를 읽어보자. 박공널은 선암사 해우소 맞배지붕의 양쪽 끝에 ㅅ 모양으로 붙인 널빤지이다. 시인은 그 풍경 속에서 이야기를 불러내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호명하면서 그동안 나누었던 인정을 되살린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 시편에서 보여지는데 「선자연이란 부채」 시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선자연은 추녀 양 끝에 부채살처럼 건 서까래이다. 시인은 선자연을 보고 자리에 누워 선자연을 바라보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화사석에 꽃이 피어」에서는 개선사지 석등을 보고 애틋한 연정을 품은 여인의 기다림을 이끌어낸다. 야사리 은행나무「사랑이 울거든」 나 은곡리와 같은 동네「숨은 길」, 심지어 쇄골이나 불편한 왼뺨 「왼쪽에 대하여」까지 시인의 눈길이 닿는 곳에는 별 볼일 없는 이야기나 풍경조차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마법이 펼쳐진다. 필자는 그 느낌을 명랑한 슬픔이라고 명명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이루지 못하는 일방적 사랑, 늙고 쇠락해 가는 쓸쓸함에도 어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명랑한 슬픔이며 이 명랑한 슬픔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위무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은 현란한 수사修辭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시의 위의를 즐길 수 있다는 징표를 보여주고 있다.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친구 집 들어가는 돌담을 걷다가
바람을 솎아주고 가는 길을 내어준다는 제주 돌담은
바람의 길이라는 말이 생각났어요
제주 구럼비 마을에서 들은
파풍이라는 말도 떠올랐어요
파풍破風, 놀라운 말이 아니던가요
바람을 깨기 위해서 필요한 제주 돌들의 구멍
그런 바람의 길을 가슴에 몇 개씩은
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니던가요
하나는 나를 위해
하나는 당신을 위해
하나는 못 견딜 이 삶을 위해
들어오는 문은 다 다른데
안에서는 드글거림이 같은 이들에게
들락대는 길을 두지 않고는 결코 견딜 수 없어
구멍 몇 개 뚫어놓고 살아가는 우리가 아니던가요
구멍 숭 뚫린 문을 두어
너를 받아들이기도 내보내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풍진 세상에서
진정 너를 사랑하는 돌담 같은 나 아니던가요?
- 「우리가 돌담 아니던가요」 전문
곽성숙 시는 억지스럽지 않고 과다한 추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자연스런 연상聯想이 마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듯, 유려하게 흘러간다.
돌담은 외떨어진 섬이나 해안가, 내륙의 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집과 집 사이의 경계석이다. 동시에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바람막이 역할도 하는 것이 돌담이다. 제주의 올레가 그러하다. 시인은 그 돌담 사이에 난 구멍을 제주 섬에서는 파풍破風이라 부른다는 것을 상기한다. 바람을 부순다? 한 방향으로 몰려오는 바람을 순하게 만드는 것이 구멍이며, 그 구멍을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오가는 문이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과 같이 마음이 사나워지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불통의 세태에서 돌담의 숭숭 뚫린 구멍처럼 ‘드글거리는’ 사나운 마음을 잠재우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넌지시 이야기 하는 이 시를 부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기도 한다.
4.
「우리가 돌담이 아니던가요」의 마지막 연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만병통치약이 구멍이 뚫린 돌담이 되는 것이며, 시인의 정체성이 돌담 같은 사랑에 있음을 천명한다. 그 사랑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적 관념임이 틀림이 없다. 에로틱하기도 하고, 애절하기도 한 시인의 사랑은 완전히 행복한 결말을 이루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일방적인 독백 내지 토로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이 꿈꾸는 사랑은 건강한 나르시시즘으로 생의 환희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하다. 생각해 보면 건강한 나르시시즘 – 자기애自己愛-은 자기 자신을 욕망하되, 타자他者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그래서 고맙지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사랑해서 행복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기다리며 서럽고
헤어질 사람 없어도
홀로 이별하며 아플 수 있는 시
- 「홀로 시詩 , 아리랑」 2연
위의 시는 단지 시인이 시를 쓰는 – 써야 하는 – 필연성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가 꿈꾸는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 시집의 2부에 집중되어 있는 사랑 시편은 ‘당신’으로 표현된 대상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것은 욕망의 분출이나 정복, 소유의 욕망과는 다른 층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배가 바람처럼 간들 / 당신만 태우고 가지 않으면 / 손 흔들 수 있어요”「부럽지 않아요」 첫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배’는 떠남의 도구이고 ‘당신’은 떠남의 주체인데 배는 떠나고 당신은 남아 있으므로 기쁘게 손 흔들 수 있다고 표명한다.
시가 언어의 애매성과 그 언어의 뒤틀림에 따라 의도의 오류가 발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필자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세월이 곧 ‘배’이며 그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육신의 쇠락이 찾아온다고 해도 결코 항심恒心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당신’으로 읽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항심이라 하는 것은 나를 둘러싼 난경難境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당신은 구비구비 숨은 골짜기 말고
깊고 깊은 산속 작은 동네 길 말고
내 안의 숨은 길 따라 직진으로 오세요.
- 「숨은 길」 마지막 연
당신을 생각하면 혀에서 새순이 돋는 듯 간지럽습니다
제가 당신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는 거지요
… (중략) …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이 이제야 와도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자신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어디서든, 당신은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 「당신 생각」 첫 연과 3연
그러니 사랑도 사레처럼
너무 뜨겁게 격렬하지 말고
너무 한꺼번에 불타오르지 말고
찬찬히 스며드는 거다.
- 「사레처럼」 마지막 연
시인은 사랑을 본유적인 품성稟性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학습學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 안의 숨은 길” 「숨은 길」은 잊어버릴 수 있고 스스로 영영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어떻게든, 어디서든, 당신은 오시기만 하면 되” 「당신 생각」는 감성이며 “그러니 사랑도 사례처럼…천천히 스며드는” 「사레처럼」것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없는 사랑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시인은 아버지「늙은 우체부」 참조와 어머니「봉투들의 사랑방」, 「길갓집」 참조, 할머니「사랑의 화석」 참조 등등의 선대와의 추억을 반추하며 사랑을 깨우친다. 그들은 보상을 바라고 시인을 환대한 것이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옆집 할매는 제초제가 남았다고 “풀약 남았응게 화단에 약쳐주께 잉 / …날 뜨겅게 내가 휘
익 금새 뿌려줄게”「풀약 쳐줄게」, “밥 때가 되면 서둘러 밥을 짓고 / 반찬을 만들어 두 집 건너 사는 우리 남매들을 부르”「옥이 이모」던 옥이 이모, “옥수수도 툭, / 복숭아도 툭, / 고구마도 툭, 어느 날은 시집도 커피도 찐 감자도 마루에 놓고 가”「뒷배 형님」는 뒷배 형님 등은 어느 날부터 스물스물 사라져버린 공동체의 따스함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시인은 “나를 사랑해주고 아끼는 마음이 모여 /끝없는 염려와 응원으로 바라보는 / 뜨거운 눈길을 정인이라 하겠다”「정인이 정인에게」 2연고 말한다. 우연히 인연이 닿아 영육의 사랑을 나누는 정인情人과 혈연으로 이어진 정인定人이거나를 막론하고 “기실 사랑은 헤어날 수 없는 감옥”인 까닭에, 그 감옥은 사람들을 나누고 유폐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뜨겁게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이기에 시인이 읊조리는 사랑은 무차별적이고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훌쩍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긋나긋 속삭이듯 시인의 사랑 시편을 연모로 가득한 어느 이의 독백으로 음유吟遊하는 즐거움을 잊지는 말자.
5.
앞에서 곽성숙 시인의 시편을 일러 명랑한 슬픔이라고 명명한 바 있고, 시인이 인식하고 실행하려는 사랑이 건강한 나르시시즘의 발로라고도 말했다. 거기에 덧붙여 이러한 시인의 심리가 학습으로 구축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분석이 시인이 태어나면서 구유具有한 천진난만한 심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섯 살 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시 「옛 편지」에서의 시인은 두 살 위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는 막무가내 귀여운 악동惡童이다.
오래 전 이지李贄가 때 묻지 않은 동심童心이 문학의 출발점이자 정점頂點이라고 주장했듯이 시인이 들여다보는 유년은 바탕이 맑기 그지없는 순수한 마음이며 그 바탕위에 쓰는 시는 세파에 얼룩지지 않은 사랑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시의 신발」, 「손수레」, 「시와 쌀」, 「그러네, 정말」, 앞서 잠시 언급한 「홀로 시詩, 아리랑」, 「당신의 시집」 등등의 많은 시들은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의지를 공고히 하려는 시인의 안간 힘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곽성숙 시인의 시편이 보여주는 구어체의 문장은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존재의 소멸에 대항하는 의식의 순간적 반응과 직결되어 있는 염결성廉潔性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소금쟁이가 그렇게 물 위를 살금
튀어 옮기는 것은
제 몸이 녹을까 싶어서야 소금쟁이잖아
물에 사르르사르르 녹아버리는 소금이잖아
소금을 지니고 태어났으니
제 몸을 살짝
아주 조금씩조금씩 사라지며
이 생을 버티는 거야
네 다리를 쫘악 벌리고 뛸 때마다
물의 짠맛은 짙어가지만
발바닥은 얇아지지만
쉬지 않고 튀어보는 거지
나는 소금쟁이니까
가만히 있다 녹아버릴 수는 없으니까.
- 「소금쟁이가 튀는 이유」 전문
이 빛나는 시는 존재의 장렬한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을 위로하고 소멸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을 찾고 그로부터 안식을 염원한다. 그러나 이 시는 ‘소금’이 상징하고 있는 개별적 존재의 유용함이 소멸을 경유하여만 구현됨을 함축하고 있다. 뭍 생명들은 물 없이 살 수 없고,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거대한 코끼리들이 광활한 대지를 헤매며 흙을 파헤치며 코를 들이
대고 소금을 찾는 광경을 떠올려 보라!
우리가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을 더듬어 여기까지 온 것은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존재가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음이 소금과 같은 사랑을 긍정할 때 이룩되는 일임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시인 곽성숙에게 있어서 시는 소금쟁이의 운명을 타고 난 존재를 지탱하는 힘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금쟁이가 튀는 이유」와 「시의 신발」은 모든 존재의 소멸하는 운명과 더불어 그 존재가 소금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맞서는 긍정의 메시지로 읽어야만 한다.
시인의 눈길이 닿는 세상의 풍경은 모두 시간의 사슬에 묶여 있지만. 그러나 남루한 물상들은 또한 존재하여야만 하는 필연적 섭리를 지니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거를 지니고 있는 모든 물상은 서로서로 기대는 ‘ㅅ’ 이면서 ‘人’이다. 인식의 주체인 사람은 놓아주고, 품어주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 즉 무위無爲를 행할 때 소요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말하자면 바람의 영혼이 되는 일이다.
시인은 “바람의 냄새를 맛보고 싶다 … 중략 … 바람 냄새, / 전신을 흔드는 그 냄새를 / 저는 지금 은밀하게 맛보는 중입니다.”(「바람 냄새와 맛의 관계」)라고 말한다. 형체가 없는 바람은 그 무엇도 잡을 수 없고 어느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바람은 스쳐지나가는 그 모든 것들에게 생生을 환기하는 에너지를 부여한다. 무無에서 시작해서 무로 끝나는 바람은 행위 하지 않는 듯 행위하고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까닭에 그 무엇도 구속하지 않는다. 이를 비추어 본다면 바람
냄새를 맛본다는 것은 연상과 추리와 상상력을 추동하는 능력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시인이 걸어온 사유의 결과물이다.
흐르고 떠도는 바람입니다
산비탈을 핥는 바람입니다
참새 혀 같은 푸른 잎
엄마 젖 같은 뽀얀 꽃
잎과 꽃을 핥는 허기진 바람입니다
산들바람, 하늬바람과 노니니
얼마나 축복입니까
빈번히 놀러오는 구름과의 재회는
얼마나 황홀한 기쁨입니까
때로 청보리 밭에 일렁이는 감미로운 명지바람으로
당당하게 장대비 몰고 다니는 구름 바람으로
은밀히 떠돌고 흐르는
마파람으로 출근하는 나는
얼마나 설레는 출렁임 입니까
전생의 영혼을 휘휘 찾아가는 솔바람을
당신 이마에 동봉합니다
잠포록한 날에 저를 만나시거든
푸른 잎사귀와 붉은 꽃을 주십시오.
- 「바람의 영혼」 전문
바람은 우리에게 곧잘 정처 없는 허무와 부질없음과 줏대 없는 소멸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바람의 영혼」에서의 바람은 무위와 자유의 다른 말로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생물로서 아가페 그 자체이다. 주고 받는 호혜의 관계가 아니고 받음을 전제로 하는 것도 아니며 무조건적으로 부여하는 사랑은 이미 시인에게 당도한 착한 선물임이 틀림이 없다.
6.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는 『날마다 결혼하는 여자』 (2016)에 이은 곽성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오늘날 우리 현대시의 경향傾向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적 서정시의 어조를 견지하면서 사물에 대한 깊은 해찰과 그 해찰로부터 얻어진 사유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직조하는 시의 묘미를 거두는데 성공하고 있다.
현학적이고 현란한 수사修辭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우리의 시가 지향하는 현대적 감각을 표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시편들을 단순히 집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실천할 수 있는 삶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한 치밀한 논리를 갖추었다는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정된 지면 탓에 길게 언급할 수 없지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는 시집 『박공널의 시옷이 되어』에 질펀하게 펼쳐진 곽성숙 시인의 낭만적이면서 슬픔이 배인, 모든 독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를 축약하는 시로 감상하였음을 밝히고,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앞으로 이어질 시의 행로를 예감하고 있음도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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