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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우리 그림속 나무 이야기

[23] 인왕산 계곡, 나무들 곁 아늑한 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1. 5. 13:30

[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23] 인왕산 계곡, 나무들 곁 아늑한 집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8.27 03:00

 

정선,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1755년경)’, 종이에 담채, 27.3㎝ x 27.5㎝,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중기 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1676~1759)은 50대 초에서 여든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여 년 살던 집을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로 그려두었다. ‘인왕산 계곡에 있는 아늑한 집’이란 뜻이다. 인왕산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계곡 옆에 서향집을 짓고 겸재 자신은 서재의 문을 활짝 열어 유유자적하는 모습으로 그림 속에 들어가 있다.

마당 가운데는 제법 굵은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자라고 왼쪽 담장 바로 앞에는 귀룽나무가 자리를 잡았다. 오동나무 앞 어린 버드나무 밑에서 싹튼 머루는 덩굴을 뻗어 큰 버드나무에 걸쳐 있다. 서향집은 여름날 오후가 되면 햇빛이 집 안까지 깊숙이 들어온다. 건물 가까이 오동나무를 심어 햇빛 가림막을 만들었다. 오동나무는 10년이면 높이 10여m에 이를 만큼 빨리 자라고, 커다란 잎이 무성하여 해가림에 안성맞춤이다.

그림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가운데의 버드나무다.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과의 차이점은 가지가 길게 늘어지지 않은 것이다. 옛 그림에서 능수버들과 섞여 자주 만날 수 있다. 오동나무 뒤쪽으로도 2~3그루가 더 있다. 오동나무 앞의 어린 버드나무를 포함하면 4~5그루나 된다. 다섯 그루의 버들을 심고 스스로를 오류(五柳)선생이라고 한 도연명처럼 겸재는 소박한 삶으로 멋과 풍류를 아는 선비를 꿈꾸지 않았나 싶다. 멋스럽게 버드나무에 걸쳐진 덩굴은 머루가 아니면 포도다. 둘은 잎 모양으로는 전혀 구별할 수 없으나 손이 많이 가는 포도보다는 자연적으로 잘 자라주는 머루를 심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머루 덩굴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시렁을 따로 만들어 주지 않고 버드나무에 걸쳐주었다. 더 자연스럽고 운치가 있다.

왼쪽 담장 아래에 연하게 나타낸 줄기와 밑동이 V자로 갈라진 나무는, 그림에서 명확하게 특징을 찾기는 어렵지만 필자는 귀룽나무라고 짐작한다. 지금도 인왕산이나 북악산 일대에서 쉽게 만날 수 있고 활엽수 중 가장 먼저 잎이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이다. 5월에 무리 지어 피는 하얀 꽃도 선비의 정원수로 충분히 품격을 갖춘 셈이다. 아래쪽의 끝만 보이는 잎 넓은 나무는 진한 보라 꽃방망이를 만드는 박태기나무다. 겸재가 앉아있는 바로 앞 나무는 샛노란 꽃이 일품인 황매화로 보인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의 전통 정원에 자라던 대표적인 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