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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생명의 안간힘으로 피어난 ‘안갖춘꽃’의 특별한 향기를 찾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3. 16. 11:35

 

[나무를 찾아서]

생명의 안간힘으로 피어난 ‘안갖춘꽃’의 특별한 향기를 찾아

재우쳐 다가오는 봄 소식이 따사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는데, 아파트 울타리에 다소곳이 웅크리고 낮은 키로 서 있는 회양목 Buxus koreana Nakai ex Chung & al. 에서 환하게 피어난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겨우내 콘크리트 빛의 우리 도시를 초록빛으로 지켜준 고마운 나무입니다. 회양목은 키가 작은 데다 꽃도 도드라지지 않아 존재감은 적지요. 자연에서 저절로 자라는 경우라 해도 2미터쯤 자라는 게 고작입니다. 더구나 도시에서 조경수로 키울 때에는 그만큼 자란 회양목도 보기 어렵지요. 흔히 생울타리로 심어 키우는 탓에 높이 자라지 않도록 가지를 적당하게 잘라내는 때문이지요.

○ 작지만 옹골차게 봄 마중에 나선 앙증맞은 크기의 나무 ○

이 작은 나무도 봄 마중에 나섰습니다. 회양목도 존재의 의미를 다 하기 위해 꽃을 피웁니다. 해마다 회양목은 가지 위의 잎 돋은 자리 아래, 달리 말하면 잎겨드랑이에서 연두 빛인 듯, 노란 빛인 듯한 야릇한 빛깔의 꽃을 피웁니다. 여느 때보다 먼저 피어난 회양목 꽃입니다. 하긴 회양목뿐 아니라, 갈수록 봄꽃의 개화시기가 빨라지는 상황이지요. 사실 꽃이라고 했지만, 참 작을 뿐 아니라, 빛깔이나 모양에서 모두 그리 볼품이 있는 건 아닙니다. 회양목은 잘 알아도 회양목의 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보았다 해도 그게 꽃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친 분들도 있을 겁니다.

 

회양목의 꽃에는 우선 꽃잎이 없습니다. 워낙 작아서 꼼꼼히 살펴보기가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꽃잎이 나야 할 자리 바깥으로 넉장의 꽃받침이 보이지만 분명히 꽃잎은 없지요. 꽃잎 없는 꽃이라니. 그러나 식물 가운데에는 회양목처럼 꽃잎 없는 꽃이 적잖이 있습니다. 하나의 꽃을 이루는 기본 요소를 암술과 수술, 꽃잎과 꽃받침으로 이야기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고 피어나는 꽃들인데, 이같은 특별한 형태의 꽃을 식물학에서는 ‘안갖춘꽃’ 혹은 ‘불완전화’라고 부르지요. 꽃잎은 채 갖추지 못한 채 번식을 위한 최소한의 요건만 겨우 갖춘 셈입니다. 꽃잎 없이 꽃술만 삐죽 내미는 형태로 피어나는 서글픈 꽃이지요.

○ 꽃가루받이를 이뤄줄 곤충을 끌어들이기 위한 안간힘으로 ○

가만히 바라보면 꽃술 끝에 꽃가루가 묻어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 볼품없는 그 꽃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향기만큼은 아주 독특합니다. 그런데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혹은 날씨가 흐려서인지, 지금 피어난 회양목 꽃의 향기는 그리 또렷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가까이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맑은 날 벌들이 꽃을 찾아올 즈음이면 필경 회양목 울타리 곁을 걷다보면 이 강한 향기가 저절로 느껴지게 될 겁니다. 이 알싸한 꽃 향기는 그에게 꽃가루받이를 이뤄줄 곤충을 유혹하기 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고 안간힘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서나 자라지만, 특히 석회암 지대에서 잘 자라는 회양목은 자람이 더딘 나무로 첫손에 꼽히지요. 그러다 보니, 낮은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인 마음대로 가지치기를 하면 그 다음 얼마 동안은 별다르게 손을 보지 않아도 오랫동안 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합니다. 관리에 무척 편리한 나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람이 더딘 나무들이 대개 그렇듯이 회양목은 나무의 목질이 치밀하고 단단합니다. 그래서 옛부터 단단한 목재가 필요한 곳에 이용했습니다. 옛날에는 인쇄에 필요한 목판 활자를 만드는 재료로써뿐 아니라, 머리빗이나 장기 알을 만드는 데에도 썼다고 합니다.

○ 사람의 눈에 들지 않아도 수굿이 이어가는 생명의 신비 ○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가장 유명한 쓰임새는 아무래도 도장을 만드는 재료로써이지요. 요즘은 도장 찍을 일이 거의 없어서 도장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는 추세입니다만, 몇 년 전만 해도 도장이야말로 신분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잖아요. 그 도장의 재료로 회양목이 많이 쓰인 겁니다. 물론 도장의 재료로 대추나무를 가장 많이 쓰기는 했지만, 회양목도 그 못지 않게 많이 쓰인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회양목을 ‘도장목’이나 ‘도장나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쓰임새가 얼마나 넓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사람의 편의를 위해 심어진 회양목, 그러나 일단 뿌리를 내린 뒤에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생명에 알맞춤한 살림살이에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작은 나무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봄 햇살이 상큼하게 그려지는 아침입니다. 멀리 여행에 떠나기 어려운 이 봄에는 우리 아파트 울타리에서 수굿하게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회양목의 향기에 오래오래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도심 울타리에서 피어난 회양목 꽃의 봄 향기를 그리며 3월 15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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