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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경북 의성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을 지켜온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1. 3. 13:37

[나무를 찾아서] 경북 의성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을 지켜온 나무

산 아래 계곡에 구름이 감도는 것처럼 보여 산운(山雲)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의성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의 집성촌,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가 그곳입니다. 산운마을은 조선 중기에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1531~1609)이 처음 자리를 잡은 뒤로 지금까지 영천 이씨 후손들이 살림살이를 이어가는 아늑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영천이씨의 종택인 경정(敬亭)종택과 작은 종택이랄 수 있는 자암종택(紫巖宗宅)을 비롯해 학록정사(鶴麓精舍), 점우당(漸于堂), 운곡당(雲谷堂), 소우당(素宇堂) 등 40동이 넘는 고택이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 조선 선조 이후의 혼란기를 살았던 시인 이민성 ○

마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경정종택은 이광준이 처음 짓고, 그의 아들 이민성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이광준의 호를 따서 학동종택이라 하지 않고, 그의 아들인 이민성의 호를 따서 경정종택이라고 한 건 좀 야릇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선 선조 때부터 광해군을 거쳐 인조 시대까지의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1570∼1629)은 외교관 자격으로 중국에 두 차례 다녀온 바 있으며, 1천2백 편이 넘는 시를 남긴 유명한 문장가이기도 합니다.

바깥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침략전쟁이 있었고, 안으로는 인조반정의 혼란에 휩싸인 시대를 살았던 이민성은 일곱 살 때부터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열아홉의 나이에는 아버지 이광준과 친분이 깊었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민성이 자신의 호를 ‘경정(敬亭)’이라 한 것은 퇴계 이황이 강조한 공경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다짐이었지 싶습니다. 선조 때부터 벼슬자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낸 이민성은 인조반정 뒤에 형조 참의를 지내기에 이르렀지요. 정묘호란(1627년) 때에는 이 지역의 대학자인 여헌 장현광의 추천으로 좌도 의병대장으로 천거되어 활동하기도 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 고향 의성으로 돌아와 은거한 매우 활동적인 선비였습니다.

○ 선비의 가문을 상징하며 수백 년을 살아온 한 그루의 나무 ○

이민성의 살림집이었던 경정종택은 한국전쟁 당시에 모두 불에 타 무너앉았습니다. 그때에 살림집의 부속건물이었던 사당이 겨우 남았는데, 이를 중심으로 살림집을 복원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옛 모습대로 복원한 대문에는 지금 살립을 이어가는 후손인 이윤구(李允求)씨의 문패와 우편함이 걸려 있습니다. 하지만 옛 대문 옆으로 언제나 활짝 열어젖혀두는 현대식 대문이 실제 출입문입니다. 아무래도 옛날 방식의 대문으로는 자동차도 드나들 수 없고, 이 즈음의 생활방식에는 불편하겠지요.

경정종택 대문 앞에는 한 그루의 듬직한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지정번호 11-13-12의 산림청 보호수인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입니다. 이 자리에 서서 350년 쯤 살아온 이 회화나무는 높이가 15미터 쯤 되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5미터나 되는 큰 나무입니다.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측량하기는 어렵지만, 이민성이 이 집에서 살림을 이어가던 때보다는 조금 뒤입니다. 분명 선비 가문의 종택을 상징하기 위해 표지수로 심은 나무인 건 분명해 보이는 나무입니다. 아마도 이민성의 후손 가운데에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이 심은 나무이겠지요.

○ 연대에 맞지 않는 전설이 상징으로 살아남아 ○

이 나무에는 “조선 선조 때 좌승지 이경형이 과거 급제하여 귀향시 수행원이 나팔을 가지에 걸려하자 가지가 저절로 휘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에 맞지 않아 헷갈립니다. 우선 선조 때에 좌승지를 지낸 이경형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부터 그렇고요. 또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의 재위 시절이 서기 1567년부터 1608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그때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4백 년쯤 전인데,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는 350년 된 나무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물론 나무의 나이를 잘못 측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400년 전에 이 회화나무가 이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설에서처럼 나팔을 가지에 걸려 했다면 꽤 큰 나무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때에 적어도 100년쯤, 혹은 적어도 50년은 넘어야 하는 나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략 500년쯤은 되어야 앞뒤가 맞겠지만,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는 얼핏 봐도 그 수령을 5백 년 정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산림청 보호수 기록대로 대략 350년 정도의 수령으로 보는 게 적당해 보입니다.

○ 전설의 과학적 사실여부보다는 상징과 비유에 초점을 ○

우리나라의 나무에 얽혀 전해오는 전설 가운데에는 이처럼 사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적지 않습니다. 하긴 전설을 놓고, 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이치를 따지는 건 그리 옳은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전설이든 신화든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와 상징으로 사람들의 살림살이에 꼭 필요한 가치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도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임금이나 관련 인물의 이름을 정확히 끄집어내는 전설일 경우에는 조금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경정종택의 건축 연대보다 조금 늦은 350년 전쯤에 심어 키운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의 상태는 그리 건강하다고 하기에는 좀 모자란 편입니다. 줄기 아래 쪽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동공이 생겼고, 그 자리를 충전재로 메운 외과수술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밖에도 곳곳에 나무 줄기 껍질 부분이 썩어 치료한 흔적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 가문의 상징으로 상징으로 살아남은 〈의성 산운리 회화나무〉가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사람살이의 자취를 상징으로 남긴 나무를 생각하며 11월 2일 대낮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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