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당신은 없는데…… 홀로 단풍만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단풍만 보다 왔습니다
당신은 없고요, 나는
석남사 뒤뜰
바람에 쓸리는 단풍잎만 바라보다
하아, 저것들이 꼭 내 마음만 같아야
어찌할 줄 모르는 내 마음만 같아야
저물 무렵까지 나는
석남사 뒤뜰에 고인 늦가을처럼
아무 말도 못 한 채 얼굴만 붉히다
단풍만 사랑하다
돌아왔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없고요
- 최갑수, 《석남사 단풍》 전문
단풍만 보다가, 당신은 없는데, 홀로 단풍만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나무편지》도 제때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작업실 자리에 앉았습니다. 단풍 빛깔 짙은 들녘, 큰 나무 곁에 서면 언제나 나무보다 사람이 더 먼저 떠오릅니다. 시인 최갑수의 노래가 생각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릴 지상의 양식을 지어야 했던 한햇동안의 길고 고단했던 노동의 날들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봉화 청옥산 숲길을 걸었습니다. 온갖 빛깔로 물든 나뭇잎들에 눈길을 빼앗긴 걸음걸이는 느릿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풍 든 나뭇잎을 바라봅니다. 빨갛게 물들었다고 해야 하지만,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빨강도 제가끔 서로 다른 빨강이고, 노랑도 갈색도 다 제가끔 다른 빛깔입니다. 그들이 품은 지난 계절의 노동의 빛깔이고, 그들을 스쳐간 숱하게 많은 생명들의 흔적이겠지요. 같지만 결코 똑같지 않은 단풍 빛깔들을 보며, 내가 스쳐온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단풍의 명소로 잘 알려진 청량산, 고찰 청량사 입구에서는 관광버스의 출입을 아예 막았습니다. 단체 관람객을 막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도 승용차들이 줄을 이어 들어옵니다. 오전에 짧게 마련한 시간이어서, 청량사, 응진전까지 오를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냥 자동차를 타고 청량산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는 수밖에요.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청량산 단풍이 절정이었습니다. 어느 쪽을 바라보아도 다 그랬습니다. 조금 가다 자동차에서 내려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또 길을 가다가 다시 또 내려 서고.... 그렇게 한 바퀴.
다시 단풍의 이유를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단풍은 나무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입니다. 빙점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기 전에 제 몸에 든 물을 덜어내야 하고, 안토시아닌을 가득 담은 빨간 잎을 떨궈내 다가오는 겨울 동안 스스로를 지켜내야 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눈보라 몰아치는 벌판에서 홀로 찬 바람 이겨내야 하는 건 나무에게 주어진 숙명입니다. 고요해 보이지만,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겨울 잠을 위해 나무는 지금 울긋불긋한 빛깔을 올리는 중입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에는 제가끔 자기만의 멋과 아름다움이 담깁니다. 살아남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 있는 단풍은 나무가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아름다움이겠지요. 나무가 이 계절에 펼치는 화려한 빛의 축제는 결국 오랜 세월을 거치며 나무가 체득한 간절한 생존 전략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다시 노래 한 소절이 떠오릅니다. 시인 이제하는 가을 풍경을 노래한 시, 《단풍》에서 단풍을 “허공에서 쓰러지는 목숨”이 “닢닢이 토하는 핏줄기”라고 했습니다. 절묘한 표현이지 싶습니다.
나무의 처절한 애옥살이를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계절, 가을이 깊었습니다. 소슬바람에 낙엽 지기 전에 다시 또 길 떠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분주한 마음에 에멜무지로 밀린 《나무편지》 한 통 띄우고 다시 신발끈을 조입니다. 모두 풍요롭고 아름다운 가을날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가을 단풍의 이유를 곰곰 돌아보며 10월 27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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